한쪽 발 되어준 고마운 사람들… 책임회피하는 군당국엔 ‘분통’
[특별인터뷰] 1년 전 장항습지 지뢰사고로 오른쪽 발목 잃은 김철기씨
장항습지 환경정화작업 중 유실지뢰 폭발
수술 두 번, 힘겨운 재활… 고통의 시간
신체적 건강과 사회적 관계 하나하나 회복
“생활인과 평화운동가로서의 삶 병행할 것”
[고양신문] 2021년 6월 4일.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장항습지에서 환경정화작업을 하던 작업자 한 명이 지뢰폭발사고로 중상을 입었다는 것. 장항습지가 국제적습지보호기구인 람사르사이트에 이름을 올린 지 한 달도 안 된 시점에 발생한 사고라 커다란 충격을 던졌다.
피해자의 신원이 알려지자 고양의 시민사회가 또한번 놀랐다. 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지부장을 지낸 김철기씨가 사고의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사고 직후 김철기씨를 만나달라는 독자들의 요청이 이어졌지만, 끔찍한 사고를 당한 이에게 섣불리 질문을 던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고 후 일 년이 흘렀다. 김철기씨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이제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지 않을까. 약속장소로 정한 장항동의 한 치킨집에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으니, 곧 김철기씨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나도 모르게 눈길이 오른쪽 다리 아래로 향했다. 외형적으로는 차이를 느낄 수 없었지만, 인사를 건네려 다가오는 걸음이 조심스러웠다.
혹시라도 맥주를 청한다면 기자가 시원하게 한잔 사려고 했는데, 사고 후 술은 일절 입에 대지 않는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잘하셨습니다” 소리가 나올 뻔했다. 얼음잔에 사이다를 채워가며 김철기씨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1년 전 그날의 끔찍했던 기억
사회적협동조합 한강 고양시지부가 장항습지 환경정화작업을 진행한 것은 2019년부터였다. 작업팀에 속한 김철기씨는 누구보다도 부지런한 일꾼이었다. 사고가 발생한 작년 6월 4일, 이날은 강 주변까지 깊이 들어가 작업을 하기로 했다. 전날 내린 비로 갈대 고사체 위에 부유쓰레기가 가득 얹혀 있었다. 현장을 둘러보며 작업계획을 짠 후, 베이스캠프에서 커피 한잔씩을 나눠 마시고 오전 9시부터 각자 흩어져 본격적인 작업에 돌입했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오른쪽 발목에 찌릿한 전기가 오는 느낌과 함께 강력한 스프링을 밟은 것 같은 충격이 전해졌다. 오히려 폭발음은 듣지 못했다. 양쪽 귀가 멍해졌고, 주변 동료들의 비명소리가 먼 곳의 메아리처럼 아득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다리를 들어봤더니, 장화 아랫부분이 보이지 않았어요.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렀지요. 동료들이 몰려왔지만, 너무나도 처참한 광경에 처음에는 선뜻 다가오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동료들이 이내 정신을 수습하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김씨를 평평한 곳으로 옮기고 허벅지쪽을 꽉 묶어 지혈을 했다. 누군가는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사고를 알리고, 다른 이는 구급차가 들어올 수 있도록 갯골 두 개를 건너 장항습지 통문을 향해 뛰어갔다.
“구조대가 도착하기까지 한 시간이 걸렸는데, 그 시간이 끔찍하게 길었어요. 통증은 견디기 힘들었고, 피가 많이 나서 죽는 게 아닐까,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하늘에 헬기가 한 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저 헬기가 나를 구하러 오는 거였으면…’ 하면서 간절히 바랐던 기억도 나네요.”
119구조대원들이 현장에 도착해 응급처치를 한 뒤, 부상자를 앰뷸런스에 태우고 대화동 종합운동장으로 향했다. 박평수 선배(당시 사회적협동조합 한강 고양지부장)의 판단으로 그곳에서 중증외상센터 닥터헬기를 타기로 했기 때문이다.
경기북부 중증외상센터가 있는 의정부 성모병원에 도착한 게 오후 12시 30분. 처참했던 공포의 시간은 그에게 지금도 생생한 트라우마로 남았다.
“차라리 사고 순간에 기절을 해 정신줄을 놓았더라면 좋았겠다, 싶더라고요. 고통이 너무 심해서 헬기 안에서 옆에 앉은 박평수 선배에게 ‘차라리 날 죽여달라’고 소리쳤던 것 같아요.”
마취 깨자마자 “내 무릎 남아있나?”
수술은 3시간이 넘는 시간이 소요됐다. 무릎 아래 15㎝를 남기고 봉합을 했다. 진통제에 기대어 통증을 견뎌가며 보름을 누워있었는데, 청천벽력같은 진단이 나왔다. 수술 부위가 제대로 아물지 못해서 2차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 다리를 얼마나 더 잘라내야 하나…. 어쩌면 심리적으로 그때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수술 전 젊은 담당의사가 ‘최대한 무릎은 살리겠다. 저를 믿어달라’고 말해줬는데, 그 말을 한 줄기 위안 삼아 다시 수술대에 누웠습니다.”
2차 수술을 마치고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그는 무릎이 있나 없나부터 보았다. 다행히 무릎이 붙어있었다. 2주 후, 이번에는 수술 부위가 아주 잘 아물었다는 진단결과가 나왔다.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용기가 되어준 사회복지사
병원에서의 생활은 하나부터 열까지 간병인의 손을 빌려야 했다. 혼자 사는 동생의 사고 소식을 듣고 미국에서 누님이 날아왔지만, 코로나19가 위세를 떨치던 시절이라 보름간 격리를 마친 후에야 병원으로 달려올 수 있었고, 지인들의 문병도 엄격히 통제됐다.
“힘들고 외로운 상황에서 병원 재활의학과 선생님과 사회복지사님이 굉장히 큰 힘을 돼 주셨어요. 특히 사회복지사님은 ‘이 정도면 의족하고 신사복 입으면 아무도 모른다, 걱정하지 마시라’면서 용기를 줬지요.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려면 술은 반드시 끊어야 한다며 엄격한 충고를 건네기도 했고요.”
드디어 실밥을 뽑고, 입원 50일 만에 퇴원해 혼자 사는 삼송마을의 집으로 돌아왔다. 잃어버린 오른쪽 다리 아래쪽을 대신해 줄 의족도 맞췄다. 바지를 입고 구두를 신으면 외형적으로는 몰라보지, 싶었다. 그러나 발걸음을 옮기면 불편하고 어색했다. 신체 일부처럼 의족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환상통 이겨내려 매일 창릉천변 걸어
가장 먼저 시작한 일과는 집 근처 창릉천변 산책로를 매일 5~6㎞ 정도 걷는 일이었다. 다치기 전보다 속도는 느렸지만, 점점 몸의 균형이 잡혀가는 걸 느꼈다. 규칙적인 걷기는 마음을 추스르는 데도 큰 도움이 됐다.
절단환자들이 공통적으로 겪는다는 환상통이 그에게도 엄습했다. 발 뒤꿈치가 심하게 아프고, 발가락이 곧추서고, 장단지를 찌르는 듯한 고통이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의사는 살아있는 신경을 묶어놓은 것이라 생기는 증상이라고 했다. 의족을 벗고 있으면 더 아팠고, 없어진 부위가 아픈 것이기에 더 견디기 힘들었다.
“많은 정보를 찾아봤는데, 유일한 처방은 ‘움직여라’였습니다. 방에 앉아서 아프느니, 차라리 밖에 나가서 걷는 게 훨씬 편안했지요.”
그가 이처럼 걷기에 몰두한 이유는 신체적 회복에 대한 기대만큼이나, 하루빨리 사회적으로 복귀해야겠다는 강박에 스스로를 내몰았기 때문인 것 같다.
“많은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했고, 고양에서 이런 저런 지역활동을 왕성히 펼치며 살아왔는데, 사고로 인해 내가 주저앉아 버리면 영영 그때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을까봐 조바심이 나더군요. 마음을 굳게 먹고, 생활패턴부터 철저히 바꾸려고 노력했습니다.”
지인들이 더 기뻐한 ‘칼같은 금주’
사고 이전과 이후 그가 확실하게 달라진 건, 그 좋아하던 술을 딱 끊었다는 점이다. 사실 그는 주변에서 소문난 애주가였다. 워낙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고, 체질적으로도 술이 잘 받아 삼십여 년 가까이 거의 매일 하루 3병 정도 소주를 마시고도 거뜬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고 이후 그는 술을 단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는다. 너무나도 엄청난 경험이 술에 대한 유혹마저 증발시켜버린 걸까.
“회복 초기에 가장 힘든 것이 새벽에 깨어나 혼자 화장실을 다녀오는 것이었어요. 그때 생각했죠. 아, 이런 상태에서 술까지 먹으면 얼마나 더 힘들까…. 평생 먹을 술 이미 다 먹었다고 치고, 이후 술을 딱 끊기로 독하게 결심했습니다.”
그의 금주를 주변인들이 오히려 더 고마워했다. 사고 후 ‘저 사람, 전보다 더 술 많이 먹으면 정말 큰일인데…’ 하며 염려의 눈길을 보냈던 이들이, 이제는 “철기씨 정말 대단해, 정말 잘했어!”라고 격려하며 응원을 보내준다.
“그렇다고 지인들과의 만남을 멀리한 건 아닙니다. 남들이 술잔을 기울일 때 저는 음료수잔으로 건배를 하며 오히려 더 즐겁게 그 자리를 즐기고 있습니다. 그렇게 1년을 보내다 보니, 몸이 이전보다 훨씬 건강해진 것 같아요. 아침에 상쾌하게 일어나는 기분을 요즘 들어서야 누리고 있습니다.”
다시 운전대 잡고 직장도 얻어
신체적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했으니, 이제는 사회적 활동을 하나둘 재개할 차례다. 그가 가장 먼저 도전한 것은 운전이었다.
“오른쪽 다리를 잃은 사람들은 자동차에 보조장치를 달고 왼쪽 발로 운전을 할 수 있습니다. 면허시험장에서 운전 수행능력을 평가한 후 장애인운전면허증으로 바꿔주고요. 장애인의 삶을 시작하다보니, 이전에는 몰랐던 많은 정보들을 찾아보게 됐습니다. 극립재활원에서 보조장치 차량 운전 출장교육을 무상으로 지원해준다는 사실도 알게 됐고, 장애인고용공단의 보증보험을 끊으면 차량 보조장치도 설치해준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우리 사회에 약자들을 위한 제도들이 나름 촘촘하다는 것을 실감했지요.”
그의 새로운 삶을 떠받쳐 줄 든든한 언덕은 취업이었다. 그는 5월 초부터 일산서구 대화동에 자리한 고양시장애인편의증진기술지원센터에 계약직으로 출근하고 있다. 그가 일하게 된 센터는 건물이나 기관에 화장실, 출입구, 주차장, 피난시설 등 장애인 관련시설이 규정에 맞게 설치되었는지를 관리·감독하는 곳이다.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새로운 직장에서 좋은 동료들과 함께 일하고 있어요. 생업을 갖게 됐다는 사실이 뿌듯합니다. 장애인들에게 꼭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도 있고요.”
그의 말대로 사고 1년이 채 지나기 전에 그는 많은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이뤄냈다. 의족이 불편하지 않을만큼 신체를 단련했고, 술을 끊고 몸이 건강해졌고, 마음의 건강도 평정하게 지켜내고 있다. 사람들과의 만남도 자연스러워졌고, 운전대를 다시 잡았고, 직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사고로 후천장애를 입은 이들에게 소개할 만한 바람직한 롤모델이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열정을 바친 민족문제연구소 활동
김철기씨는 고양의 시민사회에서 발 넓은 활동가 중 한 명이다. 그의 관심이 가장 집중된 주제는 역사 바로세우기였다. 역사학도였던 그는 80년대 중반 책 한 권을 만나 삶의 지향을 바꾸는 경험을 했다. 바로 임종국 선생의 『친일문학론』이었다.
“내가 알았던 위인들이 애국자 아니라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때까지 알았던 지식이 완전히 전도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후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에 가입했고, 2000년대 들어 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지부 4·5대 지부장을 맡게 됐습니다.”
그가 지부장으로 활동하는 기간 동안 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지부는 지역의 항일유적지를 발굴하는 일에 역량을 집중했다. 무엇보다도 3·1만세운동 당시 행주나루에서 펼쳐진 선상만세시위를 재조명해 전국 유일의 선상만세 재연행사를 매년 행주산성역사공원에서 개최하는 초석을 마련했다. 이 행사는 이제 매년 3월이면 고양지역은 물론, 전국적인 관심이 집중되는 항일역사 퍼포먼스로 자리매김했다.
힘겨운 시간, 손을 내밀어 준 사람들
사고 이후 “김철기씨는 어떤 분인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지인들이 하나같이 “참 좋은 사람, 참 착한 사람”이라는 답변을 들려주곤 했었다. 그래서일까. 그에게 닥친 뜻밖의 불행을 자기 일처럼 가슴 아파해 준 이들이 유독 많았다. 시민사회는 여러 단체들이 동참하는 대책회의를 결성해 대응방안을 논의했고, 고양시 공무원들도 성금을 모금해 그에게 전달했다.
“시민사회와 고양시의 관심이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병원비와 의족 마련에 큰 보탬이 됐고요. 물질보다 더 고마웠던 건 따뜻한 마음이었어요. 대책회의를 주도하신 분들은 마치 자기 일처럼 나서주셨습니다. 고양 시민사회의 저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울러 시 공무원분들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도움을 주셨어요. 방경돈 당시 기후환경국장님이 명절 때 혹시라도 혼자서 외롭게 지낼까봐 음식을 싸 가지고 직접 제 집을 찾아오시기도 했고요. 고마운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며 원망하기보다는, 어려운 순간에 손을 내밀어준 이들의 고마움을 하나하나 기억하는 사람. “철기씨는 참 좋은 사람”이라는 주변 사람들의 평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지뢰가 터졌는데, 군에서는 전화 한 통 없어
고마운 이들도 많았지만, 반면 그를 한없는 절망에 밀어넣는 현실도 맞닥뜨려야 했다. 사고 원인과 책임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행정의 모순, 특히 군 당국의 불통 때문이었다.
“제 발목을 앗아간 지뢰는 군이 안전하게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는 군사무기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작업을 한 장항습지는 군이 매일 비밀번호를 바꾸는 철제 통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 당국은 장항습지가 속한 한강하구 습지보호구역의 관리책임은 한강유역환경청에 있고, 안전관리는 고양시의 소관이라는 이유로 책임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군 당국의 지뢰 부실관리로 민간인이 중대한 부상을 입었는데 군은 지금까지 전화 한 통, 문자 한번 보낸 게 없습니다. 철저히 발을 빼고 있는 것이지요.”
그가 분통을 터뜨린 상황은 경찰조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경찰은 고양시와 정화작업 주체인 한강유역환경청의 책임만을 따져물었어요. 그러면서 피해자인 제게 조사를 통해 책임져야 할 사람이 가려지면 처벌을 원하냐고 묻더군요. 저는 분명하게 답했습니다. 당신들의 수사 방향이 틀렸다, 이건 분명히 국방부가 책임져야 할 문제다, 라고 말입니다.”
그의 주장에 수사관은 “우리가 어떻게 국방부를 처벌하냐”는 어이없는 답변을 돌려줬다. 그는 “처벌을 해 달라는 게 아니라, 책임소재를 가려달라는 것이다. 그러려면 당연히 군 당국의 책임도 조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재차 촉구했다.
그러나 결국 경찰은 기소 의견으로 공무원과 사회적협동조합 한강 임원 등 6명을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고,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일제청산, 분단, 지뢰위협… 결코 따로따로 아냐
그는 사고 이후 민간인 지뢰 피해문제의 산증인이 됐다. 국회와 고양지역사회에서 열린 토론회에 참석해 증언을 했고, 지방에서 열린 공청회에 초청돼 후방지역 지뢰 완전제거 움직임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이렇듯 여러 자리에서 그가 들려주고 싶은 목소리는 단순히 고통스러웠던 사고의 경험만이 아니다.
“제가 당한 일은 단순히 안전관리가 미흡해서 난 사고가 아닙니다. 생각을 확장해보면, 종전 후 70년째 이어지고 있는 남북 분단의 위협이 우리의 일상 곁에 현재진행형으로 존재한다는 증거인 셈이지요. 궁극적인 평화체제의 구축만이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나아가 분단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강점기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고, 남과 북의 분단을 초래한 역사적 비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일제청산운동과 평화운동, 지뢰로부터 민간인의 안전을 지키는 운동이 따로따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남은 삶의 한 축을 앞서 언급한 문제들을 아우르는 ‘평화운동가’로서의 활동으로 채워가고자 한다. 가까이는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하고, 멀리는 분단체제를 넘어 남과 북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데 작은 디딤돌 하나가 되고 싶다는 바람이다.
이와 함께 자신이 사고를 당한 장항습지에 대해서도 각별한 관심을 표했다.
“람사르습지에 등재된 고양의 생태보고 장항습지가 지뢰사고 이후 아무런 대책을 찾지 못하고 방치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회적 합의와 행정의 적극적 노력으로 안전하고 효율적인 관리와 활용방안이 하루빨리 모색됐으면 합니다.”
긍정적 기억으로 트라우마 이겨내
그는 아직 남아있는 트라우마를 다독이기 위해 정기적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다. 얼마 전에는 담당의사로부터 “모든 상황을 새롭게 극복해내야 한다는 강박을 조금은 내려놓아도 좋을 것 같다”는 조언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부조리한 상황극에 내던져진 것 같은 낯선 느낌을 극복하기 위해 한동안 스스로를 강박적으로 내몬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는 여유를 좀 가져야겠습니다. 지난 1년을 돌아보았습니다. 상상 못했던 어려운 시간이었지만, 좋은 사람들 덕분에 삶이 지속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세상은, 여전히 참 아름답습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자리를 함께한 박평수 한강하구 장항습지보전협의체 대표와 함께 포즈를 취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랬더니 그는 수술에서 회복돼 병원에서 퇴원하던 날의 기억 한자락을 떠올렸다.
“이 형이 나를 중국집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때 식당에서 사진을 같이 찍은 게 생각납니다. 퇴원 후 처음 먹은 짬뽕이 참 맛있었지요.”
환하게 웃는 그의 웃음에서 사람을 향한 긍정적인 기억으로 자신에게 닥친 불행한 기억을 지워나가고 있는 사람의 단단한 의지가 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