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내세요, 소방관 119구급대
높빛시론
[고양신문] 유치원에서 돌아온 아이는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 아파트 문을 열었다. 부모는 출근과 외출, 초등생 누나는 학교에서 오지 않았다. 안에서 문고리를 당겨 닫는 순간 아이는 비명을 질렀다. 문틀의 이중 걸쇠 날카로운 고리에 오른손 검지손가락 끝 마디가 걸려 거의 절단되고 말았다.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아이는 자지러지도록 악을 쓰며 울어댔다. 앞집 아주머니가 뛰어나와 보곤 전화로 119를 눌렀다. 채 5분도 되지 않아 구급대원들이 달려와 아이와 아주머니를 태우고 산재 전문 병원으로 달려갔다. 접합 수술을 잘 받고 손가락은 빠르게 정상으로 돌아왔다. 아이는 장애 없이 자랐고 그 손가락으로 기관총 방아쇠를 당기며 군 복무도 마쳤다. 25년 전 우리 가정에서 일어난 안전사고, 천행이었다. 아이 비명을 듣고 나와 준 이웃, 신속하게 출동해 준 119구급대, 마침 가까운 곳에 있던 전문 병원까지 응급 구조의 3박자 조화였다. 절절하게 고마울 따름이다.
소방은 경찰, 군과 함께 국가가 국민에게 제공하는 안전 서비스의 바탕을 이룬다. 특히 소방은 화재를 예방, 경계하거나 진압하고 화재를 비롯해서 다양한 재난, 재해의 위급한 상황에서 인명을 구조한다. 재난 재해 현장은 무질서와 혼란, 위험이 겹쳐지기 마련이다. 임무를 수행하다 다치거나 순직하는 소방관이 끊이질 않는다. 올해 초 소방청 집계에 따르면 지난 2011년부터 10년 동안 55명이 순직했다. 화재 진압이 20명으로 가장 많고, 교통이나 산악사고 구조, 항공 사고 출동, 생활 안전 출동, 훈련에 이르기까지 소방관들은 자기 몸 살피지 않고 임무에 나선다. 같은 기간에 다친 소방관은 4219명에 이른다. 출동한 소방대원을 폭행하거나 협박해서 임무 활동을 방해하면 5년 이하 징역이나 5천만 원 이하 벌금이다. 소방기본법이 만만한가, 119구급대원 폭행 사건도 사라지지 않는다. 소방과 구급 구조 현장에는 땀이 흐르고 눈물이 솟고 피가 맺힌다.
지난달 29일 밤 156명이 숨진 서울 이태원 압사 사고 참사는 우리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던졌다. 사고 가능성을 예견하고도 정부와 지자체, 경찰은 예방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사상자가 속출하는데도 경찰 상부와 지자체의 상황 대처는 굼떴다. 지역 경찰 책임자는 어슬렁거리며 뒤늦게 현장에 나타나서는 제대로 조치도 못 했다. 경찰 상황 책임자는 자리를 비웠고, 참사 발생 상황은 경찰과 행정 계통을 건너뛰어 대통령 주변으로 먼저 전달됐다. 현장 관할 용산구청장은 자기를 밀어주는 여당 국회의원과 소통하는 데 정신을 팔고, 참사 계기가 된 핼로윈 축제는 ‘현상’이라며 책임을 비껴가려 했다. 주무 장관은 변명하고, 국무총리는 외신 기자들 앞에서 농담을 날렸다. 대통령은 늘 하던 대로 현장에서 손가락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대통령 측근 홍보수석, 시민사회수석은 국회에서 야당 의원의 참사 관련 발언에 ‘웃기고 있네’ 메모를 주고받았다.
참사 현장의 일선 경찰관들, 참사 직후 달려온 119구급대 소방관들은 ‘높으신 분들’과는 달랐다. 파출소 경찰관들은 지원도 받지 못한 채 군중에게 발을 밟혀가며 목이 터져라 인파를 정리하려 분투했다. 소방관들은 쓰러진 시민들을 응급조치하고 병원으로 이송하느라 구슬땀을 흘렸다. 차와 사람이 엉키고 부상자와 사망자가 도처에 쓰러져 아비규환의 현장이다. 경찰관과 소방관들에겐 어슬렁거리고 변명하고 말장난하고 손가락질하고 ‘웃기고 있네’ 비아냥거릴 여유 따위는 없었다.
참사 원인과 책임 소재를 밝히기 위해 경찰청 특별수사본부가 수사에 나섰다. 당직이 아닌데도 현장을 달려와 구조를 지휘한 용산소방서장이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피의자가 됐다. 참사 현장을 겪은 소방관, 경찰관들은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치유와 위로는커녕 일선에서 땀 흘리는 공무원들을 닦달하는 건 ‘높으신 분들’의 책임 회피는 아닐까?
참사 현장에 국가는 있었는가, 시민들은 묻는다. 여당은 참사 원인을 시민들과 야당의 정부 비판 시위 탓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여론도 못 살피고 나라는 제대로 끌어갈 수 있을까? 용산소방서장 피의자 입건에 소방관들은 한숨을 쉰다. 비판 여론은 높아질 조짐이다. 참사의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치유가 필요하다. 국가 재난 대응 체계를 점검하고 소방관들이 긍지와 보람 가운데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고 여건을 마련하는 건 정치권의 몫이다.
책임은 현장 공무원보다 책상머리 높으신 분들에게 물어야 마땅하다. 5년 전 소방의 날,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소방관은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국민의 손을 가장 먼저 잡아주는 국가의 손’이라고 말했다. 25년 전 아이와 우리 가정은 ‘국가의 손’을 잡았다. 세금 내는 보람을 느꼈다. 소방관들 처진 어깨를 토닥거려주는 아량과 배려를 기대한다, 국가의 손이 더 굳세고 따뜻해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