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밀양박씨 추원재는 ‘세계유산’ 감이다
한양의 북쪽에 인접한 고양시는 조선 시대 왕족을 비롯해 우리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많은 인물들이 잠든 사적의 고장이다. 이 가운데 조선 8대 왕 예종과 19대 숙종을 비롯한 왕과 왕비가 묻힌 서오릉과 서삼릉은 국가사적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고양시의 중요한 역사문화유산으로 추앙받고 있다. 3년 만에 폐위된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릉과 고려의 수호신이었던 최영장군 묘를 찾는 발길도 늘고 있다. 고양시는 임진왜란을 예견한 황윤길, 목은 선생의 5대손인 이유청, 을사조약을 반대했던 한규설 묘 등을 향토문화재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덕양구 주교동에는 잘 알려 있지는 않으나 문화사적으로 매우 가치가 큰 씨족사회의 묘역이 있다. 조선조에서 28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사대부 가문인 밀양박씨 규정공파의 ‘두응촌’이다. 고려말~조선 중기에 걸쳐 조성된 두응촌은 밀양박씨 규정공파 선조 56위를 모신 묘역으로 규모로나 역사, 보존상태, 안치된 인물로 봐도 국내 씨족사회에서 견줄만한 곳을 찾아보기 힘들다. ‘박릉곡’이라고도 불리는 두응촌은 풍수지리와 도참설에 따르면 왕릉으로 선택될 수도 있었던 훌륭한 길지라고 전해진다. 정부나 관의 지원이나 개입 없이 한 가문이 순수하게 조성한 두응촌은 고려말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전란과 천재지변을 겪고도 유실된 묘 하나 없이 600년 이상 잘 보존된 매우 드문 사례라 할 수 있다. 묘역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1일 전국 각지에서 수천명의 후손들이 모여 유교 전통에 따라 세일사를 봉행해오고 있다.
두응촌에 안치된 56위의 기록을 보면, 밀양박씨 규정공파의 중시조인 박현과 고려 상장군을 지낸 박사경, 조선 세종때 집현전 부제학을 지낸 박강생 등 국가의 중요 직책을 맡으면서 도덕적으로 흠결 없이 선비정신으로 올곧게 살았던 행적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낙촌공 박충원(1507~1581)을 첫손에 꼽을 수 있다. 박충원은 조선중기 문신으로 1531년(중종 26) 문과에 급제하여 영월군수, 동부승지, 대사성을 거쳐 도승지, 대사헌, 양관 대제학 등을 지냈으며 1569년(명종 24) 이조판서 외 6조 판서를 두루 역임한 뒤 우찬성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낙촌유고>, <영해창수록> 등을 남겼다. 묘역은 고양시 향토유적 제26호로 지정되었고, 묘역에서 출토된 백화청화묘지 8점은 2018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18호로 지정되었다.
박충원의 아들인 관원공 박계현(1524~1580)은 1552년(명종 7) 문과에 급제하여 아버지로부터 병조판서를 이어받았다. 박계현은 당파에 치우치지 않고 화해의 정치를 모색하였으며 당대 최고의 문신인 회재 이언적, 충재 권벌을 경상관찰사 재임 중 조정에 상소하여 신원을 회복시키는데 기여했다. 그 기록은 선판으로 경주 옥산서원에 보존되어 있다. 박계현의 시문과 기록들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으나 손자인 박승종이 수습하여 엮은 <밀산세보>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상권 낙촌집, 하권 관원집으로 구성된 <밀산세보>는 국립중앙도서관과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의곡공 박정현(1562~1637)은 문과에 수석 합격하여 청요직을 두루 거치고 강원감사, 충청관찰사, 동지 중추부사, 지충추부사, 도청관, 형조판서를 역임했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 1623년 4월 28일부터 1628년(인조 6) 10월 22일까지 기록한 <박정현일기>는 전란으로 유실된 <승정원일기>(국보 303호)를 개수하는데 기초자료가 되었다.
퇴우당 박승종(1562~1623)은 1585년(선조 18) 대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중 이여송의 접반사, 독전어사로 황해도·강원도에서 활약하였다. 대사간, 강원관찰사, 대사헌, 병조판서, 전라관찰사, 형조판서, 좌의정을 거쳐 1619년(광해 11) 영의정에 올랐으나 1623년(광해 15) 3월 12일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 대동법 실시와 긴박한 국제정세 속에서 명·청 사이 ‘등거리 외교’를 구사하여 임진왜란 뒤 파탄에 빠진 나라의 평정을 유지하면서 민생 보호에 주력하였다. 1857년(철종 8) 복권되었으며 1872년(고종 9) 5월 시호를 숙민으로 받았다.
이밖에도 대사간·이조참의·병조참판을 지낸 밀성군 박광영, 호조판서·의정부 좌참찬을 역임한 송월당공 박호원 등 조선 역사에 길이 남는 선비들이 한 곳에 잠들어 있는 곳이 두응촌이다.
이렇게 유서 깊은 두응촌의 재실이 추원재다. 추원재는 여말선초에 건립되어 전란과 노후로 훼손된 부분을 보수해오다 1980년대에 새로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고양시의 소중한 전통 문화유산인 추원재가 원당 1구역 재개발사업지에 포함돼 철거위기에 처한 것은 종중을 떠나 고양시민의 한 사람으로서도 매우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다.
밀양박씨 종중에서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우리 전통문화의 보편적 가치와 중요성을 알리는데 더욱 주력할 방침이다. 우선 충효를 중심으로 전통문화사상을 널리 배울 수 있도록 두응촌과 추원재를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임진왜란 전적지인 행주산성~최영장군묘~두응촌을 연계한 충효 예절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할 방침이다. 씨족사회의 대표적인 가문이 600년간 계승해온 묘역과 제례를 세계에 알리고 보전하도록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추진도 검토 중이다. 고양시는 근시안적인 추원재 철거 계획을 취소하고 추원재와 두응촌을 전통문화 자원으로 활용해 품격있는 세계적인 문화도시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박병태 밀양박씨 규정공파 대종회 고문, 숙민공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