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는 반복된다
높빛시론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고양신문]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모두가 망연자실했다. 당시 박근혜 정부의 안일한 대응부터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안전불감증’이 내노라하는 논객들의 도마 위에 올랐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어디 다른 곳에서 또 세월호 참사같은 사건이 반복되지는 않을까?”
그냥 막연한 추론이었다. 막연하지만 그런 추론을 했던 이유는 어차피 한국사회에서 안전은 이벤트성 행사의 주제이지 규범이자 가치로서 우리에게 내재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른바 안전교육이 주로 아동ㆍ청소년 대상 체험학습 차원 정도에서 이루어질 뿐 안전은 돈과 편리함에 밀리는 하찮은 주제이다. 대형 참사가 일어나면 잠깐 그 영역에서 안전을 강화하는 일시적인 제스처 정도가 있을 뿐이다.
세월호 참사는 돈과 편리함에 안전이 밀려났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 수 있는지를 매우 충격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참사 이후 부실한 대응을 당연히 문제시할 수 있지만, 더 큰 문제는 그렇게 큰 사건을 경험한 한국사회의 안전감수성이 뱃길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높아지는 변화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를 우리는 이태원에서 보았다. 이태원 참사 이후 사람이 붐비는 길거리나 지하철역 등에 안전 요원이 등장하였다. 행여 지하철을 놓칠까봐 사람 사이를 헤집고 전력질주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많이 사라졌다. 이제 사람이 많이 모이는 행사, 길거리에서 이태원 참사 같은 불행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 어디에서일지는 모르지만 다른 영역에서 우리는 또 세월호ㆍ이태원 참사 같은 불행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단언하느냐고 질문할 것이다. 독자들께서 자신들의 ‘안전 감수성’을 한번 점검해 보시라. 돈과 편리함, ‘빨리빨리’가 여전히 안전보다 우선이다. 산업재해 사망사고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회원국 최고 수준이 근거 중 하나이다. 교통사고가 나서 사람이 다쳤는데도 구급차보다 견인차가 더 빨리 온다.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수많은 안전교육이 있지만, 그 아이들을 데리러 학교에 오는 부모 대상 안전교육은 없다. 그러다 보니 아이를 데리러 오는 부모들이 만들어내는 아슬아슬한 상황이 매일 ‘스쿨존’에서 일어난다. 횡단보도 앞에 있는 아이들을 무시하고 쌩하고 지나쳐서 자기 아이를 내려주는 부모들의 모습을 쉽게 본다. 스쿨존 안에서 하지 말라는 주정차를 할 경우 아이들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경고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보다 부모들이 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뭐가 그렇게 아슬아슬하나?”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다. 아무런 사고 없이 아이들이 등하교가 반복되는 일상이 지속되는 한 그 아슬아슬함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런 일상이 반복되다가 스쿨존에서 아이가 차에 치어서 사망한다. 학교 앞 좁은 도로에서는 시속 30km도 과속이다. 스쿨존에서 시속 30km 규정을 지킨 운전자들이 아이를 치어 죽게 한다.
그러나 할 말은 있다. “갑자기 아이가 튀어나와 어쩔 수 없었다.” 맞다. 운전자 개인 탓이 아니다. 그렇게 아이들이 돌발행동을 할 수 있는 학교 앞이나 놀이터 근처를 통과할 때에는 시속 10km 이하 ‘걷는 속도’ 규정을 만들고 순간에라도 차를 멈출 수 있는 교육을 하지 않은 국가의 잘못이다. 언제든지 아이들이 자동차 앞을 지나갈 수 있는 상황을 전제로 한 교육을 해서 운전면허증을 발급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운전면허증을 주는 국가의 잘못이다. 그런데 국가 탓만 하기에는 그 결과가 우리의 안전감수성 부재로 나타나는 것이 문제다.
안전감수성의 부재, 낮은 수준의 안전감수성은 생활 구석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보지 못하게 한다. 스쿨존은 사례 중 하나일 뿐이다. 사회적 충격을 줄만큼 많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이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죽어가고 있다. 그런 패턴의 위험이 누적되다가 어느 순간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한다. 이태원 참사 이후가 더 불안해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