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흥마을 12단지 경로당에서 113차례 조리봉사한 박수명씨
8개월간 조리하고 배식봉사 구멍난 행정, 헌신으로 메워 "따뜻한 한끼 대접, 천직같아"
[고양신문] “새벽 4~5시에 일어나 식자재를 고르러 농수산물 시장으로 출발해요. 돌아와선 긴 시간이 걸리는 국물 요리를 먼저, 그다음에 반찬을 준비하죠. 100인분이 넘는 식사를 준비하다 보면, 금세 배식 시간인 11시 30분이 됩니다.”
얼핏 보면 유명 파인다이닝 셰프의 일정 같지만, 놀랍게도 무료배식 봉사자의 일정이다. 바로 고양시 원흥마을 12단지 경로당에서 노인대상 배식봉사를 8개월간 이어온 박수명(78세) 봉사자. 무료배식은 매주 월·수·금 점심에 진행되고, 공휴일에도 마을에 홀로 남겨질 노인들을 위해 특식을 제공한다. 그는 지난 6월부터, 113차례, 어르신들의 끼니를 책임져 왔다.
박 봉사자의 여정은 다소 갑작스레 시작됐다. 지난 5월, 거리두기 완화로 무료배식에 손님이 몰리자, 시의 노인일자리사업으로 모집된 직원들이 모두 그만둔 것이다. 코로나로 일이 없다시피 한 지난 2년 동안 매달 월급 27만원을 수령하던 기존 노인 근로자들이 준비해야 할 식사량이 갑자기 늘어나자 모두 그만둬 버렸고 이로 인해 당장 식사를 준비할 인력이 없었다.
경로당 재정 상황도 문제였다. 구청에서 나온 70만6000원의 지원금은 사설 식당과 조리시설, 기구 같은 필수 인프라를 구축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현장 상황을 고려치 않은 ‘행정구멍’에 빠진 경로당은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있었다.
박 봉사자는 “시 행정의 문제도 있지만, 각종 지원 및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경로당 집행부가 문제해결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며 “배식이 중단되면 변변찮은 식사로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마을어르신들을 위해, 큰마음을 먹고 봉사를 시작하게 됐다”라고 밝혔다.
박씨가 처음 봉사를 시작한 6월 22일, 경로당 바닥은 먼지로 가득했다. “제가 처음 왔을 때는 마루에서 몇 번 돌아다니면 양말이 까맣게 변할 정도로 관리가 엉망이었어요. 돌이켜보면, 좋은 밥을 짓기 위해 시작한 일이 먼지로 뒤덮인 경로당,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어준 것 같아요.”
따뜻한 식사를 위한 박 봉사자의 작은 움직임에 송인수(70세) 사무장, 경주현(73세) 회장 등 경로당 식구들이 동참하며 변화가 시작됐다. 걸레로 마루 얼룩을 제거했고, 망가진 시설을 정비했다. 사비를 털어 냉장고를 마련했고, 시에서 지원받은 삐걱거리는 의자도 전부 새것으로 교체했다. 가스버너 하나에서 시작한 경로당 주방은 현재 구내식당 못지않은 멋진 시설을 갖추고 있다.
부엌 너머 보이는 창고의 식재료는 그 어떤 식당보다 건강하다. 기본적으로 지역농산물을 사용하고, 더 좋은 재료를 구하기 위해 새벽마다 양평, 노량진 수산시장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뛰어다닌 결과다. 모든 재료는 청결하게 손질되어 당일 사용되고, 비축 재료의 경우 창고 내에 체계적으로 분류·보관하고 있다. 좋은 식재료와 알찬 식단, 봉사자들을 비롯한 경로당 식구들의 도움 속에서 음식을 준비하다 보면, 경로당은 일찍 자리를 채운 이웃들로 벌써 인산인해를 이룬다.
점심 배식을 왜 이렇게 일찍 시작하냐는 기자의 질문에, 박씨는 “우리 마을에는 혼자 사시는 어르신 분들이 많이 계세요. 아무래도 혼자 살다 보면 제대로 된 식사 준비가 어려워 주로 아점 형태로 드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배고픔에 음식이 나오기 한참 전인 11시부터 많은 분이 기다리고 계시는 거죠. 아침 일찍부터 식사를 기다려온 이웃 어르신들을 위해 조금 힘들더라도 일찍 배식을 시작하는 편입니다”라며 “부담없이 양껏 드실 수 있도록 자율배식으로 준비해 점심이라도 제대로 챙겨 드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저의 가장 큰 바람입니다”라고 밝혔다.
48년간 음식점을 운영했던 그는 ‘따뜻한 한끼로 사람을 데우는 일이 나의 천직인 것 같다’며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수십 년간 담백한 조리 철학을 연마해온 그이기에, 음식 맛이 돋보이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원흥마을 거주자 정봉운(78세)씨는 “사설 구내식당과 별 차이를 못 느낄 정도로 잘 짜인 식단과 맛에 항상 놀란다”며 “어쩌면 돈을 주고 먹는 음식보다 더 낫다. 바로 ‘돈’이 아닌 ‘마음’이 담긴 음식이기 때문이다. 독거노인 대상으로 여러 기관에서 식사 바우처 지원을 하지만 우리 경로당을 찾는 이유는 이런 ‘정성’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씨의 치열한 노력으로 매일 점심 때마다 경로당은 북적거린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일 때마다 커지는 웃음 속에서 따뜻한 끼니를 나누며 화투를 치고 노래도 부른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 노인일자리사업으로 고용된 노인들이 오긴 하지만, 식사 준비에 있어 보조적인 역할 밖에 하질 못해 박씨를 비롯한 무료 봉사자들이 과도한 업무를 감당하고 있다.
수많은 장비와 재료비를 사비로 충당하고 있음에도 한 달 약 14번 정도의 무료배식 중 10번이 정부 지원, 4번은 자발적인 경로당 사비로 운영되는 실정이다. 시가 미처 보지 못한 공백을 경로당 식구들과 외로이 메꾸는 중이지만 제도적 차원의 도움이 마련된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원흥마을의 따뜻한 한끼가 채워나갈 고양시의 모습에 큰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