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의 지성, 고양팔현은 어디에?
열 개의 키워드로 열어가는 <고양 역사이야기>⑧
고양팔현(高陽八賢)
‘고양팔현’이라는 말이 생소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단어 그대로 해석하자면 고양(高陽)이 배출한 여덟 명의 현명한 인물들을 말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조선의 지배이념인 성리학에 바탕을 둔 사림파 학자들로서 학문적인 성과를 이루고 향촌사회 발전에 기여한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주로 성종(재위 1469~1494) 때로부터 현종(재위 1659~1674) 때까지에 이르는 조선 전․중기 격변의 시대를 살아간 지성들이다. 고양의 유림들은 이들 여덟 분의 현자들을 문봉서원(文峯書院)에 배향하여 그 뜻을 기리고 지역 후학들의 지표로 삼았다.
추강 남효온(秋江 南孝溫), 사재 김정국(思齋 金正國), 복재 기준(服齋 奇遵), 추만 정지운(秋巒 鄭之雲), 행촌 민순(杏村 閔純), 모당 홍이상(慕堂 洪履祥), 석탄 이신의(石灘 李愼儀), 만회 이유겸(晩晦 李有謙) 등이 그들이다.
고양시와 서원(書院)
서원은 조선 중기 향촌질서 확립과 교화를 목적으로 생겨 난 사립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중종 38년(1543)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이 순흥면 백운동에 고려 말의 유학자인 안향(安珦, 1243~1306)을 제향하는 사당을 세웠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되었다. (이후 명종 때 퇴계 이황의 노력으로 ‘소수서원’이란 사액서원으로 발전됨)
고양지역에는 숙종 14년(1688)에 문봉서원이 건립되었는데 이것이 기록상 우리지역 최초의 서원이다. 지역 유림들은 문봉서원에 고양팔현을 배향하여 제(祭)를 지내고 그 뜻을 기렸으며 향촌교화의 구심점으로 삼았다. 이외에도 행주서원(杏洲書院)과 용강서원(龍江書院)도 건립되었다. 행주서원은 헌종 7년(1841) 왕명에 따라 행주산성 인근 한강변에 권율장군을 기리는 사당(紀功祠)과 부속건물로 지어졌다. 용강서원은 고려 고종 때 귀주성에서 몽골군의 침입을 물리친 박서(朴犀) 장군과 조선 태종 때 “함흥차사”라는 고사를 남긴 충신 박순(朴淳)을 제향하기 위해 함경도 용흥강변에 세워졌다가 1980년 문중 후손들에 의해 지금의 위치인 일산동구 성석동 황룡산 자락으로 이전 중건하였다.
고양지역에 건립된 서원을 살펴보면 행주서원은 정부 차원의 위인숭배, 용강서원은 문중서원으로서의 성격이 강한데 비해 문봉서원만이 서원 본래의 기능인 위인배향과 향촌교화의 성격을 지녔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봉서원은 고종 때 대원군의 강력한 서원철폐령(1871)으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현재 고양시에 남아있는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서도 살아남았던 행주서원과 문중에서 고양시로 이전 중건한 용강서원이다. 고양정신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문봉서원은 아직도 복원과 복설 사이에서 표류하고 있다.
문봉서원, 복원인가? 복설인가?
문봉서원의 복원 문제는 고양시 유림과 문화계의 오랜 화두였다. 서원이 철폐되고 120년이 지난 1991년부터 고양문화원과 일부 뜻있는 유림들의 노력으로 추향제(秋享祭)를 지내오고 있고 2020년에는 여덟 분의 위패도 다시 만들었지만 정작 서원(사당)이 없어 고양시문예회관을 빌려 사용하고 있다.
숙종으로부터 “학문의 봉우리(文峯)”란 사액을 받은 문봉서원은 철폐당시에는 지금의 일산동구 문봉동에 위치해 있었지만 건립당시에는 덕양구 도내동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와같은 사실은 1755년 당시 고양군수이던 이석희(李錫禧)가 편찬한 『高陽郡誌』와 몇 몇의 고지도에 나타나 있다. 이후 사리현동을 거쳐 지금의 터로 이전했고 서원의 이름을 따서 지명도 “문봉동”으로 고쳐진 것으로 보인다.
그간 이은만 문봉서원 복원추진위원장(전 고양문화원장)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 「고양 문봉서원지 기본조사용역」(2001,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문봉서원 복원을 위한 부지선정 및 타당성 용역」(2018, 고려문화재연구원) 등 기초 작업은 착실히 진행해 왔으나 정작 본래의 부지는 오래전에 개인소유로 바뀌었고 2019년에는 공장용 창고가 지어졌다.
사라진 건축문화재를 되살리는 방법으로는 ‘복원’과 ‘복설’ 두 가지가 있다. 복원은 원래의 위치에 재현하는 것이고 복설은 사정 상 위치를 옮겨 재현하는 것이다. 문봉서원은 이제 복원이 아닌 복설로 방향을 잡아가고 있다. 하지만 토지매입비를 포함하여 100억 원에 달하는 사업비를 확보해야하는 난관에 부딪혀있다. 고양시의 정책적인 배려로 시유지를 활용한다 하여도 3~40억 원에 달하는 건축비는 마련해야 한다. 우선 급한대로 제사를 지낼 사당만이라도 먼저 건립하고자 2억 원의 모급활동을 펼치고 있는 상황이다.
고양팔현은 고양의 지성이자 정체성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분들의 위패(혼백)을 하나로 모아 “고양정신”의 산실로 삼고 자라나는 세대들의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는 것은 110만 고양시의 굳건한 뿌리를 다시 심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복원이든 복설이든 문봉서원이 다시 건립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고양시의 정책적인 결정과 지원이 절실한 시점이다.
고양팔현은 누구인가
추강 남효온(단종2년(1454) ~ 성종23년(1492))은 ‘사림파의 영수’로 불리는 김종직에게서 수학하였으며 예의범절, 충․효 등 유학공부의 입문서라고 할 수 있는 『소학(小學)』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계유정란 공신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 환멸을 느껴 벼슬에는 나가지 않고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과 죽림거사를 맺고 술과 시로써 울분을 달랬다. 세조의 왕위찬탈에 저항한 사육신을 흠모하여 목숨을 걸고 『육신전(六臣傳)』을 지었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소릉(昭陵, 문종의 비 顯德王后의 릉)복위를 상소한 것이 화근이 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 죽은 뒤에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목을 자르는 형벌)를 당하였지만 중종반정 이후 복권되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불린다. 묘역은 김포시에 있다.
사재 김정국(성종 16년(1485) ~ 중종 36년(1541))은 중종 4년(1509)에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이후 여러 벼슬을 역임한 후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다.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에 연루되어 삭탈관직당하고 고양 망동(高陽 茫洞, 일산서구 송포동 지역)에 내려와 학문을 닦으며 저술과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중종 32년(1537)에 복직되어 전라도 관찰사, 병조참의, 경상도 관찰사 등을 지내며 목민관으로서 선정을 베풀었다. 은퇴 후에는 지금의 정발산 인근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는 다양한 위민정책으로 백성들의 생활을 보호했을 뿐 아니라 유학자로서 저술과 교육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묘역은 민간인 통제구역인 파주시 진동면에 있다.
복재 기준(성종 23년(1492) ~ 중종 16년(1521))은 고려 말 기황후를 배출한 행주 기씨이다. 중종 9년(1513)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을 거쳐 다양한 벼슬을 지냈다. 조광조의 문인으로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아산, 온성 등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중종 16년(1521)에 발생한 신사무옥(辛巳誣獄) 때 유배지에서 교살 당한다. 인종 1년(1545)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복권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묘역은 덕양구 성사동에 있으며 향토문화재 제17호이다.
추만 정지운(중종 4년(1509) ~ 명종16년(1561))은 김정국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일찍이 벼슬을 천거하는 이가 많았으나 모두 사양하고 일생을 수양과 구도에만 힘썼다. 천명(天命)과 인성(人性)의 관계를 성리학적으로 도식화하는 『천명도(天命圖)』와 그 해설서인 『천명도설』을 지었다. 묘역은 일산동구 중산동 고봉산 남쪽 안곡습지 인근에 있으며 향토문화재 제11호이다.
행촌 민순(중종 14년(1519) ~ 선조 24년(1591))은 서경덕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선조 때 효행으로 효릉 참봉에 천거된 사실이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벼슬을 하며 유학정신의 실천에 노력하였다. 벼슬에서 내려온 이후에는 고향인 고양으로 내려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묘역은 덕양구 현천동에 있으며 향토문화재 제8호이다.
모당 홍이상(명종 4년(1549) ~ 광해군 7년(1615))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7세 때에 이미 경전과 역사에 능했으며 15세가 되어 몇 차례 성균관에서 장원을 하였다. 선조 10년(1579)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임금에게 경전을 강의하는 강관(講官)으로서 당대 최고의 학자로 불렸다. 이후 임진왜란 때는 선조의 피난길에 동행하였으며 대사헌, 대사간 등 삼사를 고루 역임하였다. 묘역은 일산동구 성석동에 있으며 향토문화제 제13호이다.
석탄 이신의(명종 6년(1551) ~ 인조 5년(1627))는 민순의 문인이며 홍이상과도 친교가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300명을 거느리고 왜군과 싸워 공을 세웠다.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는 등 폭정을 일삼자 항소를 올렸다가 회령에 유배되었다.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광주목사를 거쳐 형조참판에 올랐다. 묘역은 덕양구 도내동에 있으며 향토문화재 제14호이다.
만회 이유겸(선조 19년(1586) ~ 헌종 4년(1663))은 어려서 가정형편이 곤궁하여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였으나 하급관리인 서리에게서 글을 익혔다.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는 것에 항의하는 소를 올렸다가 유배당하였으나 인조반정 후 직언으로 인한 처벌로 인정받아 6품인 신령현감에 제수 되었다. 병자호란 때는 의병을 조직하여 청군과 싸웠으며 이후 여러 지역에서 지방관을 지내며 선정을 베풀고 향촌교화에 힘썼다. 묘역은 용인시에 있다.
이상의 고양팔현은 모두가 학문적으로는 당시의 지배 이념인 성리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을 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위민과 의리를 실천하여 백성들로 부터 추앙받던 인물들이다. 고양 출신이거나 은퇴 후 낙향하여 고양에 거주한 이들을 후학들은 문봉서원에 배향하고 임금으로부터 사액을 받아 그들의 존재적 가치를 높였다. 고양팔현은 고양 정신의 뿌리인 것이다. 그래서 문봉서원의 복원(복설)은 110만 고양특례시의 위상이 사상누각이 되지 않기 위한 초석을 다지는 일인 것이다.
<참고자료>
1. 『文峯書院과 高陽八賢』, 고양문화원, 1991년
2. 『고양 문봉서원지 기본조사용역 보고서』, 2001년, 고양시,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3. 「향교와 서원」, 송기호, 2011년 12월, 『대한토목학회지』
4. 「16세기 서원사액과 국가의 서원정책」, 신동훈, 2015년 7월, 『역사와
현실』 98호
5. 「조선시대 서원정책과 서원의 설립실태」, 윤희면, 2004년 1월, 『역사학
보』제181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