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애 칼럼] 무인도에서 필요한 것
어느 책모임 중독자의 고백
- 다니엘 디포, 『로빈슨 크루소』
[고양신문] 소설가 김영하는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무인도에 가져가고 싶은 책으로 『안나 카레니나』를 꼽았다. “무인도에서 언제 구조될지 모르니 일단 오래 읽기에 좋고, 내용이 재밌기 때문”이란다. 백 퍼센트 공감. 그런데 김영하 작가가 말한 무인도는 ‘갇힘’의 공간이 아니라 ‘쉼’의 공간이다. 자발적으로 갇힌다니, 당연히 재미는 1순위일 테지.
자, 그럼 이제 진짜 조난을 당해 무인도에 갇혔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무엇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할까. 인스타툰 작가 ‘mqdid’는 이렇게 적었다. ‘구조선, 구조대, 세후 300억’. 현시대를 반영한 가장 합리적인 답이다.
그러나 조난 당했다는 것은 현재와 미래의 불확실성을 전제로 한다. 미리 준비할 수도 없고, 준비했다 치더라도 그것이 언제 작동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로빈슨 크루소가 조난 사실을 깨달은 순간 망연자실했으리라. 사업가였던 그는 배를 타기 전에 모든 금전적인 문제에 대해 보험 처리를 해 두었지만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28년씩이나 무인도 생활을 하게 되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 긴 세월 동안 그에게 정신적 위로와 희망을 준 것은 『성경』이었다. 냉담자였던 그를 결국 신의 세계로 이끌었으니, 얼마나 유익한(?) 책인가. 물론 다른 활자가 없어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이 말이다.
『로빈슨 크루소』의 원제는 『요크 출신 뱃사람 로빈슨 크루소의 삶과 기이하고 놀라운 이야기 : 조난을 당해 모든 선원이 사망하고, 본인은 아메리카 대륙 오리노코 강 하구 근처 무인도 해변에 표류하여 28년 동안 혼자 살다가 마침내 기적적으로 해적선에 구출된 로빈슨 크루소』이다. 이미 제목에서 내용을 다 보여주고 있다. 로빈슨은 하루하루 대자연에 순응하거나 대항하면서 살아가기 바쁘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처럼 자연과 인생을 논하는 낭만 따위를 즐길 여유가 없다. 당장의 내일을 대비하지 않으면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 삶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따위를 생각할 여유가 없다. 그런 면에서 로빈슨 크루소는 범인(凡人) 그 자체다.
‘대항해 시대’에 쓰인 소설인 만큼 유럽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사상이 기본 전제로 깔려 있는 『로빈슨 크루소』. 개척정신으로 무장한 그는 당시 유럽의 전형적인 사업가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불편한 지점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특히 유럽인들이 문명의 전파를 이유로 신대륙을 침범하고, 원주민을 노예로 삼고, 원주민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는 부분이 그렇다. 요즘 『총 균 쇠』를 읽고 있어서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불편함일지도 모르겠다. 로빈슨은 난파선에서 총과 화약을 챙겨오는데, 그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대비책이기도 하지만 결국 권력을 지키는 핵심 요소이기도 하다. 총은 다른 부족에게 포로로 사로잡힌 식인 ‘프라이데이’를 구해 주었고, 또 그를 길들이는 데에도 매우 유용한 도구였다. 총이 없었다면 몸싸움이 벌어졌을 때 로빈슨은 ‘프라이데이’를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1967년 미셸 투르니에는 『로빈슨 크루소』를 패러디한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썼다. 이 소설에서 로빈슨과 식인의 주종 관계는 화약이 폭발해 로빈슨이 일궈 놓은 모든 것이 사라지면서 끝이 난다. 인간관계는 서양인이 이룩해 놓은 문명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갈등과 화해를 통해 상호보완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을 작가는 보여 주고 싶었으리라.
만약 내가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주어진 것에만 의존하다 서서히 말라 죽었을 거다. 비록 로빈슨의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주어진 한계를 이겨 내며 28년을 버텨 온 것만큼은 칭찬해 주고 싶다. 무인도를 유인도로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다. 세상 그 무엇도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