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밤도 N플릭스] 넘버4 책받침스타의 터닝포인트

다이앤 레인 <언페이스풀> (2002)

2023-09-14     유경종 기자

[고양신문] 오늘날 십대들의 우상이 K팝 아이돌이라면, 1980년대에는 ‘책받침스타’가 있었다. 스타들의 상품성을 시장에서 팔아먹는 방법이 책받침이나 연습장 표지에 사진을 넣는 것 밖엔 없었던 시절이었다.  

책받침스타 전성기를 열어젖힌 3대 여신은 미국 배우 브룩 쉴즈와 피비 케이츠, 그리고 프랑스 배우 소피 마르소였다. 여신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셋 다 60년대 중반에 태어난 또래들이고, 십대 시절에 이미 <푸른산호초>, <파라다이스>, <라붐>이라는,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여러 측면에서 비판받아 마땅한 대표작들을 앞세워 월드스타로 등극했다는 점이다.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책받침스타 3여신(브룩 쉴즈, 피비 케이츠, 소피 마르소)의 사진. 노트북, 캠퍼스 월드라는 글씨가 쓰여있는 이유는 원래 이 사진들이 스프링노트 표지였기 때문이다.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여신님들의 미소는 지금 봐도 매력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대한민국의 십대들이 글로벌 트렌드에 필적하는 안목이 있었다고 보긴 어렵다. 앞서 말한 영화들은 대부분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수입·개봉되거나 비디오로 출시되지 못했기 때문에, 화질과 번역이 엉망인 해적판 비디오를 운 좋게 시청한 몇몇을 제외하면 당시 십대들 중 이들이 출연한 영화를 직접 본 친구들은 거의 없었다. 

영화도 보지 않고 어떻게 팬질을 할 수 있었던 걸까? 지금으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당대의 시대상을 회고해 보면 답이 나온다. 엄혹한 폭압을 통해 권력을 찬탈하고 유지했던 5공 정권은 정치적 억압의 반대급부로 이른바 3S(스포츠, 스크린, 섹스)로 불리는 향락과 소비문화의 문을 활짝 열어줬다. 새롭게 열린 문화소비시장의 가장 쉬운 선택은 바다 건너 일본의 대중문화 트렌드를 ‘불법 복제’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브룩 쉴즈와 피비 케이츠, 소피 마르소는 특정 대상에 유달리 열광을 보이는 일본 대중문화의 성향에서 만들어진 스타들이었고, 그 열풍이 라이선스를 생략하고 조잡한 복사본 사진에 실려 우리나라 십대들에게까지 도달했던 것이다. 우리가 한심한 청춘을 보냈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고, 돌아보니 그땐 그랬다는 얘기다. 

짐작하셨겠지만, 80년대 책받침스타 마케팅에 아무 생각 없이 열광했던 여드름쟁이 소년 중 하나가 바로 필자였다. 직접 본 영화들은 거의 없으면서 책받침 스타들의 출연작 제목들을 줄줄이 꿰고 다녔고, 한동안은 스타들의 브로마이드(대형 화보)를 구한다며 헌책방이나 가판대에서 일본 영화잡지들을 뒤적이기도 했다. 

필자의 마음속 넘버1 스타는 단연 다이앤 레인이었다. 당연히 가장 많은 사진들을 소장하고 있다. 

하지만 열광의 와중에도 일말의 자의식 비슷한 게 있었나 보다. 당시 필자가 가장 애정했던 책받침스타는 브룩도 피비도 소피도 아닌, 다이앤 레인이었기 때문이다. 청순하면서도 세련된 미모를 가졌지만 3대 여신의 견고한 카르텔에는 감히 도전장을 못 내밀고, 늘 4등이나 5등 언저리를 맴돌던 불우한(?) 스타가 바로 다이앤 레인. 과도한 상업성이 주도해 만든 영화들을 대표작으로 앞세워 유명세를 팔아먹는 세 명의 스타들에 비해 <아웃사이더>, <럼블 피시>, <커튼 클럽> 등의 영화에 출연하며 인지도를 쌓아올린 다이앤 레인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어딘지 있어 보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너무 이른 나이에 스타덤에 오른 이들이 대개 그렇듯, 여신들 역시 배우로서의 전성기가 그리 길지 못했다. 특히 브룩과 피비는 정말이지 밤하늘의 불꽃처럼 화려하게 타올랐다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다이앤 레인 역시 비슷한 경로를 따라가는 듯했지만, 반갑게도 중년에 터닝포인트가 되는 작품을 만난다. 바로 2002년작 <언페이스풀>이다.

영화 '언페이스풀'에서의 다이앤 레인. (2002년)

이 영화에서 다이앤 레인은 남편을 사랑하면서도 젊고 섹시한 남자의 유혹에 흔들리는 여성의 심리를 소름 돋게 연기한다(남편 역을 맡은 배우는 80년대 최고의 섹시가이로 불렸던 리처드 기어다. 아주머니, 너무하시는 것 아닌가요?). <플래시댄스>, <위험한 정사>, <은밀한 유혹>, <로리타>를 만든, 웰메이드 상업영화의 장인 에드리언 라인 감독과 손을 잡고 명품 중년배우의 존재감을 획득하는 순간이었다.

이후에도 다이앤 레인은 확장된 DC유니버스에서 수퍼맨(클라크 켄트)의 지구인 양어머니 마사 켄트역을 맡아 우주적 스케일의 모성애를 보여주며 우아하게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십대 시절 ‘무작정 팬질’의 대상이었다가,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 같은 배우 다이앤 레인을 버튼 몇 개만 누르면 만날 수 있다니, 이게 다 N플릭스 덕분이다.

영화 '저스티스리그'에서의 다이앤 레인.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