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의 원혼들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현기영 소설가 특강

2023-10-17     유경종 기자

장편 『제주도우다』 펴낸 현기영 소설가
흥도동 ‘자유농장’에서 독자들과 만나
역사의 진실, 작가로서의 운명 들려줘

흥도동 자유농장 초청으로 고양의 독자들과 만난 현기영 소설가.

[고양신문] 신작 장편소설 『제주도우다』(전3권, 창비)를 펴낸 현기영 소설가가 14일 흥도동 자유농장(밭장 김한수 소설가)에서 고양의 독자들과 만났다. 김경윤 작가의 사회로 진행된 강연에는 정화진 소설가, 김이정 소설가를 비롯해 30여 명의 독자들이 참석해 작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1941년생인 현기영 작가는 4·3을 세상에 알린 대표작 『순이 삼촌』(1978년작)을 비롯해 구한말 제주에서 발생한 신축민란을 다룬 『변방에 우짖는 새』, 일제강점기 제주해녀들의 항쟁을 그린 『바람 타는 섬』 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험하고 폭력적인 역사에 내몰린 제주 사람들의 삶을 힘 있고 유려한 서사 속에 담아냈다. 

특히 팔순이 넘은 나이에 발표한 신작 『제주도우다』를 통해 “원숙하게 무르익은 역량을 쏟아부어 한국문학사에 기념비적 작품을 선사했다”는 평단의 찬사를 받고 있다.

‘위기의 시대에 역사를 말한다’는 주제로 진행된 이날 강좌에서 현기영 소설가는 자연과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 소설가로서의 운명적 삶, 역사가 말하지 않는 4·3의 진실 등을 담담하면서도 따듯한 목소리로 들려줬다. 강연 내용을 정리한다.  

현기영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제주도우다'.

늙은 몸속에서 뛰노는 아이

도시농부들이 가꾼 자유농장 풍광이 참 아름답다. 자연으로 가까이 갈 나이가 되니 흙냄새가 구수하게 느껴진다. 언젠가 흙속에 누워 잔디이불을 덮고, 따사로운 햇빛을 받으며 자연의 일부로 녹아내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더없이 편안해진다. 
나 자신을 들여다보면, 몸은 늙어가지만 마음속엔 여전히 아이가 들어있는 것 같다. 그래서 가끔은 이 나이에도 초심 그대로 글을 쓰는 나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기도 하다. 여러분들도 스스로를 칭찬해줄 수 있는 삶을 완성하시리라 믿는다.

평생을 사로잡은 숙명

나는 4·3의 유복자 비슷한 슬픔, 분노, 원한을 태생적으로 지내고 성장했다. 문단 데뷔 후 순수문학을 하고도 싶었지만, 4·3의 억압이 가슴을 꽉 짓눌렀다. 금기의 영역이 된 4·3 이야기를 풀어내지 않고는 한 글자도 못 쓸 것 같은 강박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렇게 『순이 삼촌』으로 4·3을 세상에 알린 후 작가적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려보려 했다. '현기영은 4·3 작가'라는 고정된 시선에서도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4·3의 영령들이 보안사 고문기술자들처럼 나를 억누르는 악몽도 수차례 꾸었다. 벗어날 수 없구나…. 순수문학에 대한 미련을 접고, 4·3과 아예 하나가 되자고 마음을 굳혔다. 3만 4·3 영령들과 지상의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를 전하는 신방(神房), 무당이 되기로 한 것이다.   

현기영 작가의 강연은 자유농장 실내공간인 '지렁이도서관'에서 진행됐다. 

4·3 영령들에게 바치는 공물

4·3영령들이 나를 무당 삼아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이야기 속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잠재되어 있다. 무속에서 최영, 임경업, 남이장군을 신으로 모시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3만 명이나 되는 억울한 죽음이 있었으니, 4·3의 에너지는 얼마나 크겠는가. 그 영령들이 내게 말하는 것 같다 “먹으면(정성을 받으면) 먹은 값을 하고, 못 먹으면 못 먹은 값을 하겠노라!” 4·3을 망각하면 역사에서 유사한 비극이 반복된다는 얘기다.  

그래서 4·3 무당의 극진한 정성을 다해 3만 영령들에게 올리는 공물이 바로 이 책 『제주도우다』이다. 

큰 비극을 담은 책이지만, 제주도 자연의 아름다움. 강인한 사람들의 신명과 사랑의 설렘과 기쁨도 넣어보려고 했다. 그러한 묘사들 때문에 오히려 더 슬펐다고 말하는 독자들도 있다. 재밌는 부분을 읽다가도 퍼뜩 ‘얘들도 다 죽게 되겠지?’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란다. 3권에서는 너무도 잔혹한 묘사가 이어져 책장을 넘기기가 힘들었다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내 안에 들어있는 슬픔이 쓴 이야기들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김경윤 작가(왼쪽)가 이날 행사 사회를 맡았다. 

남도 북도 아닌 “제주도우다!”

소설을 통해 4·3이 왜 일어났는지, 그 진실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는 건조한 팩트만 나열하는 역사학자의 관점과는 다른 영역이다. 4·3은 한 개의 사건이 아니라 당시 제주도민 중 10분의 1이 희생당한, 3만 개의 사건이다. 그중 몇몇 개인들을 선택해 3만 개의 죽음에 깃들어있는 피와 뼈와 숨과 비명을 그려내며, 당시의 현장을 되살려내는 것이 작가의 역할인 것이다. 이는 문학만이 감당할 수 있는 작업이다. 

해방이 되며 노예상태에서 벗어난 이들이, 특히 젊은이들이 새로운 시대가 열리리라는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미군정이 지배하고, 척결돼야 할 친일파들이 재등용되면서 청년들의 꿈이 좌절됐다. 분노를 더욱 자극한 건 강제공출의 부활이었고, 저항하는 이들에겐 가차 없는 폭력이 가해졌다. 그런 상황에서 이승만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결국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앉아서 죽느니, 서서 싸우자”를 택한 것이 4·3이었다. 4·3은 결코 이데올로기의 싸움이 아니었다. 남도 북도 아닌 “제주도우다(제주도이다)!”가 제목이 된 이유다. 

강연 중간중간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무구한 웃음을 보여 준 현기영 작가.
자유농장 느티나무 그늘 아래에서 현기영 작가와 함께 사진을 찍은 참가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