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열의 <고양 사(史)랑방> 자아(自我)정체성과 고양성(高陽性)에 대하여
[고양신문] 33년 간의 공직생활을 마치고 인생 2막의 문을 열려 하고 있다. 그런데 문득, 태어나서 서른 살까지의 성장기, 서른에서 예슨 살까지의 열정기를 지났으면 인생 3막이 아닌가 하는 다소 싱거운 의문이 들었다. 인생에 있어서 성장기만큼 중요한 시기가 없는데 왜 그것을 1막으로 쳐주지 않는 것일까? 흔히들 성장기, 청소년기를 자아가 정립되는 시기로 규정한다. 그야말로 한 사람의 인생항로가 정해지는 시기이다.
정체성(正體性, Identity), 사전적 의미는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이다. 이순(耳順)의 나이에 또 다른 삶을 설계하면서 가장 큰 혼돈은 다시금 자아정체성의 실체이다. 도대체 나의 정체성은 무엇이지? 그동안 내 삶의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추구했던 가치는 무엇이었지? 라는 의문이 꼬리를 이었다. 어린 시절 역사 과목을 좋아했다. 교수나 교사가 되어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는 사명을 실천하고 싶었다. 그런데 운명은 공직이라는 조금 다른 길을 제시해 주었다. 꿈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은 컸지만 주어진 역할로 여기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역사(歷史)’라는 사명이 주는 무게감이 한순간도 곁을 떠나지 않고 주변을 맴돌았다. 짬을 내서 대학원에 다니며 역사공부를 이어갔다. 고양시 문화예술과 근무를 지원하여 현장에서 향토사와 전통문화 업무를 담당하였다.
고양시는 지난 해 인구 백만 명 이상의 도시에게만 주어지는 특례시의 영예을 안았다. 서울 인근의 조용하고 소박한 농촌지역에서 상전벽해의 변혁이 몰아치기 시작한 건 1990년 부터의 일이다. 1기 신도시 건설계획에 따라 논과 밭이 불도저에 의해 깨끗하게 밀리고 그 위에 일산신도시라는 거대한 콘크리트 도시가 건설되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중산, 탄현, 행신, 화정 등 곳곳에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생겨나고 삼송・원흥 신도시에 이어 이제는 창릉에도 신도시가 들어선다. 덕분에 고양시에는 호수공원, 도시 숲, 아람누리, 킨텍스, 백화점, 전철 등 편리한 도시인프라가 풍부하게 갖춰졌다. 시민들은 도시가 주는 여유와 아늑함에 흠뻑 젖어 산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가 빠진듯한 이 허전함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40여 년 전의 고양시는 정말 깡촌이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논과 밭 밖에 없었고 읍내에 목욕탕도 하나 없어 명절이면 어머니 손잡고 서울로 목욕을 다녀와야 했다. 그래도 그때는 이웃끼리 옹기종기 모여 살며 작고 아름다운 전설을 수없이 만들어 갔다. 비록 가난하고 불편했지만 마을마다 특색있는 공동체 문화를 이루며 전통의 맥을 이어갔다. 평화롭고 행복한 시절이었다.
세월은 가고 세상은 변한다. 과거의 전통이 아름답다고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다. 다만 지금의 현실에서 되살려 적용할 수 있는 과거의 전통과 정신이 있다. 그것을 소환할 때 우리는 뭔가 부족한 듯했던 문화적 욕구를 채울 수가 있고 2023년을 사는 시민들이 더욱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젊은 시절의 꿈은 이루지는 못했지만 인생 2막의 문을 열어가면서 비로서 역사선생님이 되고자 한다. 콘크리트 도시에 갇혀버린 지역의 전통과 역사를 복원하고 그것을 시민들과 함께 공유함으로서 시간이 흘러도 결코 변하지 않는 고양의 정체성을 이어가는데 힘을 보태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