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팔리는 책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절실히 소용되는 책을 만듭니다"

나경호의 사람도서관 (13)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2024-04-01     나경호 작가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고양신문] 2024년도 벌써 3분의 1이 지나갔습니다. 새해가 되면 나를 새롭게 만드는 여러 계획으로 바빴다가 산수유가 필 때 즈음이 되면 어느새 연초의 결심을 잊고 나는 그 동안 무얼 했지 라는 질문을 되뇌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올해 몇 권의 책을 읽겠다라는 독서목표를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만 이런 결심들은 매번 잘 지켜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번 사람도서관에서는 지역서점 한양문고 안에서 출판사를 운영하며 양질의 책들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월의책 안희곤 대표님을 모시고 책과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책은 사람을 못 바꿉니다. 책을 신성하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결국 책은 무생물입니다. 접하는 사람의 노력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책 읽는 행위보다 책을 받아들이는 일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지불할 용의가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어린 시절의 풍경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5살 때 즈음이었을 겁니다. 아버지가 월남에 파병되어 군속(군에 고용된 노동자)으로 일을 떠나 집에는 저와 형, 어머니뿐이었습니다. 아마 어머니가 나의 사진을 찍어 아버지에게 보내려 했었나 봅니다. 비가 꽤 많이 내리는 쓸쓸한 날이었습니다. 한여름에도 한 번씩 있는 그런 쌀쌀한 날. 동네 학교운동장에 고인 물웅덩이 위를 차박차박 소리를 내며 걸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제법 쓸쓸한 분위기였지만 저에게는 그렇게 부정적이거나 나쁜 기억은 아닙니다. 세차게 바람이 몰아친 추운 여름 날, 아무도 없는 학교 운동장에서 젊은 어머니와 어린 제가 함께 서 있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살면서 부모, 선생, 친구들에게서 들은 조언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은.

특별한 조언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어렸을 적에 ‘돈을 벌라. 성공하라’ 이런 삶의 방향, 진로에 관련된 소리는 어느 누구한테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어린 저와 형제들 역시 크게 비껴나간 적도 없었습니다. 나중에 담배를 좀 피우긴 했지만 뭐 그 정도야. 부모님뿐만 아니라 이후에 만나게 된 선생님들도 저에게 특별한 말은 없으셨지만, 그저 즐겁게 내 마음대로 살라 그런 느낌으로 저를 대해주셨습니다. 돌아보니 조언뿐만 아니라 잔소리 같은 걸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왜 주변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잔소리를 많이 하는 사람이 된 걸까요?
 

지금 막 떠오르는 가장 인상적인 책 구절이나 문장이 있나요.

장 그르니에의 <섬>이라는 연작에세이에 ‘고양이 물루’라는 제목의 에세이가 있습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그 첫 문장이 ‘짐승들의 세계는 침묵과 도약으로 이루어져 있다. 때가 되면 그들은 뛰어오른다’입니다. 이 문단의 마지막에는 ‘그들은 평화로운 잠과 휴식과 행복에 젖어 잠이 드는 것이다.’ 뭐 이런 식의 문장이었습니다. 이 문장 한마디가 그 당시 저에게는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모든 짐승이 그렇겠지만 고양이는 완전히 현재라는 시간과 밀착되어 있는 상태에서 내내 웅크리고 침묵하고 있다가 때가 되면 저마다 도약해서 새를 붙잡거나 쥐를 잡습니다. 고양이 한 마리를 통해 인간이 얼마나 전전긍긍해대는 존재인지를 한마디로 표현하는 통찰어린 문장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걸 포착해서 문장으로 옮기는 그 작가의 시선이 저에게는 정말 대단하게 느껴져 아직까지 기억에 남습니다.
 

간단한 개인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지금은 어떤 활동들을 하고 있나요.

저는 인문서와 철학책을 주로 출판하는 사월의책 대표로 일하고 있습니다. 사월의책은 올해로 14년차 된 출판사입니다. 대학원 졸업 후 다양한 출판사에서 일하다 독립해 현재까지 대표로 일하고 있습니다. 출판을 하게 된 계기는 공부를 계속 하고 싶었는데 돈이 필요해서 처음 취직한 데가 출판사였습니다. 그러다 일이 너무 재밌어서 결국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은 접고 자연스레 출판인이 되었습니다. 책을 기획하고 편집하는, 책을 만드는 일이 제 일의 중심입니다. 신문칼럼 같은 것도 오래 썼고 잡지 같은 곳에도 간간이 기고도 했습니다. 지금은 열심히 집 근처 탄현동 성당을 나가며 그러고 지냅니다.

사무실에 작업하고 있는 안희곤 대표.

사월의책은 유명한 책들이 많이 나온 출판사라고 들었습니다. 지역민들에게 이런 출판사가 고양시에 있구나 라는 점을 알려주고 싶은데, 이 책은 정말 좋다 라고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 있나요.

사월의책에서 나오는 서적들은 다소 무거운 철학책과 최근 심도 깊은 이슈를 다루는 인문과학책을 주로 펴내고 있기 때문에 저조차 모든 사람들한테 권할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그래도 추천하고 싶은 책이라 하면, 나온 지 10년이 된 휴버트 드레이퍼스, 숀 캘리가 지은 『모든 것은 빛난다』입니다. 철학이라는 단어를 쏙 빼고 쓴 철학책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과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법, 어떻게 의미 있는 삶을 살 것인가라는 주제가 담긴 책인데 철학책이면서도 굉장히 감동적입니다.

책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현대인의 불행은 자기 삶의 의미를 어딘가에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비롯된다’입니다. 삶의 의미나 가치는 인간이 노력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이미 다 주어진 거고, 그저 자기를 통해 발현될 뿐이니 삶속에서 마주친 의미와 가치를 우리는 그저 붙잡기만 하면 된다 라는 내용입니다. 저자들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의 저자 호메로스, 허먼 멜빌의 모비딕 등 각종 고전을 통해 이 주제를 설득력 있게 이야기합니다.

책에서는 근대 이후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팽배해진 채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는데 그래서 인간은 저마다 소중히 여기는 의미와 가치를 더 이상 만들어 낼 수 없게 될 때 불행에 빠진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도덕과 가치, 의미는 누군가 노력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언제든 이미 주어져있는 것이기 때문에, 삶과 일상 속에서 이 가치를 포착하거나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를 통해 이 의미와 가치를 발현해내는 기술을 찾아야 한다 말하고 있습니다.
 

궁금합니다. 다양한 책을 읽고, 또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무엇을 깨닫게 되었나요.

‘책은 사람을 못 바꾼다’입니다. 사람들이 책을 너무 신성시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바뀔 사람이라면 책을 읽지 않아도 결국 바뀔 것이며, 다만 책을 읽으면 조금 더 좋게 바뀌지 않을까 정도의 생각만 듭니다. 그렇다고 책이 필요 없다, 책을 읽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라 책을 어떻게 읽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보통 주어지는 대로 소비하는 다른 상품과 서비스와 달리, 책은 작가들뿐만 아니라 읽는 사람들 역시 시간과 노력, 에너지를 들여야 소비가 가능한 상품입니다. 책을 읽는 행위보다 책을 읽고 받아들이는 일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지불할 용의가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결국 책은 무생물입니다. 책을 접하는 사람의 노력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출판사대표이지만 사람들에게 책을 권하기가 어렵습니다. 책이 필요 없는 사람에게 책은 그저 종이묶음에 불과하니까. 그래서 사월의책 출판사는 좀 더 많이 읽힐 수 있는 책, 많이 팔리는 책보다는 누군가에게 만큼은 절실히 소용되는 책을 만들어야한다 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직업, 일을 갖게 된다면 앞으로 어떤 일을 해보고 싶나요.

그래도 굳이 책과 관련된 일이라면 번역자가 되고 싶습니다. 돈은 안 되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책을 번역하며 남은 생애를 쓰고 싶습니다. 만약 출판과 상관없는 일을 묻는 거라면 도시농부가 되고 싶습니다. 결국 혼자서 조용히 몰입할 수 있는 일을 계속 하고 싶습니다. 무엇을 가장 먼저 심고 싶으냐 묻는다면 저는 감자, 옥수수, 배추 등 수확량이 많은 작물을 심을 겁니다. 커다란 수확의 기쁨이 있으니까. 파, 깨 이런 자잘한 작물들은 심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유물론자입니다. 저는 물질적인 풍족함을 좋아합니다.
 

사월의책에서 출간된 책들

60년 가까이 사셨는데, 도대체 어른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걸까요.

어른은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누구에게 기대지 않고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어른이니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고 처리해야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 가족과 가까운 친구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환경과 생태, 이웃과 공공 역시 자신의 삶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부분이니, 사회참여처럼 거창한 말이 아니더라도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자기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저도 잘 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어른이라고 불릴 수 있으려면 자기 삶을 잘 가꾸는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과 연결된 세계를 돌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생각합니다.

뉴스와 지면을 통해 접하는 사회 속 다양한 갈등과 반목을 볼 때마다 어떤 생각이 드나요.

갈등과 반목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무엇이 더 정의로운가, 어느 쪽이 더 가치있는가 라는 내용이 빠진 채 갈등의 주체들과 이해득실만 더 부각되는 게 문제라 생각합니다. 물론 가치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이면에는 기어코 자신들의 이득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득을 위해 서로 갈등하고 반목하는 게 꼭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의 이득이 다른 사람의 가치와 이익에도 부합되는 내용인가를 따져보는 게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자신의 사적이득을 공적이득으로 바꾼다’라는 문장이 정치를 설명하기에 정말 좋은 문장이라 생각합니다. 사적이익과 공적이익이 서로 대립되는 성질이 아니라 함께 공존할 수 있게 만드는 게 정치의 목적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인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되, 사적이 아닌 모두에게 좋은 방식으로, 공적으로 추구하는 방식과 생각을 자주 떠올려보면 좋겠습니다.
 

10년 전부터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철학서, 모든 것은 빛난다. 

당신은 독재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시급한 것 하나를 바꿀 수 있다면 무엇을 어떻게 바꿀 건가요.

전 세계의 모든 에너지 소비를 현재의 50프로로 줄임! 모든 공산품과 서비스 등 우리가 소비하는 산업물질들은 결국 다 에너지에서 출발합니다. 산업구조 바닥에는 에너지로 가득 차있습니다. 이런 에너지를 만들어 내거나 소비하는 방식을 돌아보면 결국 친환경에너지는 없다 라는 생각을 자주합니다. 우리가 친환경에너지를 생산해내도 결국 우리가 지금 쓰는 제품과 상품으로 만들어질 것이니. 최대한 에너지를 생산하며 발생하는 부산물과 오염을 줄이는 방식이 실질적으로 인류가 할 수 있는 방법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상품과 서비스 소비를 줄여나가 전체 에너지 소비와 생산을 줄이는 방식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재화 중 상당수는 가짜재화라고 생각합니다. 없어도 인류의 생존에 문제가 없는 제품과 서비스가 너무 많습니다. 없었다면 필요하지 않은 ‘만들어진 필요’, ‘가짜필요’에 의한 생산과 소비가 지금 인류에게는 너무 많습니다. 이런 소비가 계속 된다면 친환경 에너지로 만들어진 상품과 서비스가 무슨 소용일까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먼 미래에 쓰일 부고 혹은 자신의 묘비명을 남겨주세요.

먼 미래는 아닐 것 같고 내일이 될지도 모르지만. 아 그리고 이건 희망사항이지 절대 사실관계가 있는 부고가 아닙니다.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부끄럽지 않았던 적이 한 번도 없는, 한 명의 온전한 사람으로 살고 싶었던 이, 안희곤 하상바오르’라는 문장을 남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