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애 칼럼] 북남남녀의 정반합

[어느 책모임중독자의 고백]

2024-05-16     김민애 기획편집자

『북과 남』 (엘리자베스 개스켈)

[고양신문] 최근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가 화제다. 모델 출신 남자 배우의 압도적인 비주얼도 이유겠지만, 회귀물(어느 경위로 주인공이나 누군가가 과거로 돌아가는 이야기)이라는 트렌드를 반영한 서사 때문이다. 거기다 이미 웹소설로 스토리 검증도 마쳤기에 배우들이 원작을 얼마만큼 잘 살려내는지가 관건이었다. 

그동안 단역과 조연으로 내공을 쌓은 배우들은 원작을 뛰어넘는 합을 보여 주었고, 제작진의 센스 있는 연출과 코믹 요소, 감수성 풍부한 배경음악은 드라마의 분위기를 잘 살려냈다. 연애 드라마답게 전형적인 클리셰가 등장해도 거슬리지 않는 것은 배우들의 풋풋하고 자연스러운 연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드라마의 가장 큰 매력은 남녀 캐릭터의 전복이다. 보통 드라마에서 위기에 빠지는 것은 여성이다. 그리고 모든 걸 갖춘 남성이 엄청난 역경을 딛고 여성을 구해낸다. 진취적이고 자기주도적이면서 여주인공밖에 모르는 남주인공 캐릭터는 언제나 잘 먹힌다(그렇기 때문에 현재물에서 남주인공은 재벌 2세거나 사장이고, 판타지물에서는 왕족 출신의 북부 대공이다). 

그런데 드라마는 이 고정된 틀에서 벗어났다. 2023년 갑자기 죽어 버리는 남주인공을 살리기 위해 여주인공은 과거를 3번이나 회귀한다. 어떻게든 현재의 악몽을 바꾸기 위해 과거의 남주인공을 보호한다. 세상을 포기하려던 자신에게 희망을 주었기에 이번엔 그를 살리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었다. 작은 몸집의 여성이 키 190cm의 남성을 지키려고 애쓰는 모습에 남주인공도 반하고, 그 반한 남주인공에 시청자도 반한다. 종방까지 얼마 안 남은 상황에서처럼 여주인공이 끌고 가는 서사는 반갑고 기분 좋다.

720쪽에 달하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 작가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북과 남』을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캐릭터의 전복 때문이었다. 맨체스터를 모델로 한 가상의 공업도시 밀턴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 작품은 당시 영국의 사회문제로 대두된 공장주와 노동자의 갈등을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아버지의 종교적 신념 때문에 남부에서 북부로 이주한 마거릿. 노동자의 딸, 어머니, 노동자, 악당 부부, 아버지, 대부로 이어지는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가진 것 없는 이 여성은 독립적으로 성장해 간다. 집 안에 갇혀 책을 읽거나 바느질을 하는 방식이 아니라 길거리를 활보하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기 생각을 정립해 나간다.

자수성가형 공장주 손턴과 노사문제에 대해 첨예하게 대립하는 과정은 이 작품의 핵심 줄기다. 무엇보다 ‘인류애’가 먼저라는 마거릿의 낭만적인 주장(政)은, 일자리 제공을 수혜라고 생각하는 손턴의 기계적인 주장(反)과 맞붙다가 노동자 파업을 계기로 전환점을 맞이한다. 마거릿은 납품가와 기일을 맞춰야 하는 공장주를 이해하게 되고, 손턴은 공장 부품 취급받던 노동자를 성장의 동반자로 이해(合)하게 된다. 그리고 공장 폐업 위기에 놓인 손턴에게 마거릿이 상속받은 자금을 투자하면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낭만적 사랑의 귀결이 아니라, 투자자와 경영자의 결합이다.

실제 엘리자베스 개스켈은 목사 아내로서 비참한 노동자의 삶을 목격하며, 자본가와 노동자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고민했을 것이다. 『북과 남』은 그 치열한 고민의 결과다. 악질 선장에 반항하여 도망자 신세가 된 마거릿의 오빠 프레데릭이 누명을 벗고 집안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해외 도피자로 남는 작가의 캐릭터 설정도 흥미롭다. 집안을 일으키는 것은 남성 가장이라는 전형을 벗어던진 것이다. 비록 부자 대부가 죽으면서 유산을 물려주는 방식이 아쉽긴 하지만, 당시 여성이 상속과 결혼이 아니면 무슨 수로 재산과 권력을 획득하겠는가. 그 정도는 낭만으로 남겨두어도 좋을 듯하다.

이런 식의 여성 캐릭터는 대부분 여성 작가가 만든다. 물론 여성 작가도 남성 캐릭터에 대한 환상을 집어넣어 본인과 독자들을 대리만족시킨다. 언젠가는 이런 캐릭터도 식상해질 것이다.

김민애 기획편집자

그래도 작가의 성별과 상관없이 성역할이 고착화된 캐릭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남녀 캐릭터는 그만 생산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