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4] 관산동 골목에서 무작정 찍은 사진들… 모니터 속에서 말을 걸어오네
고양 구도심 답사 골목길 도시화석을 찾아서-관산동(하) 포토아카이빙①
무한 저장 디지털 기록장치, 답사가에겐 큰 축복
구도심 골목길 걸으며 스치듯 마주쳤던 풍경들
사진 들여다보며 의미와 맥락 뒤늦게 발견하기도
[고양신문] 저장장치의 디지털화는 도시를 아카이빙하는 입장에서는 어마어마한 축복이다. 지금이야 모든 사람의 손에 들려있는 스마트폰 속에 초고성능 카메라와 어마어마한 용량의 메모리가 장착돼 있지만, 사진을 필름 방식으로 저장해야 했던 200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셔터를 누르기 전 짧은 순간에 몇 번의 자기검열을 거쳐야 했다. 이게 찍을 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 빛이 부족한데, 사진이 제대로 나올까? 한 장에 좀 더 많은 피사체를 담을 순 없을까? 돈 주고 산 필름 한 통에 24방, 많아야 36방. 기분 내키는 대로 찍어댈 순 없었던 것이다.
특히 공공 아카이빙 작업에는 슬라이드필름이 많이 쓰였다는데, 슬라이드필름은 일반필름보다 가격이 더 비쌌다. 그러니 의미와 가치가 검증된 대상들 위주로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메모리카드 하나면 저장과 삭제를 거의 무한정 반복할 수 있는 오늘날에는 셔터 누르기 전의 자기검열은 옛날 얘기가 됐다. 기자가 관산동을 3차에 걸쳐 답사하며 찍은 사진만도 1000장이 넘는다. 일단 찍고 보고, 의미와 가치는 나중에 발견해도 되는 것이다. 이는 아카이빙하는 사람의 주관적 해석의 폭이 그만큼 넓어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실제로 거리를 걸으며 아낌없이 찍어댄 사진 파일들을 모니터에서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사진을 찍을 당시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요소들이 뒤늦게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그렇게 건진 관산동 포토아카이빙의 흥미로운 장면들을 독자들과 공유한다.
유행을 뛰어넘은 돌간판과 나무간판
거리의 상가건물들을 구경하다보면 간판의 유행이 대한민국처럼 숨가쁘게 교체되는 나라가 또 있을까 궁금해진다. 그만큼 다양한 소재와 형태의 간판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도심 곳곳에는 여전히 가장 고전적인 형태의 간판인 돌간판과 나무간판이 근과거의 도시화석으로 남아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돌간판과 나무간판들은 건물의 기둥이나 문틀을 따라 내려걸기에 적합하도록 대부분 세로쓰기로 제작됐다.
윗말의 터줏대감인 새서울아파트 정문에는 아름다운 글씨체로 쓰인 대리석 돌간판이 붉은벽돌 기둥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울’ 자의 획 하나가 지워져 ‘새서을아파트’로 읽히는 것도 나름 재밌다. 같은 아파트 상가건물에도 ‘평화부동산’이라는 멋진 돌간판이 내걸렸다. ‘부동산’의 사전적 의미를 가장 잘 반영하는 소재가 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가하면 ‘백조주택’은 돌간판치고는 특이하게 선명한 파란색으로 글씨색을 택했고, 안말의 중심에 자리한 행복한교회 부속건물 입구 기둥에는 교회의 옛 이름인 ‘대한예수교 장로회 벽제중앙교회’라는 돌간판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번에는 나무간판들을 몇 개 만나보자. 가장 번듯한 모양으로 남아있는 나무간판이 ‘(주)벽제개발’ 간판이다. 선명한 황토색 나무판 위에 힘차게 쓴 글씨가 심플하면서도 듬직한 인상을 준다. 또 하나는 ‘고양축산업협동조합 벽제축산계’ 간판인데, 앞서 이야기한 벽제개발 간판과 글씨체가 똑같다. 아마도 관산동의 간판글씨 명필께서 쓰신 게 아닌가 싶다.
투박한 글씨가 전하는 당당함
연재 2회차에서 빌라 이름 표기의 시대별 변천사를 잠시 짚은 적이 있다. 빌라들이 2000년대 들어서 감각적이고 세련된 이름을 장착하게 됐다고 말했었는데, 기자는 가장 단조롭고 투박한 옛날 방식의 표기가 더 멋지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 취향일 뿐이지만, 건물 측면에 큼직한 글씨로 이름과 동을 써넣은 간판들을 보면 서민주택 특유의 역동성과 당당함이 전해오는 듯하다.
재밌는 표기들을 몇 개 보자. 중앙아파트는 ‘중’자와 ‘앙’자 사이에 대문자로 A자를 넣어 “우린 빌라가 아니라 아파트야!”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동을 표기하는 방식은 가·나·다, 1·2·3, A·B·C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부분의 아파트나 빌라들은 이름은 크게, 동 표기는 작게 썼다. 반면 기용빌라는 ‘기용1동’이라고 빌라명과 동 표기를 똑같은 비중으로 적었다. 또한 사진에서 보듯 동마다 마감재와 도색 색깔이 저마다 다른 것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윗말·아랫말 각각 하나씩, 동네목욕탕
생활패턴의 변화와 함께 사라져가는 업종 중 하나가 동네 목욕탕이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만 해도 목욕탕은 사람이 조금이라도 모여드는 동네라면 꼭 있어야 할 필수 업종 중 하나였다. 그러다가 다양한 휴게시설을 갖춘 대형 찜질방으로 유행이 바뀌면서 구도심의 소규모 목욕탕들이 점차 사라져갔다. 그러다가 코로나를 고비로 대형 찜질방들도 문을 닫은 곳들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관산동에도 윗말과 아랫말에 각각 목욕탕이 한 곳씩 성업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적외선 온천식 대중사우나’라는 간판이 눈길을 끄는 안말의 동우사우나는 단독건물을 갖고 있는, 제법 큰 규모의 목욕업소다. 하지만 지금은 영업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물 뒤편에 높다란 굴뚝이 올라가 있는 윗말 상가골목의 청수사우나는 외형상 오래된 동네목욕탕의 모습에 좀 더 가깝다. 입구에는 보석·자화수탕이라는 글씨가 적혀있다. 아랫말 원적외선과 윗말 자화수 중 어떤 물이 효능이 더 좋았을지 궁금해진다.
청수사우나는 동우사우나와 달리 지금도 여성 전용 사우나로 영업 중이다. 동네 목욕탕이 ‘여성전용’으로 변신한 사례는 원당과 일산 등 다른 구도심에서도 목격되는 현상이다. 상황 변화에 대처하며 길게 살아남고자 하는 경영자의 고군분투가 느껴진다.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니 청수사우나는 수요일이, 동우사우나는 화요일이 휴무다. 경쟁하면서도 공존해야 하는 동일 업종의 생리를 보여주는 도시화석이다.
버스 놓치면 하룻밤 묵어가던 여관들
관산동에는 여관도 윗말과 안말에 각각 하나씩 있다. 관광지도 유흥가도 아닌 동네에 여관이 두 개 씩이나 있는 이유가 뭘까 궁금하겠지만, 시간을 몇십 년 전으로 되돌려보면 이해가 된다. 20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관산동은 내유동, 사리현동, 고봉동, 지영동 등 인근 지역의 중심시가였다. 특히 더프라임 빌딩이 들어서며 사라진 벽제시장이 활기를 띠던 시절에는 인근지역 주민들이 너나없이 관산동에서 장도 보고, 사람도 만나고, 술도 한잔 하는 게 일상이었고, 그러다가 버스가 끊기면 여관방 신세를 지기도 했던 것이다.
안말 벽제여관은 꽤 오랫동안 영업을 이어오고 있지만, 외관과 주변이 무척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다. 윗말 청수여관은 앞서 소개한 청수사우나와 함께 운영되는 숙박업소다. 지금 남아있는 것들이 사라지면 더 이상 새로 생길 일은 없는 구도심의 여관과 여인숙들도 그 자체로 업종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도시화석이다.
하나 더, 관산동에는 사실 여관의 후속 버전인 모텔들이 통일로 초입에 다섯 곳이나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 모텔들이 밀집해 들어서게 된 스토리도 무척 흥미로운데, 나중에 ‘통일로의 역사’를 개괄할 때 별도로 다루도록 하자.
골목길 소실점 끝은 모두 ‘통일로’
관산동의 골목길들은 통일로를 수평축 삼아 위 아래 수직으로 가지치기를 한 모습이다. 그렇다보니 윗말의 길들은 통일로에서 오르막으로, 안말 길들은 통일로에서 내리막으로 경사가 전개된다. 반대로 마을의 남과 북 끝쪽에서 보면 통일로를 향해 내려가거나 올라가는 경관이 포착된다.
하단에 첨부된 사진의 위 두 장은 안말에서 통일로 방향을 바라본 모습이고, 아래 두 장은 윗말에서 언덕길 아래 통일로 방향을 내려다본 모습이다. 넉 장 사진의 소실점 끝은 동일하게 통일로다. 마주 보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지형은 양쪽 마을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일상의 패턴과 방위 감각을 만들어줬을 것 같다.
손님들로 북적였던 택시주차장
관산동마을의 큰길가 한쪽에는 ‘벽제택시주차장’이라고 적힌, 묵직한 철제로 만든 이동식 교통통제 펜스가 두 개 놓여있다. 또한 그 옆에는 ‘교통안내소’라는 간판을 이고 있는 가건물도 눈에 띈다. 과거 택시주차장이 운영됐었다는 걸 보여주는 도시화석들이다.
지금이야 다들 앱으로 택시를 호출하지만, 멀지 않은 과거만 해도 거리에서 손을 들어 빈 차를 잡거나 택시가 정차해 있는 택시 주차장으로 찾아가야 했다. 때문에 일산이나 원당 등 유동인구가 모여드는 구도심 중심가에는 어김없이 택시승차장이 운영됐다. 통일로 인근에서는 바로 관산동이 가장 핵심적인 택시승차의 집결지이자 출발지였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미터기 요금이 정확히 적용되지도 않던 시절이었다. 관산동에서 내유동 얼마, 사리현동 얼마, 고봉동 얼마 하는 식으로 관행적 가격이 매겨져 있었는데, 미터요금보다 더 비싸게 책정되곤 했다. “나올 때 빈 차로 나오니까, 왕복요금을 받아야 한다”는, 공급자 중심적인 과거의 관행이었다. 택시주차장 펜스에 적힌 ‘외부택시 및 차량 주차금지’라는 경고문에서도 벽제택시 기사들의 자부심이 묻어난다. 관산동에서 오래 기사일을 한 분들은 “그 시절이 좋았다‘고 회고하곤 한다.
단조로운 풍경에 리듬 부여하는 외부계단
구도심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빌라와 상가 건물들은 미적 아름다움보다는 기능적 목적에 초점을 맞춘 건물들이다. 제한된 공간과 예산이라는 빠듯한 조건 안에서 공간 활용도를 최대한으로 뽑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미적 장식은 처마나 창틀 등의 부분적 요소들에 살짝 표현되는 정도에 그친다.
하지만 이례적으로 조형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건축적 요소가 있다. 바로 건물 바깥으로 노출된 외부계단이다. 구도심 건물의 외부계단은 높이의 차이를 극복하는 게 건축의 기본적 과제 중 하나임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빌라와 상가건물의 외부계단은 탄생 이유가 좀 다르다. 빌라나 연립 등의 주거용 건물에서는 지형적 요소 등으로 인해 메인 통로를 외부계단 형태로 만든 것을 볼 수 있고, 상업시설로 이용되는 건물에서는 소방법 등 관련 법령의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외부계단이 설치된다. 어떤 경우이건, 골목답사를 하다가 외부계단을 만나면 잠시 멈춰 서서 이리저리 구경하게 된다. 대각선이나 나선형으로 동일한 형태가 반복되면서 지상과 상층부를 연결하는 시각적 리듬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다음 회에 관산동 시리즈 마지막 순서인 포토아카이빙②가 이어집니다>
※ 도움말 엄호용 관산동 삼화인테리어 대표
※ 참고도서 『갈등 도시』 『대서울의 길』 (김시덕, 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