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35주년 기획] 철길, 너른 들녘, 왕릉과 묘지… 35년 전 ‘우리고장 고양’
응답하라, 고양 1989~1990 ①고양신문 창간호
고양신문 옛 지면과 함께 떠나는 시간여행
지금과는 다른, 정겹고도 낯선 인식과 감각
창간호부터 ‘신도시 결사반대’ 생생히 보도
지금도 남아있는 80년대 랜드마크 건물들
[고양신문]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인 1989년 6월 1일, 고양신문 창간호가 발행됐다. 당시 제호는 ‘주간고양’이었는데, 고양의 첫 신문이자 기초자치단체 단위로는 ‘홍성신문’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선보인 지역신문이었다. 이후 고양신문으로 제호를 바꾸고 35년을 꾸준히 지역의 역사를 기록해왔다.
오래 묵은 신문의 지면들을 들춰보는 일은 늘 흥미롭다. 지난 기억을 반갑게 반추할 때가 많지만, 때로는 지금의 감각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과거의 불편한 인식체계와 만나기도 한다. 그렇게 반가움과 불편함을 교대로 마주하다보면 지금 우리가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도 언젠가는 과거의 것이 될 것이라는 당연한 이치가 새삼스레 환기된다.
창간 35주년을 핑계 삼아 35년 전 그 시절, 그러니까 1989년과 1990년의 고양 땅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보려 한다. 이 두 해는 고양신문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보면 천둥벌거숭이처럼 태어난 매체가 초창기의 위기들을 이겨내고 어렵사리 뿌리를 내린 시기이다. 동시에 지역사 측면에서도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 된 두 사건, 신도시발표와 한강제방 붕괴가 연이어 터진 때이기도 하다. 나이테에 비유하자면 굵고 진한 선이 연속으로 선명하게 새겨진 셈이다.
5회 안팎으로 진행할 시리즈 기사를 통해 두 사건의 기록들을 당대의 시선으로 살펴보고, 눈길이 가는 또 다른 지면들도 몇 개의 테마로 분류해 정리해 볼 생각이다. ‘고양신문’이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떠나는 과거로의 시간여행, 첫 번째 도착지는 ‘주간고양 창간호’다.
창간 첫 기사 ‘1989년 일산의 봄’
창간호 제작을 준비하던 4월 말, 정부가 오늘날 우리가 ‘1기신도시’라고 부르는 신도시 건설계획을 전격 발표했다. 전례가 없는 국가주도의 대규모 개발계획이었기에 5곳 대상지역 주민들의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중에서도 일산 주민들이 가장 크게 반발했다. 주간고양 창간호 1면은 트랙터와 경운기를 몰고 고양군청으로 몰려가는 일산주민들의 사진을 담고 있다. 사진 속 시위대의 손에는 ‘결사반대’라는 글씨와 함께 ‘보통사람이 보통사람 죽인다’는 구호도 보인다. 두 해 전 대선에서 ‘보통사람’을 자처하며 선거운동을 했던 노태우 대통령을 겨냥한 문구였다. 이 말이 과장이 아닌 게, 실제로 일방적 토지수용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다수의 일산주민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사태가 이어졌다.
고양에서 유독 주민반발이 선명했던 이유를 이해하려면 당시 고양주민들의 정서를 살펴야 한다. 고양땅에는 한강변의 비옥한 농경지가 펼쳐져 있었지만 대부분의 땅이 그린벨트, 절대농지, 군사보호구역 등 이중 삼중의 제약에 묶여 있었고,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세월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처럼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토지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이들이 대다수였기에 정부의 토지 수용 발표가 하루아침에 맞닥뜨린 삶의 해체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서울 중산층을 위해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땅을 포기 못한다”는 외침은 수용주민들의 분노가 어떤 관점에서 촉발됐는지를 정확히 보여준다.
이어 특집기사는 △외지 투기세력만 보호 △타당성 검토 없는 졸속 계획 △초고속 건설로 인한 도시기반시설 미비 △건설인력 및 자재 부족으로 인한 부실공사 우려 등을 전하며, 당대 지역민들의 문제의식이 오늘날의 관점과 비교해도 매우 예리했음을 증언하고 있다.
그림지도에 담긴 ‘농촌도시 고양군’
기자가 개인적으로 주간고양 창간호에서 가장 흥미롭게 들여다 본 지면은 2개 면에 걸쳐 인쇄된 ‘그림으로 보는 고양군’이라는 그림지도다. 발행인의 아내가 솜씨를 발휘해 그린 소박하고 정겨운 손그림인데, 당시 고양에 사는 이들이 ‘우리 고장’을 공간적으로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가 고스란히 표현되어있는 귀중한 자료다.
지도에는 경의선 기찻길을 따라 일산과 능곡이, 교외선 기찻길을 따라 원당과 벽제가 그려져 있다. 도로 중에서는 통일로를 따라 도로명비석과 필리핀참전비, 통일로휴게소 등이 그려져 고양군의 가장 중요한 도로망이었음을 방증한다. 그런가 하면 오늘날 일산대교가 놓인 이산포는 나루터로 그려졌고, 일산신도시 일대는 드넓은 논으로 표시됐다.
지도에는 북한산성과 흥국사, 서삼릉과 서오릉, 행주산성과 벽제관지, 최영장군묘 등 역사유적들이 빠짐없이 그려져 있고, 두 곳의 대학교(항공대·농협대)와 5곳의 중고교(고양종고·고양실업고·고양여중고·능곡종고·벽제고), 당시는 국민학교라 불렸던 초등학교 9곳(성석·송포·대화·일산·백마·능곡·벽제·흥도·지축)이 여기저기 자리하고 있다.
학교를 빼면 주요 건물들은 몇 안 된다. 황룡산 기슭의 홀트아동복지회와 화정리의 회생병원(현 명지병원), 능곡 허스프라자, 원당 고양군청과 주변 관공서들, 원당주공아파트(현 래미안아파트 자리), 지축차량기지 등이 전부다. 지도 동북쪽 고양리는 ‘향교부락’으로 표기됐고, 주변에는 너댓 개의 공동묘지들이 넓게 그려져 있다.
정리하자면 왕릉과 산성, 야산에는 공동묘지, 평야에는 논과 밭, 그리고 몇 개로 흩어진 읍내를 경의선과 교외선과 통일로가 이어주는 호젓한 농촌도시. 이게 당시 사람들이 인식하는 ‘우리고장 고양군’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35년 전 간판 정치인들은 누굴까
창간호를 보면 당시의 유력 정치인들이 누구였는지를 알수 있다. 당시 고양군의 지역구 국회의원은 1988년 총선에서 ‘고양의 토박이 일꾼’을 앞세우며 신민주공화당 간판으로 초선 배지를 단 이택석이었다. 이 의원은 이후 민자당과 신한국당 소속으로 내리 3선을 한다.
또 한 명의 현역은 평화민주당 소속 전국구 국회의원 이교성이었다. 이 의원은 차기 총선에서 지역구 후보로 나서기 위해 곳곳에 열심히 얼굴을 내밀던 시절이었다. 또한 여당인 민주정의당 이국헌 위원장은 1996년 신한국당 소속으로 국회 입성에 성공하고, 통일민주당 이근진 위원장 역시 2000년에 새천년민주당 간판으로 당선된다. 향후 오랜 시간 고양의 정가를 구성했던 주요 인물들이 창간호 지면에 축사, 또는 축하광고라는 이름으로 빠짐없이 이름을 올린 것이다.
지역민 기대 모았던 ‘젊은 백군수’
당시 국회의원만큼이나 주목을 받았던 인물은 바로 백성운 고양군수였다. ‘행정고시에 합격한 박사 출신 엘리트 공무원’이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안고 1988년 39세의 젊은 나이에 고양군수로 부임한 그에게 지역민들의 기대가 모아졌던 것이다. 역동의 시기에 고양군수를 지낸 그는 그때의 경력을 디딤돌 삼아 2008년 한나라당 소속으로 일산동구 국회의원을 지낸다.
주간고양 창간호에는 ‘백성운 고양군수에게 듣는다’라는 제목의 특집인터뷰가 실렸다. 내용을 살펴보면 1989년 무렵 고양군 행정의 소소한 정보들이 가득하다. 당시 고양군·읍·면 공무원 숫자가 600여 명이었고, 주민들의 가장 큰 민원은 상·하수도 설치였다. 또한 군립도서관이 하나도 없는 문화적 불모지였는데, 반대로 원당읍에는 유흥주점과 숙박업소 등 향략업소들이 주택가 인근까지 확산되어 여러 가지 문제를 낳고 있었다. 이런 과제들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백성운 군수는 나름 성의 있게 답변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가장 예민한 과제인 일산신도시 개발 주민반발에 대해서는 “국가 사업이라 변경은 어려울 것”이라며 국가공공사업에 대한 희생 감내를 주민들에게 요청하는, 지극히 공무원다운 답변을 들려준다.
초창기 고양신문을 세운 세 주역
16면의 지면을 채운 주간고양 창간호의 탄생은 기적에 가까웠다. 제도적 민주화가 막 태동하던 80년대 말, 휴전선 배후지로서의 강한 보수성을 가진 서울의 변방 농촌지역 고양군에서 ‘맑고 밝고 바른사회를 지향하는 신문’이라는 사시를 내걸고 첫 신문을 찍은 장본인은 28살 대학생 나진택이었다.
하지만 그는 창간호에 자신의 이름을 앞세운 인사나 창간사를 쓰지 않고, 제호 밑에 ‘발행 겸 편집인 라진택’이라는 작은 글씨로 자신의 흔적을 남겼을 뿐이다. 비록 청년발행인이라는 한계로 인해 고양신문과의 인연을 일 년 남짓밖에 이어가지 못했지만, 그의 호기로운 결행 덕분에 고양신문이 태어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기억돼야 할 것이다.
창간인 나진택과 함께 고양신문 주역으로 기억해야 할 두 명의 이름이 지면에 등장한다. 창간호에 축사를 게재한 이은만 당시 고양문화원장은 그해 12월 존폐의 기로에 선 주간고양을 전격 인수해 2대 발행인으로 취임한 후, 신문이라는 매체의 전파력을 통해 고양의 역사와 정체성을 정립하는 일에 열정적으로 매진했다.
그런가하면 고양 출신 기업인이었던 허석 재경고양군민회장은 초기 주간고양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다. 허스개발 대표로서 허스맨션·허스아파트 등을 곳곳에 지었던 그는 당시 능곡의 랜드마크 상가였던 허스프라자의 공간 한쪽을 신문사 사무실로 흔쾌히 내어주었다.
허스프라자, 행주관광호텔, 은하예식장
창간호 고양신문에 실린 광고들도 살펴보자. 앞서 언급한 허스프라자는 ‘허스프라자 예식장·회관’이라는 이름으로 광고가 게재됐다. 1986년에 지어진 이 건물에는 예식장을 비롯해 각종 행사가 치러지는 연회장을 갖추고 있었다. 광고를 보면 ‘예약시 3인 이상일 경우 봉고차량을 제공’한다고 적혀있고, 약도에는 지금은 사라진 행정구역명인 ‘지도읍사무소’가 표시되어 있다.
네이버 거리뷰를 확인해보면, 붉은색 벽돌로 단아하게 지어진 허스프라자 건물이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허스프라자에서 멀지 않은, 옛 능곡역 바로 옆에 자리한 행주관광호텔 역시 당시 고양군의 새로운 랜드마크 건물 중 하나였다. 1988년에 고양군 최초의 호텔로 개장했는데, 김포공항에서 행주대교를 건너오면 금방 도착하는, 나름 접근성이 좋은 위치였다. 전시와 연주 발표회도 여는 문화인프라를 표방했고, 주말에는 뷔페를 운영했는데 점심 1만원, 저녁 1만2000원, 35년 전이면 상당히 비싼 고급식사였다. 또한 광고에 서울(02)과 고양군(0344)의 지역번호를 함께 표기한 걸로 보아 고양을 넘어 서울까지를 영업권으로 본 듯하다.
행주관광호텔의 현재 모습도 네이버 거리뷰로 찾아보니 건물은 그대로인데, 현재는 새찬요양병원이 운영되고 있다.
재밌게도 주간고양 창간호에는 서울 은평구 불광동의 은하예식장 광고도 실렸다. 지금의 감각으로는 이해가 잘 안 되지만, 당시에는 불광동이 고양군과 꽤나 친밀한 생활권이었다. 고양군 주요 읍내에서 시외버스를 타면 종점이 불광동 시외버스터미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건이 되는 집들은 자녀들 학교도 은평구로 보내고, 각종 집안 행사도 불광동으로 나가서 치르는 일이 흔했다. 고양신문 창간호에 불광동의 예식장 광고가 실리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셈이다. 현재 불광동 버거킹 건물이 바로 은하예식장이 있던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