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35주년 기획] 서울사람 집 짓는다며 땅·고향·이웃 버리고 떠나라니…

응답하라, 고양 1989~1990 ③ 신도시 철회 투쟁 1년

2024-07-16     유경종 기자

아무런 흔적 못 남기고 떠난 일산 옛사람들
목숨까지 버려가며 펼친 ‘반대투쟁’ 무용지물
농토와 맞바꾼 거액 보상금 앞에 갈팡질팡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아파트도시인 일산. 하지만 35년 전에는 한강하구를 따라 드넓은 논과 밭이 펼쳐진 농촌지역이었다. 

[고양신문] 외지인들은 ‘고양시’라는 이름보다 ‘일산’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안다는 말이 있다. 사실인지도 모른다. 35년 전 분당과 함께 1기신도시 대표주자로 탄생한, 아파트 천국 ‘일산’이 남긴 인지도가 너무도 강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도시공간에는 역사가 있다. 원래부터 있었던 풍경도, 앞으로도 영원할 풍경도 없다는 말이다. 특히 일산은 국가 주도로 원주민의 역사를 최단시간에 지워버리고 세워진 도시다. 아파트숲이 들어서기 전 일산 땅에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농민들이 있었고, 방값 저렴한 외곽 농촌마을에 세들어 살면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세입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흩어져버린 원주민들, 거스를 수 없는 도시화의 물결에 떠밀려 나간 농민들과 세입자들의 흔적들을 1989년과 1990년 고양신문 지면에서 찾아보자.      

‘농경사회 일산’의 거센 반발

1989년 4월 27일 노태우정부가 한계치를 넘어선 서울의 주택난을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수도권 5개 지역에 대규모 신도시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오늘날 ‘1기신도시’라 부르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국가 주도 택지개발사업이 깃발을 올린 것이다. 

반응은 지역마다 조금씩 달랐다. 가장 큰 반발이 일었던 곳은 바로 일산이었다. 왜 그랬을까. 일산은 5개 신도시 수용지 중 농지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었다. 전체 수용면적 460만 평 중 420만 평이 농지이고, 그중 70%가 절대농지였다. 일산의 반발은 곧 ‘농경사회의 반발’이었던 셈이다. 수백 명이 집결한 여러 차례의 반대시위마다 경운기와 트랙터, 트럭과 오토바이 등 농기구가 동원된 점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주민들의 반발은 즉각적이었다. 기습적 발표가 있은 지 불과 3일 만에 30여 개 마을 이장단과 마을대표들을 중심으로 ‘일산지역 신도시 결사반대 투쟁위원회’가 출범하고, 4일째부터 수백 명의 주민들이 일산에서 능곡을 거쳐 원당 고양군청까지 가두시위를 시작한다. 5월에는 투쟁 수위를 한층 높여 여의도 국회 시위, 올림픽대로 점거농성, 통일민주당사와 평화민주당사 철야농성 등을 전개하며 일산주민들의 강력한 반발심리를 전국에 알린다. 5월부터 토지·물건조사가 순조롭게 시작된 분당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인 것이다. 

일산신도시 개발계획 전면 철회를 요구하며 농기구를 끌고 나와 가두시위를 펼치고 있는 일산 주민들.

토지주도 세입자도 “떠나면 못 산다”

오늘날에도 강제수용이 발표되면 적절한 보상을 받기 위한 투쟁이 당연히 뒤따른다. 하지만 35년 전 일산주민들의 양상을 살펴보면, 이들의 초기 반발이 단순히 금전적 보상 때문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주민들의 목소리 몇 개를 옮겨보면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을 서울 중산층 잠자리로 내줄 수 없다 △서울사람 흉내 내며 살기 싫다. ‘시골 보통사람’으로 살겠다 △정부가 정녕 농민을 버리는가 △서울 생활권에 흡수되지 않고 고향마을 농촌을 지키려는 사람들을 오히려 격려하고 도와줘야 하는 것 아닌가 등이다. 스스로를 ‘서울·도시사람’과는 대비되는 ‘고양·농촌사람’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강한 정체성이 확인된다. 

아울러 △농지 확보 명분으로 간척사업 벌이는 정부가 질 좋은 고양 땅 옥토를 아파트 건설을 위해 없애버린다는 건 모순이다 △서울 인구문제를 해결하려면 농촌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들면 된다는 거시적이고 논리적인 반박도 발견된다. 

또 한 가지 특징은 토지건물주와 세입자들이 서로를 한 몸처럼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땅주인은 조상 땅 못 떠나고, 세입자는 여기 떠나면 살 곳 없다”는 공동운명체적 연대감이 반대투쟁 초기의 목소리에서 확인된다.

조사단과 주민, 곳곳에서 충돌

정부 대응은 일사불란했다. 신도시 발표 당일부터 토지개발공사의 ‘일산신도시개발 직할사업단’이 가동돼 업무를 시작했다. 애초 계획은 △7월까지 토지·물건조사를 완료하고 △8월에 주민대표가 참여하는 보상심의위원회를 구성해 평가액을 결정하고 △보상금 지급 절차를 신속히 마무리하고 △11월부터 본격적인 공사에 착공한다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속전속결, 사상 유례없는 속도전의 출발신호가 울린 것이다. 

하지만 주민들의 반대투쟁도 날로 거세졌다. 6월에는 일부 대표들이 ‘반대투쟁위’를 ‘대책위원회’로 명칭 개정하자는 안을 제시했지만, 투표 결과 대다수의 반대로 원래 이름을 존속하기로 결정했다. ‘협상 없는 투쟁’ 노선을 명확히 한 것이다.  

다급해진 토개공 사업단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고양경찰서 전경들을 대거 대동하고 마을을 돌며 토지·물건조사를 강행했다. 하지만 이런 강경일변도의 정부대응은 주민들의 더 큰 반발을 초래했다. 곳곳에서 조사단 일행과 주민들의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고, 인분을 투척하기도 했다. 아울러 조사에 응하는 주민과 이를 막아내려는 주민 사이의 갈등도 빈번히 일어났다. 심지어 한 마을에서는 물건조사에 응한 주민의 집으로 연결된 상수도관을 파손해버린 다수의 주민들이 구속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공공기물을 파손하는 일도 발생했다. 목표가 된 건 무허가건축 감시초소였다. “개발제한구역이라는 이유로 움막 하나도 못 짓게 감시했던 정부가 농민들의 피같은 농토를 빼앗아 아파트를 때려짓느냐”는 반발이 반영된 것이다. 어떤 마을에서는 무허가건축 감시초소 대신 토개공 실측단의 마을 진입을 막는 ‘주민감시초소’를 세우기도 했다. 

정부의 일방적 토지수용 사태를 비관하며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비극이 연이어 발생했다. 

연이어 발생한 비극적 사태

저항 과정에서 비극적인 사태가 연이어 발생한다. 4월 19일 강모씨를 시작으로 신도시개발을 비관하며 주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9월까지 무려 다섯 건이나 이어진 것이다. 극단적 선택을 한 이들의 연령은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했고, 자영농도 있었고 소작농도 있었고 안정적 직장을 갖지 못한 변두리지역 빈민도 있었다. 누군가는 농약을 삼켰고, 누군가는 스스로 목에 줄을 걸었다. 

당시 고양신문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고향과 삶의 터전에 대한 애착이 짙고, 새로운 생활환경변화에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국가의 일방적 토지수용 발표가 세대와 신분을 막론하고 얼마나 공포스러운 충격으로 다가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지면에 실린 농민 강 모씨의 주민장례식 사진에는 흰옷을 입고, 머리에 흰띠를 두른 수백 명의 주민들이 검은 리본을 두른 상여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확인된다. 

외부로 확산된 신도시 철회 논쟁 

주민들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대면하며 정부 입장을 대변한 존재는 백성운 고양군수였다. 백 군수는 주민들이 제기하는 문제점에 하나하나 구체적인 답변을 제기하며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 노력했다. 수시로 주민들을 만나 토지보상과 이주자택지, 대체농지, 세입자 생존권 등을 꼼꼼하게 신경써서 신도시 개발이 원주민들의 불이익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하겠다며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동시에 “정부가 하는 일이니 다른 선택지는 없다. 국가의 택지개발사업에 반대하는 동네는 고양밖에 없다. 분당은 5월에 이미 물건조사를 반 이상 마쳤다. 빨리 협조해야 불이익이 없다”며 주민들을 조급하게 만들기도 했다. 당근과 채찍 전략을 동시에 사용한 셈이다. 

그런 가운데 이택석 국회의원(신민주공화당)이 주민과 만난 자리에서 “다음 대선(1992년)까지 끌면, 신도시계획 백지화가 가능하다”는 발언을 해 커다란 파장이 인다. 토개공과 군수는 즉각 반박성명을 내며 “근거 없는 말로 주민들을 호도하지 말라”고 단속에 나섰다. 투쟁위의 반응도 “이 의원이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다가, 주민 반발이 의외로 강하니까 슬쩍 솔깃한 발언을 한 것 아니냐”며 보다 선명한 행동을 이 의원에게 요구하기도 했다.  

일산주민들의 신도시반대 투쟁은 중앙의 재야·진보정치세력들에게도 자극을 줘 명동성당에서 ‘일산·분당신도시 개발,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주제로 공청회가 열렸다. 하지만 정작 일산주민 투쟁위와는 사전 소통을 하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정부는 물론이고, 중앙의 진보진영 역시 수용 당사자인 농촌마을 주민들을 오롯한 주체로 대접하지 않았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제시된 보상 방안

주민 반발로 인한 공사지연이 지속되자, 정부에서 구체적인 당근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토개공이 정리해 발표한 ‘일산·송포 신도시건설지구 주민설명문’에는 △발표 이전 지은 무허가 건물도 보상 포함 △분양권과 입주권 △토지건물 보상액 평가기준 △농민에게도 상가입찰우선권 부여 등의 구체적인 설명들이 꼼꼼히 나열됐다. 

이 설명문은 갈등의 종착지를 결국은 ‘보상문제’로 일원화시키는 효과를 안겨줬다. 아울러 단일대오를 이뤘던 토지·건물주와 세입자들이 전혀 다른 입장에 서 있는 관계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줌으로써, 연대의 인장력을 헐겁게 만들었다.

조금씩 분열되는 주민 여론  

투쟁위는 강경투쟁 기조를 유지했지만, 주민들 사이에서는 하나둘 물건조사에 응하는 세대가 늘어갔다. 8월 현재 이미 수천억원이 넘는 돈을 들여 지하철, 도로, 상수도 공사에 착수했다는 정부 발표도 ‘신도시 대세론’에 무게를 실어줬다. 이러한 분위기를 이어가고자 고양군은 “토개공과 주민 사이에 중재와 소통을 돕는다”는 목적으로 ‘일산지구 개발지원사업소’를 9월에 개소한다. 아울러 정발산을 녹지공원으로 살리고, 대규모 호수공원을 조성해 일산을 전국 최고의 전원도시로 만든다는, 새롭게 태어날 신도시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상해볼 수 있는 청사진도 발표했다.

주민들 여론은 “현실을 인정하고 보상심의위에 참여해 우리 몫을 챙겨야 한다”는 측과 “신도시 백지화 가능하다, 보상심의위 참여 끝까지 거부해야 한다”는 측으로 갈렸다. 그러는 사이 11월이 됐고, 토지물건조사 달성률은 어느새 70%를 넘어섰다. 

‘합리적 보상’으로 노선 전환 

반면 투쟁위는 행정소송을 통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로 전략을 세우고, 288명의 주민이 참여해 건설부 장관을 상대로 ‘택지개발지구 지정 무효확인소송’을 제기한다. 소송 비용은 주민들이 십시일반해 마련했다. 

하지만 투쟁위 내에서도 애초 목표했던 ‘신도시 계획 전면 철회’는 불가능한 것 아니냐는 현실론이 대두된다. 해가 바뀌어 1990년 2월에 여의도 국회와 평민당사를 찾아 진행된 철야농성에서 제시된 요구사항들을 보면, 투쟁위의 노선 전환이 확실히 감지된다. 정부가 정녕 신도시개발을 강행하겠다면, 국회가 ‘택지개발촉진법’과 ‘공공용지 취득 손실보상 특별법’을 만들어 주민 요구사항을 최대한 보장해달라고 주장한 것이다.   

세입자 생존 약속 흐지부지 

본격적인 토지보상금 지급은 3월부터 시작됐고, 한 달 만에 보상금 지급 비율이 50%를 넘겼다. 이 과정에서 세입자들의 생존권을 보장하겠다던 막연한 약속은 흐지부지됐다. 토지주들에게는 어쨌든 토지와 맞바꾼 목돈이 주어졌지만, 세입자들은 고작 5인 가족 기준 180만~220만원에 불과한 이주비, 아니면 언제 완공될지 모르는 신도시 임대주택 우선분양 중 택일할 수 있는 권리만 제시됐다. 토지주와 세입자가 연대했던 초기 분위기도 이미 각자도생으로 흩어져 버렸다.  

오늘날 일산신도시 개발로 삶의 거처를 잃은 이들이 대부분 땅이나 집을 가진 원주민들일 것이라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수용지구 총 5400세대 중 정확히 절반인 2700세대가 세입자였다. 고향마을에 살았지만 자기 집을 갖지 못한 빈민들, 또는 값싼 거처를 찾아온 도시주변 노동자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얘기다. 

자신들의 권리를 한 번도 주장해보지 못했던 이들은 신도시 발표 후 거의 1년이 지난 1990년 3월에서야 투쟁위와는 별개로 ‘일산신도시 건설지구 세입자 대책위원회’를 결성한다. 하지만 4월에 시도했던 세입자 대책위 집회는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무산돼버리고, 이 과정에서 다소 온건한 입장을 취했던 대표가 회원들의 비난을 받고 사임하며 동력을 잃는다.    

고양으로 몰려드는 ‘금융권 골드러시’  

3월부터 현금 보상 돈보따리가 풀리자, 이전에 보지 못했던 풍경이 펼쳐졌다. 주택은행 한일은행 국민은행 상업은행 등 9개 시중은행 점포가 고양군 곳곳에서 개점해 고객유치경쟁을 펼친 것이다. 

은행들은 지점장과 직원들을 총동원해 수용지구 마을을 돌며 자사의 금융상품을 소개한 홍보물과 함께 쟁반, 수건, 주방용기 등 공짜선물을 뿌려댔고, 한밤중까지 주민들을 붙들고 상담과 설명을 하는 풍경이 연출됐다. 또한 수용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입금액 1000원’이 찍힌 통장을 무조건 개설해주는 은행도 있었다. 시중은행의 토지보상금 유치 경쟁에 투자신탁, 단자회사, 증권회사들도 가세해 주민들의 눈과 귀를 정신없게 만들었다.

복잡한 상황이 전개되자 주민들은 “은행 한 곳을 정해 맡기자”, “땅은 가만있지만, 돈은 하루아침에도 날아갈 수 있으니 조심하자”면서 서로의 정신줄을 다독이기도 했다. 반면 은행권과 증권회사 직원들은 “달걀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말이 있다”, “고정자금과 유동성자금을 나눠 예치해야 한다”, “증권투자는 생각보다 안전하고 고수익이다” 등의 금융지식들을 주민들에게 주입해댔다.

집과 농지를 장만하는 것 외에 유동자산을 관리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이들에게 갑자기 거액의 현금이 주어진 땅. 농촌도시 고양군이 하루아침에 ‘금융도시’가 된 상황을 당시 고양신문은 ‘축소판 골드러쉬’라고 표현했다. 이렇게 일산신도시 발표 이후 1년이라는 시간이 숨가쁘게 흘러갔다. 

※참고자료 : 고양신문 1호(89.06.01)~31호(90.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