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애 칼럼] 세상을 보는 것과 세상에 보여지는 것
어느 책모임중독자의 고백
『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
[고양신문] ‘나는 왜 이렇게 궁핍한가.’ 대학 1~2학년 때는 마음도 주머니도 궁핍했다. 정액권으로 해결하는 지하철 요금을 제외하고 하루 용돈이 5000원에서 7000원 정도였던 시절이다. 학식은 1200원이었다. 점심을 굶으면 저녁에 맥주 두어 잔과 마른안주 정도의 사치를 즐길 수 있었다. 법적으로 성인이 되었어도 경제력을 갖추지 못했기에 오로지 부모님이 주신 용돈으로만 생활할 수 있었다. 가끔 선배들이 밥이나 맥주를 사 줄 때면 나는 ‘유쾌한 후배’의 가면을 쓰고 분위기를 띄웠다. 나름 익살로 궁핍을 숨기려는 시도였다. 가난과 재채기, 사랑은 숨길 수 없다는데, 그때 나도 잘 숨겼을지 알 수가 없다.
막연하게 글 쓰는 사람을 꿈꾸던 그 시기, 나는 ‘다자이 오사무’에 끌렸다. 삶 자체를 절망하면서도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괴롭히고 또 괴롭힌 다자이. 다소 궁핍할지라도 평범하기 그지없는 20년을 살아온 나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이해할 수 없어도 끌리는 감정을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다자이 오사무는 세상을 ‘보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세상에 어떻게 ‘보여질지’ 눈치 보는 사람이었다. 그가 본인의 성향과 달리 익살꾼의 모습으로 가면을 쓰고 행동한 이유다. 『인간 실격』의 주인공 ‘요조’처럼. 어린아이였을 때는 주름투성이였던 도련님 요조. 이 주름은 그나마 자연스러운 감정의 표출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조는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능란한 미소를 지닌 소년으로 변모한다. 은희경의 소설 『새의 선물』에서 진희가 열두 살에 ‘보여지는 나’의 모습으로 살아간 것처럼 요조 역시 ‘보여지는 나’에 익숙해진다. 그러다 가족과 분리되면서 그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속박을 피해 도쿄로 건너와 해방구를 찾고 싶었던 요조. 그러나 나쁜 친구 호리키를 만나면서 술, 담배, 매춘부, 좌익 사상에 빠져든다. 이끈 건 분명 호리키지만, 해방의 얼굴을 한 타락에 스스로 걸어 들어간 건 요조다. 심지어 유부녀와 동반 자살을 시도하고 그만 살아남는다. 실제로 다자이 오사무는 다섯 차례 자살 시도를 한다. 어떻게든 ‘보는 나’로 살아가려 하다가도 ‘보여지는 나’의 익숙함이 그를 죽음의 문턱으로 끌고 들어간 게 아닐까 싶다. 『인간 실격』에서는 이러한 실패와 후회, 미련의 감정이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치료 때문에 약물에 중독되어 결국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한 다자이. 이것은 결국 그가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했다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고, 『인간 실격』에서 그 고통을 절절하게 다루었다. 그는 연인의 불륜으로 또다시 그 연인과 동반 자살을 시도한다. 이후 결혼으로 안정을 찾다가 결국 내연녀와 서른아홉 번째 생일에 동반 자살한다. 이러한 인생 마감으로 그가 우울, 염세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는 다른 작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쓸쓸함에 지면 안 돼. 난 그게 제일 중요한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해. 어쨌든 나는 좀 더 살아 보고 싶다. 다시 말해, 최고의 자부심과 최저의 생활로 어떻게든 살아 보고 싶다.’ 유머가 넘치는 작품도 있고, 자연 풍광에 대한 세심한 묘사와 사람에 대한 따뜻한 정서가 담긴 글도 많다.
죽고 싶다는 말은 사실 살고 싶다는 말의 역설일 수 있다. 순간순간 우울감이 몰려올 때 나도 입술을 달싹인다. 죽고 싶다고. 그건 나의 마음을 알아 달라는 신호이다. 무언가에 금방 중독되곤 하던 다자이 오사무의 자살 시도도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여성 편력과 여성과의 동반 자살이라는 나쁜 명예에 잠깐이나 눈을 감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절절한 외침 때문이다.
내가 다자이의 연인이었다면, 또는 친구라면, 그를 끌어안고 물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그를 설득했을 것이다. 죽을 힘을 살 힘으로 바꿔 보자고. 이제는 익살을 떨 필요가 없으니 세상을 똑바로 응시하는 ‘보는 나’로 살아 보자고. 그래서 『인간 실격』 이후 『인간 회복』 같은 희망에 찬 작품을 써 보자고. 그리고 덧붙인다. 당신이 쓴 글에서처럼 ‘행복은 3년 늦게 찾아오니까’ 조금만 버텨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