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열의 고양 사(史)랑방] 백두산 천지와 광개토대왕릉비
[고양신문] 백두산 천지(天池)와 광개토대왕릉비는 중국 고구려 역사탐방의 필수 코스이다. 이곳에는 말 달리며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동북아 최강 고구려의 기백이 곳곳에 남아 있어 우리에게 자못 민족적 자긍심을 느끼게 해준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기까지 400여 년간 국내성을 중심으로 하는 지금의 중국 지린(吉林)성 일대는 고구려의 중심 무대였다. 광개토대왕릉비, 장수왕릉, 국내성, 환도산성 등 당시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고 집안박물관에는 고구려 시대의 유물들이 잘 전시되어 있다.
고양문화원이 운영하는 고양문화아카데미 최고위과정 제2기의 국외연수 일정으로 일행들과 함께 중국 고구려 역사탐방을 다녀왔다. 이번 탐방의 최대 관심사는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지였다. 우리 일행은 중국 측의 세 노선 중에서 1400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서파를 선택하였다. 당초의 우려와는 달리 한 명의 낙오도 없이 전원이 서파전망대에 올라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천지를 볼 수 있었다. 모두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으로 탄성을 지르며 각자의 소원과 민족의 염원인 평화통일을 기원하였다. 그런데 웬일인지 천지에 오르고 내리는 내내 ‘백두산’이라는 느낌을 한 차례도 받을 수 없었다. 중국에서 부르는 장백산(長白山)이라는 명칭만이 계속해서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과 천지의 기를 제대로 받기 위해서라도 어서 서둘러 평화통일의 염원을 이루고, 장백산 서파(중국 측에는 서파 외에도 북파와 남파도 있음)가 아닌 백두산 동파를 통해 천지에 다시 올라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광개토대왕의 정식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중국의 국가유적관광등급 중 최고 수준인 AAAAA(5A)급 관광지로 분류되어 있는 광개토대왕릉비와 태왕릉 입구에는 '호태왕비'라는 커다란 글씨가 한자로 걸려있다. 우리 고대사의 수수께끼를 상당 부분 풀어준 이 비석은 아들 장수왕이 서기 414년 고구려의 역사와 대왕의 업적을 주요 내용으로 하여 건립하였다. 일제에 의해 일부 글자가 조작되어 역사가 왜곡되기도 하였으나, 이 비석은 그 웅장한 크기(높이 6.39m, 너비 1.38~2.00m)만큼 민족 모두의 가슴에 자부심으로 새겨져 있다. 고양문화원 아카데미 1기를 수료한 임순형씨의 경우, 지난 1990년대 말 처음으로 고구려 역사탐방을 다녀온 이후 광개토대왕에 대한 존숭의 마음을 꾸준히 실천해 오고 있다. 그는 1999년 중국으로 건너가 5년에 걸쳐 재료, 크기, 형태, 글자 등 모든 면에서 진품과 똑같은 광개토대왕릉비 복제품을 만들어 들여와 자신이 운영하는 음식점 정원에 설치해 놓았다. 그리고 매년 음력 9월 29일 대왕이 돌아가신 날에 많은 관계자들을 초청하여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임순형 대표의 바람은 광개토대왕이 이룩한 위대한 업적을 되살려 세계로 웅비하는 민족의 자존심을 되찾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 일행은 광개토대왕릉비 앞에서 한민족임을 자랑스러워하며 단체사진을 찍은 뒤, 동양의 피라미드라 불리는 장군총을 찾았다. 규모는 이집트의 것과 비교할 수 없지만 비교적 견고하게 쌓은 아담한 적석총이다. 중국 현지의 안내판에 의하면 태왕릉의 주인을 광개토대왕, 장군총의 주인을 장수왕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이견이 많아 확정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는 듯하다. 여하튼 우리는 답사 기간 내내 만주지역을 경영한 한민족(韓民族)의 위대한 기상을 느끼며 뿌듯함을 간직할 수 있었다.
중국은 지난 2002년부터 만주지역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동북공정을 진행하였다. 집안과 환인지역의 고구려유적들은 이미 중국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동북공정만이 아니다. 서북공정과 서남공정과 같이 다른 소수민족의 역사도 끌어안기 시작하였다. 이는 시진핑 국가주석이 추구하는 세계의 중심, 중화주의의 실천이다. 위대한 한족(漢族)의 깃발 아래 하나의 중국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진(秦), 한(漢), 당(唐)의 영광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족 출신인 현지가이드는 앞으로 몇십 년 이내에 중국 내 조선족은 소멸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했다. 우리 일행이 흥분을 거듭하며 보고 느끼고 돌아온 유적은 과연 누구의 것이었나, 다소 입맛이 씁쓸해지는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