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가는 내 몸과 기울어져가는 삶에 적응하려 합니다”
나경호의 사람도서관 (18) 전성민 전 고양시청소년재단 대표
[고양신문] 우리는 언제까지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은 어찌 살아야 하는 걸까요? 은퇴 이후 멋진 미래에 대한 상상과 바람, 동시에 여러 불안과 두려움을 갖게 되는 일이 예전보다 더욱 잦아진 것 같습니다. 40년 넘게 공공의 영역에서 청소년, 청년들을 위해 일하고 얼마 전 은퇴를 한 전성민(71세, 일산동구 중산동과 강원도 양양 거주) 전 고양시청소년재단 대표를 모시고 하루하루 즐겁고 성실히 삶을 꾸려 나가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나에게 찾아오는 노화와 존엄한 죽음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칠십 평생을 살아오며 인상적이었던 기억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3~4살 때였을 겁니다. 집이 아주 우울했어요. 한동안 집 안의 불도 다 꺼져 어둡고 침침했는데 어린 저로서는 이 상황이 너무 이상했어요. 식구들이 서로 아무 말도 안하고 따로 있었습니다. 나중에 제 동생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사인은 잘 모르겠어요. 제 위로 형이 하나 있었는데 피란 갔다가 천연두로 죽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들었어요. 지금에서야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어둡고 컴컴한 분위기의 정체는 바로 죽음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에는 그 단어를 알 수 없었지만. 저에게 가장 강렬한 기억 중 하나인데. 글쎄요 이게 저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한참 장성하고 나서 78년도 대학가가 엄청 예민할 때였어요.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과 갈등이 무척 고조된 초긴장상태였습니다. 대학생들은 항상 저에게 물었어요. “형은 누구 편이에요?” 어른들과 청년들 사이에 끼여 여러 청년활동을 진행했는데 당시 스트레스가 극도로 심했습니다. 어용, 회색분자 등의 말도 많이 들었고. 돌아보니 어디에서나 잘 어울리려 노력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어디에도 잘 끼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대학교 4학년 조국순례대행진 때 지도선배로 참여했어요. 마침내 10여일의 행진이 끝나는 날 수고했다며 청년들과 서로 얼싸안았을 때, 나도 모르게 끝없이 눈물이 나왔던 경험이 있습니다. 저는 그 전에도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그렇게 펑펑 울었던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요즘 말로 치면 MBTI 중에서 제가 엄청 강한 T입니다. 지금도 그 눈물의 정체나 의미가 무엇인지 여전히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그때의 강렬했던 경험이 아마 제 청년•청소년활동의 시작이 되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간단한 개인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작년까지 유네스코 등 여러 공공기관과 시설을 통해 청소년•청년 활동분야 등에 종사했는데 은퇴하고 이제는 텃밭에서 즐거움을 찾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수확한 작물로 이것저것을 잘 해먹지는 못하고 그저 키우는 일에서 즐거움을 느낍니다. 이런저런 집수리도 하고 그저 풀들과 그리고 스스로와 끊임없이 타협하며 좋은 기분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강릉 쪽에 텃밭을 가꾸다가 동네 사람들과 친하게 됐어요. 그러다가 양양 쪽에 아예 집을 구해 고양시 중산동에서 소풍가듯이 즐겁게 지내고 있습니다. 일산에 일이 있으면 일산에, 텃밭에 일이 있으면 양양으로 갑니다. 친구놈들이 보면 약오를까봐 SNS에는 가급적 즐거운 일상을 잘 공유하지 않게 됩니다.
칠십이 넘은 제 친구들은 심심해 죽으려고 합니다. 제가 여기저기 놀러 다니는 것 같아 부러워합니다. 나이가 들기 전에 놀이가 되었든, 일이나 취미가 되었든 선택지를 많이 만들어 놓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 작년 5~6월에는 서핑을 배웠어요. 이게 남이 볼 때는 멋있어 보이지만 너무 힘듭니다. 탈 때는 멋있고 좋은데 파도가 와야 타는 거라, 체력적인 것도 힘들지만 파도를 기다리는 것도 제게는 힘듭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건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42년 동안 일하면서 어떤 사람이었나요. 그동안 일하면서 무얼 느끼고 배웠나요.
쉴 틈 없이 일했습니다. 선배가 후배가 동료가 시키는 일들, 부탁한 일들을 해내느라 끊임없이 쉬지 않고 일했어요. 돌아보니 저는 제법 성실하고 새로운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일을 하면서도 주체성을 많이 따졌습니다. 내가 여기서 새롭게 만들어낼 게 무엇일까가 주된 고민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새로운 사업을 개발하거나 맨땅에 헤딩하는 일들을 사람들이 내게 많이 맡겼던 것 같아요. 일을 하며 최대한 청소년, 청년의 이야기를 그들의 입장에서 들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과정에서 동반자로 함께하려면 친구들이 원하는 내용을 최대한 이해하고 있어야하니까.
❚이제 막 취업을 했거나 사회생활을 시작한 청소년에게 해줄 조언이 있다면.
최근 제 아들이 일본에 취업하러 갔습니다. 근로계약서를 보니 60세까지 정년이 보장되고 본인이 원하면 65세까지 일을 할 수 있게 해준다라는 문구가 명시되어 있었어요. 안정적인 직장이나 정년도 중요하겠지만 무엇이 되었든 제 아이들에게는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을 지어봐라’라는 말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뒤로는 애비 된 마음으로 구글검색으로 그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괜찮은 회사인지 탐정마냥 다 뒤져보았지만요. 하하하.
저는 이미 지난 사람입니다. 아비로서 물론 불안하고 신경이 많이 쓰입니다만, 그래도 자식들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해야하는 순간이, 결국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생각합니다. 다른 젊은 친구들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스스로 결정하라, 스스로 책임지고 스스로를 챙겨라’ 그러면 부모가 되었든 친구가 되었든 선후배가 되었든 어떤 형태의 관계이든 누군가는 반드시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말은 이렇게 해보았지만 지금 청소년, 청년들에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이미 지난 사람입니다.
❚은퇴 이후의 삶이 요즘 큰 화두입니다. 은퇴 이전과 이후 무엇이 바뀌었나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살아야하는 24시간은 굉장히 깁니다. 그 시간동안 나에 대한 생각도, 그리고 주위를 돌아보는 시선 역시 더욱 풍성해졌습니다. 전에는 일 생각이 먼저였습니다. 가족보다 일이 늘 먼저였으니. 요즘에는 풀을 뽑거나 텃밭농사를 하면서 명상 같은 걸 많이 하는데, 내가 진짜 앞만 보고 살았구나, 스스로와 주변 정리를 너무 안 하며 살았구나를 자각하게 됩니다.
또래들의 은퇴를 둘러보면, 저는 감사하게도 연착륙을 잘 한 것 같습니다. 갑작스레 명퇴를 당한다든가, 건강문제 등으로 불시착하듯이 일을 그만둔 경우 은퇴 이후의 삶을 고민해볼 겨를이 없어 이런저런 불협화음이 많이 생깁니다.
은퇴 전과 후는 내 사회적 명성이 달라집니다. 은퇴 전에는 내가 소속된 회사, 내가 제시하는 명함 하나로 많은 것들이 해결됩니다. 또 거기에 맞춰서 씀씀이도 있는 법인데, 은퇴를 하면 이 모든 것들이 거짓말처럼 싹 사라집니다. 본래 자신의 것인 줄 알았던, 당연하게만 여겼던 명성과 수입의 격차와 부조화를 견디기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급하게 투자를 한다든가 창업을 한다든가 해서 일상과 노후를 그르치는 안타까운 모습이 종종 있습니다. 은퇴 이후에는 오랜 시간 지탱해온 나의 삶의 방식과 기준뿐만 아니라 세상이 바뀝니다. 자기를 온전히 지켜나가기 위해 자기조절과 자기적응이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해진 것 같습니다.
❚남은 생애의 시간을 어찌 보낼지 계획이 있습니까.
나이가 있다보니 건강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치매 같은 일들이 있잖아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생기는 건강상의 문제를 제법 의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나뿐만 아니라 내가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최근에는 들과 밭, 바다에서 최대한 건강하게 지내는 시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게 내 계획의 전부입니다. 욕심을 부리자면 글을 좀 쓰고 싶은데 지금까지 여전히 노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못 쓰고 있습니다.
요새에는 다섯 시반 즈음 일어납니다. 시골에 있으면 닭이 새벽부터 엄청 우는데 그러면 정말 못 잡니다. 차를 타고 7시 즈음에 밭에 나가 있다가 점심은 동네사람들과 같이 먹습니다. 짜장면, 막국수, 강릉의 유명한 장칼국수 등. 농사짓는 사람들이 재미있는 게 밥은 대충 먹어도 커피에는 아주 일가견이 있어 좋은 카페만 요기조기 잘 찾아다니며 마십니다. 다시 3시부터는 밭에 있다가 5시가 되면 집에 돌아옵니다. 씻고 저녁 먹고 이런저런 소일을 하다가 10시 즈음 잡니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겨울에는 목공을 하려 합니다. 대추나무를 잘라서 소품을 만들어보려고요. 시골에서는 불편한 것도 있지만 반대로 제법 많은 것들이 가능해집니다. 밖에 이불을 들고 나가 시원하게 턴다든가 하는 일들 말이지요. 별 것 아니지만 도심이나 아파트에서는 할 수 없는 일들로 일상을 촘촘히 채워가고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다가올 노화와 죽음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있나요? 존엄하게 늙어 죽을 방법이 있을까요.
일흔 살이 넘고 나니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과 함께 자연스레 죽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다만 건강하게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2년 전에 전립선암에 걸려 죽은 선배가 있는데, 자기가 선택한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가 곡기를 끊고 일주일 뒤에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최후에 제 곁에 남을 사람이 가족이라면 그 사람들이 나의 죽음과 간병으로 힘들어지지 않길 바랍니다.
아직까지는 구체적으로 존엄하게 늙어죽을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일단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최대한 건강하게 늙어죽는다 라는 결심만 있지, 죽음에 대한 나의 전략이나 계획은 지금 없습니다. 죽음은 필연적이지만 동시에 모호합니다. 죽는 시간이 구체적으로 안 정해있으니, 어떻게, 어디에서 죽을지 하나도 정해진 게 없으니, 죽음에 대한 선명한 계획이나 전략을 짠다는 것은 저에게는 어쩌면 불가능에 가깝게 보입니다.
❚이거는 꼭 한번 해봐야하는데 싶은 일이 있나요.
없습니다.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게 제 나이에는 이제 욕심입니다. 나 혼자 잔잔하게 할 수 있는 일들을 빼고 누군가와 함께 해야 하는 일이라면 더 이상은 안하고 싶습니다. 제가 가꾸는 텃밭이 한 400평이 됩니다. 채소, 작물로 정원을 예쁘게 만들어서 제 처한테 바치고 싶습니다. 이 이야기를 했더니 씨익 웃더군요. 우리 부부는 사이가 좋습니다. 여성학을 전공했던 선배들이 부부 관계란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고 저한테 교육을 하도 시켜놔서 지금 제 처와 저는 동지와 같은 관계입니다. 크고 작은 일을 서로 상의하고 때로는 제가 야단도 많이 맞습니다만.
❚지난날의 젊은 전성민과 앞으로의 늙은 전성민 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요즘 시간이 많아지니 자연스레 옛날 생각을 많이 하며 많은 것을 용서하고 있지만, 동시에 스스로 부끄러웠던 순간이 많이 떠오릅니다. 자다가 이불을 걷어 찰 정도로. 예전에 내가 얼마나 잘 나가고 멋있었는지 보다는 ‘아! 그때 누구한테 좀 더 잘 할 걸. 그때 좀 더 열심히 해볼 걸’ 이런 생각이 주류입니다. 그럼에도 괴로웠든 싫었든 과거의 제 삶 역시 내 삶입니다. 젊은 전성민에게는 딱히 해줄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늙은 전성민에게는 욕심 부리지 말고 지금 늙어가는 내 몸과 기울어져가는 내 삶에 적응하며 즐겁게 살자라는 말을 해보고 싶습니다.
❚지금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요.
‘멋있다’라는 말이 듣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지금 가장 가까이서 나를 봐주고 있는 가족들. 내 아들, 딸아이, 마누라가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얼마 전 결혼기념일에 딸아이가 선물과 편지를 주었는데 사실 선물은 뭔지 기억이 안 나는데 써준 편지 첫말이 계속 기억에 남습니다. ‘존경하는 아빠’라는 문장으로 시작됐는데, 그걸 보니 기분이 좋으면서 이상했어요. 아이고, 무슨 가족끼리 존경 이런 말을 써! 내가 자식들한테 너무 엄하게 대했나? 내 딴에는 친구 같은 아빠가 되고 민주적인 가정을 이루려 했던 것 같았는데. 돌아보니 이것도 다 욕심이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