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35주년 기획] 그 시절 사람의 꿈과 고민은 뭐였을까… 신문 행간에서 찾아낸 응답들
응답하라, 고양 1989~1990⑩ 최종회
서울과 달랐던 “나는 고양 사람”이라는 정체성
대통령 한마디에 휘몰아친 ‘범죄와의 전쟁’ 열기
도시 풍경도 사람들의 욕구도 끊임없이 달라져
[고양신문] 창간 35주년을 핑계로 5회 정도 예상하고 시작했던 ‘응답하라 고양’ 연재가 어쩌다 보니 10회를 채우게 됐다. 시리즈를 쓰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우선 PDF로만 남아있는, 상태가 양호하지 않은 지면들을 한 장 한 장 확대해 읽어가며 기사 제목과 요점을 정리하고, 카테고리에 따라 분류하는 작업을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기초자료들을 들추며 주제별로 맥락과 연관성을 찾아내 몇 줄씩 기사를 채워나갔다. 그러다 보니 들인 공이 아까워 이 얘기도 저 얘기도 쓰고 싶어져 연재가 늘어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다분히 기자의 사적 취향에 경도된 연재를 한없이 이어갈 수는 없는 일. 이번 회에는 어떻게든 마무리를 짓자는 마음으로 마지막으로 지면 분류표를 들여다본다. 그런데 쓰지 못한 얘기들이 여전히 한 가득이다. 6개 구역 도시개발 과정의 갈등, 지방자치제도 도입을 맞는 혼란, 모순 가득한 그린벨트 정책, 향토문화에 대한 각성 등….
정신 차리자. 묵직한 주제들을 손대다 보면 또다시 한도 끝도 없어진다. 그러니 시대상을 보여주는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지막 연재를 가볍게 매듭짓도록 하자.
서울 사는 원당출신들 ‘모여라’
1990년 7월 첫 주 고양신문에는 ‘재경 원당읍민회 발족’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말 그대로 서울에 사는 원당읍 출신들이 한데 뭉쳐보자는 모임이다. 기사는 “그동안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각자의 삶에 충실하느라 잊고 지냈던 동향인들이 화합과 친목을 위해 첫 모임을 가졌다”고 전한다. 서울 서북부 유일의 대규모 특급호텔이었던 홍은동 스위스그랜드호텔 대연회장에서 열린 발족식에는 200여 명의 회원들이 모여 성황을 이뤘고, 이택석 국회의원, 백성운 고양군수도 참석해 축하 인사를 전했다.
지금이야 고양시를 서울과 외떨어진 지방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 리 없지만, 당시만 해도 고양군은 엄연히 서울과 전혀 다른 독자적인 정체성을 지닌 동네라는 의식이 강했던 것 같다. 따라서 서울에서 생활하는 고양군 출신들끼리 정을 나누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서로 챙겨주고 밀어줘야 한다는 정서를 바탕으로 1989년 재경고양군민회(회장 허석)가 출범하고, 1년 뒤에는 더 작은 단위인 원당읍민회까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발족식에서 이명주 초대 회장은 “우리 원당읍 옛 친구들이 하나가 되어 후배양성과 고향 발전에 적극적으로 노력하자”는 인사를 전했다. 아울러 소년소녀가장을 위해 써 달라며 70만원의 장학금을 신동영 원당읍장에게 전달했다. 신동영 읍장은 훗날 초대 민선시장에 당선되는 그 인물이다.
고향 농촌에서 땀흘린 대학생들
고양군을 서울과는 성격이 다른 지역으로 여겼던 당대의 인식은 고양신문 지면에 수차례 등장하는 대학생 농활(농촌활동) 기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농촌인구 자체가 줄면서 ‘농활’이라는 단어도 듣기 어려워졌지만, 80~90년대에는 농촌의 일손을 돕기 위해 대학생들이 곳곳으로 농활을 가곤 했다. 물론 일부에서는 당시 운동권 학생들에 의해 주도된 ‘농활을 빙자한 의식화 행사’라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지만 말이다.
서울에서 가까우면서도, 농촌의 풍경과 정서가 오롯한 고양군도 농활의 무대였다. 1990년 7월 고양신문을 보면 고양군대학향우회(회장 김범수, 이하 고대향)에 속한 20여 명의 대학생들이 6박7일이라는 긴 일정으로 송포면 법곳리에서 하계 농활을 진행했다. 이들은 낮 동안 농촌 일손을 부지런히 돕고, 해가 진 후에는 아이들을 모아 학습지도를 하고, 주부반과 장년반 등의 모임에 참여해 농촌현실을 배우는 바쁜 일정을 보냈다. 마지막날 저녁에는 마을 주민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마을잔치로 고단하고 보람찼던 일정을 마무리했다.
당시 고대향을 이끌었던 김범수 회장은 고양시의원을 역임한 후 자치도시연구소장으로 활동하며 지역에 대한 깊은 애정을 이어오고 있다.
다른 색깔로 열린 2개의 걷기행사
오늘날 고양시에서는 크고 작은 걷기행사가 자주 열린다. 10여 년 전 고양누리길 14개 코스가 잘 정비됐고, 무엇보다도 걷기행사를 치르기에 딱 좋은 환경과 크기를 지닌 일산호수공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람누리길도, 일산호수공원도 없던 34년 전에도 고양에서는 걷기 행사가 종종 개최됐다. 기자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1990년대 초부터 불기 시작한 남북 화해무드를 타고 ‘평화통일 염원’ 등의 구호를 내건 걷기행사, 또는 인간띠 잇기 행사가 통일로 일원에서 열리곤 했었다.
흥미롭게도 1990년 5월 고양신문 지면에는 2개의 걷기행사 기사가 한 지면에 나란히 실렸다. 하나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출범 1주년을 기념해 열린 ‘온나라 걷기대회’다. 전국에서 동시다발 릴레이로 진행된 행사에 전교조 고양·파주지회도 동참한 것. 주최 측은 대회 자체를 무사히 치를 수 있을지 걱정해야 했다. 같은 날 오전 파주 임진각에서 진행된 행사 일부가 경찰에 의해 원천봉쇄되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고양에서는 별다른 충돌 없이 해직교사와 학생, 학부모가 함께 어울려 원당주공아파트에서 출발해 리스쇼핑과 고양군교육청 등 원당 시내를 통과하는 코스를 함께 걸었다.
또 하나는 앞선 행사 바로 다음날 열린 ‘청소년을 위한 범군민 걷기대회’ 기사다. 가정의 달을 맞아 청소년 문화교육단체인 (사)B·B·S고양군지부(지부장 송용운)가 주최한 이 행사에는 무려 2500명의 학생들이 참가해 내유초등학교에서부터 벽제 건전체육공원까지 4㎞를 걸었고, 국회의원과 고양군수, 고양경찰서장 등 내로라하는 내빈들이 몰려와 모범청소년 표창과 시상에 참여했다.
기사에는 두 행사의 관련성을 설명한 내용이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래도 보수 교육계가 전교조 열기의 확산을 억누르기 위해 맞불 성격의 걷기행사를 대대적인 규모로 기획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된다.
가슴 뛰게 타올랐던 평화의 염원
앞서도 언급했지만, 1990년은 국제정세 변화와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으로 인해 남북관계에 급격한 훈풍이 불던 시기였다. 이러한 변화는 접경 배후지역 고양군에도 설레는 기대감을 불러왔다. 8월 고양신문에는 관공서 창구 앞에 사람들이 몰려있는 사진 아래 ‘줄 잇는 방북신청’이라는 단신기사가 실렸다. 정부가 광복절을 맞아 ‘민족대교류기간’을 선포했고, 고양군에서도 이산가족의 방북신청접수창구가 열려 3일 만에 300명이 넘는 신청자가 접수를 마쳤다.
9월에 실린 또 다른 사진뉴스의 제목은 ‘상호 신뢰의 장 구축하는 장도이기를!’이다. 남북한 총리회담을 위해 판문점을 통과해 통일로를 따라 남쪽으로 달려온 ‘북의 손님들’이 경찰 오토바이의 호위를 받으며 삼송리 숫돌고개를 넘어 동산리로 들어서는 장면이다.
그런가 하면 한 해가 저물어가는 12월에는 남과 북의 평화를 염원하는 파주 오두산의 크리스마스트리가 환하게 점등된 사진을 게재했다. 34년이 지난 오늘날, 평화의 불빛이 반짝였던 곳에서는 요란한 스피커 소음만이 귀를 때리고, 어렵사리 닦아놓은 연결도로가 폭파되는 험악한 풍경을 목도하고 있는 심정이 착잡하기만 하다.
고양군 최초 고층아파트는 12층
7월 셋째 주 신문에는 ‘고양군 최초 고층아파트 분양’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에이스주택건설(주)이 일산읍 탄현리에 짓게 되는 ‘에이스 8차 미주아파트’다. 24평과 34평형 2개 동 179세대 규모인 이 아파트는 가동과 나동이 각각 8층, 12층으로 설계됐다. 그동안 5층 아파트가 최고 높이였던 고양군에서 ‘최초 고층아파트’라는 칭호를 부여받게 된 것이다. 1991년 9월 입주 예정인 아파트의 평당가격은 164만원으로, 24평형이 약 4000만원, 34평형이 약 5600만원이다.
참고로 9월 첫 주 고양신문에 따르면 고양군 자체 택지개발사업 5개 지역 중 1990년 6월 가장 빨리 기공식을 가진 성사지구 아파트의 평당 분양가는 150만원 선으로 발표됐다. 34년 동안 아파트 가격이 얼마나 올랐는지를 짐작케 한다.
외곽순환도로, 일산선전철 밑그림
90년대는 오늘날 고양시의 주요 교통망이 설계되고 완공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전 상황을 살펴보면, 서울과 코닿을 거리인데도 고양군의 교통여건은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인구는 부쩍부쩍 느는데, 곳곳이 비포장 상태였던 도로들은 70년대에서 멈춰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산신도시와 6개 택지개발지구 사업이 동시에 출발하면서 교통망의 확충에도 가속도가 붙었다. 우선 분당과 일산 등 수도권 5개 신도시를 연결하는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현 수도권제1순환도로)가 설계돼 1991년 말 착공할 것이라는 계획이 발표됐다. 이름 그대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고리 모양으로 원형으로 감싸고 도는 신개념의 고속도로였다.
1990년이 저물어가는 12월 24일에는 철도청이 일산신도시의 핵심 교통망인 일산선 전철의 9개 역을 확정했다고 발표한다. 하지만 이날 발표된 일산선 노선도는 오늘날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최초 노선에는 삼송역에서 화정역으로 논스톱 연결되는데, 잘 알다시피 이후 주민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원당역으로 우회했고, 중간에 원흥역도 신설됐다. 화정을 지나서는 지금과 거의 유사한 코스를 지나지만, 역명은 대부분 바뀌었다. 최초의 노선도에 등장하는 ‘대장역’, ‘내곡역’은 대곡역으로 합쳐졌고, 마두역은 ‘장항역’, 정발산역은 ‘시청역’, 주엽역은 ‘문촌역’, 대화역은 ‘장본역’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던 것으로 보인다. 일산신도시에서 최초 계획도와 현재의 역명이 일치하는 전철역은 백석역이 유일하다.
일찌감치 구상됐지만, 한참이나 늦게 실현된 교통계획도 있다. 바로 경의선 전철화 계획이다. 1990년 6월 고양신문 1면에는 “3호선 전철 일산선 연장만으로는 일산신도시 교통량을 소화할 수 없다”는 일산신도시 교통영향평가 심의회의 의견을 근거로 ‘서울역~일산 전철 92년 착공 예정’이라는 기대 섞인 기사가 실렸다. 이와 함께 ‘수색에서 일산에 이르는 도로의 8차선 확장’ 소식도 전했다. 이 중 후자는 계획대로 착공돼 고양시 남부를 관통하는 주요 도로인 ‘중앙로’가 됐지만, 경의선 복선전철화는 수차례 미뤄지다가 2009년에야 비로소 실현된다.
고양에서도 요란했던 ‘범죄와의 전쟁’
‘범죄와의 전쟁’이라고 하면 하정우와 최민식이 주연한 영화의 수많은 명장면들이 자동으로 떠오른다. 잘 알다시피 영화의 제목은 노태우 대통령이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다”고 밝힌 ‘10·13 특별선언’에서 따왔는데, 그 해가 바로 1990년이다. 민주사회 기틀을 위협하는 불법과 무질서를 추방하고, 과소비와 퇴폐·향락을 바로잡겠다는 명분이었다. 임기 후반기로 접어들며 국정동력이 소진돼가는 대통령이 정국 전환용으로 뽑아든 카드였다고 해석되지만, 동시에 이 조치를 계기로 대한민국의 치안상황이 실제로 좋아졌다는 긍정적 평가도 공존한다.
대통령의 특별선언에 대한 공조직의 반응은 신속했다. 특별선언 4일 만인 17일에 고양군수와 군·읍·면 공무원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범죄무질서 추방 결의대회’가 열렸다. 일주일 뒤에는 고양군여성단체협의회(회장 이순득) 산하단체 회원들이 야간시간에 원당읍내를 돌며 ‘범죄환경 추방과 퇴폐행위 근절’ 캠페인 활동을 펼쳤다. 연말까지 지속된 릴레이 캠페인에는 미용사회, 주부교실, 한국부인회, 전몰군경부인회, 고양YWCA, 적십자부녀회, 새마을부녀회, 부녀의용소방대, 학교어머니회 등이 대거 참가했다.
뿐만 아니라 고양경찰서와 관련된 방범위원회, 청소년선도위원회, 교통봉사대, 모범운전자회 등이 참여한 ‘범죄신고 강조’ 가두 캠페인을 펼쳤고, 식당과 유흥업소, 다방, 숙박시설, 목욕탕, 오락실 운영자들은 ‘새생활 새질서 실천 결의대회’로 정부의 기조에 호응했다.
당시 온 사회가 들고일어나야 할 만큼 심각한 불법과 무질서의 요인들이 과연 고양군에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실체적인 추방의 대상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누구를 막론하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지금으로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시대적 강박이 많은 이들을 사로잡고 있지는 않았을까.
무질서한 질서운동의 아이러니
이처럼 고양시의 공직사회와 관변조직, 민간단체들이 일제히 나서서 ‘무질서 추방’을 외쳐대자, 이러한 비정상적 상황이 오히려 무질서를 조장하는 것 아니냐는 아이러니한 비판도 제기됐다. 12월 셋째 주 고양신문 1면에는 ‘무질서한 질서운동’이라는 제목과 함께 고양군 거리 곳곳에 ‘범죄추방, 질서운동’ 플래카드가 어지럽게 걸려있는 사진이 여러 장 게재됐다.
고양신문은 기사를 통해 현수막 위에 또 현수막을 경쟁하듯 매달고, 전기선이나 전화선 등과 보기 흉하게 뒤엉켜있고, 캠페인 동참을 빌미로 가게이름을 홍보하는 상황을 지적하며 “평소 엄했던 관청의 단속이 필요하면 관대해지는 거냐”고 꼬집었다. 그렇듯 요란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구호와 함께 1990년이 저물어갔다.
고양의 과거-현재-미래 보여주는 석 장의 사진
마무리 원고를 정리하며 최근 찍은 석 장의 사진을 나란히 비교해보았다. 첫 번째 사진에는 주교동 마상공원다리에서 내려다본 원당의 모습이 담겼다. 나지막한 저층빌라와 상가가 밀집돼 있는 구도심을 높게 솟은 신축아파트와 빌딩들이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1990년대 초까지 고양군의 중심지였던 원당은 쇠락해가는 구도심을 오랫동안 껴안고 있다가, 길고도 복잡한 진통을 거치며 일부 재개발·재건축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두 번째 사진은 경제자유구역 주민설명회를 취재하러 찾아간 백석업무빌딩 20층에서 찍은 백석동 일대의 모습이다. 드넓은 한강변을 따라 반듯반듯하게 구획된 신시가지가 수평으로 조성돼 있다. 어느덧 탄생 30년을 넘긴 일산은 이제 ‘신도시’가 아닌, 상향된 용적률의 숫자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노후계획도시’라는 명칭을 안게 됐다. 과연 일산의 새로운 변신은 어떤 방식으로 실현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 세 번째 사진은 최근 개관한 고양 장항습지생태관 전망대에서 바라본 장항동 들녘이다. 일산신도시를 개발하며 비워두었던 너른 대지는 인간의 공간과 자연(한강)의 공간을 구분하는 완충지이기도 했고, 도농복합도시 고양의 보루이기도 했다. 하지만 일산테크노밸리와 방송영상밸리, K-컬처밸리, 경제자유구역 등 각종 개발사업의 청사진이 연이어 그려지고 있는 이곳은 고양의 내일을 견인할 미래의 땅이 됐다.
누군가에게 보낸 호출신호 “응답하라”
세 장의 사진을 나란히 비교해보면, 도시의 모습은 과거에도, 오늘날도, 그리고 미래에도 끊임없이 변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오래전 발행된 고양신문 지면들을 도구 삼아 35년 전 고양에 살았던 누군가에게 “응답하라”는 호출신호를 보낸 이유도 마찬가지다. 풍경뿐만이 아니라 그 공간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구와 생활양식 역시 끊임없이 변모해온 맥락을 정리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다음 기회가 주어진다면 30년 전, 25년 전, 20년 전 누군가에게도 조심스레 호출신호를 보내보고 싶다. 그때 고양시 모습은 어땠는지, 그때 고양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갈등했는지, 무엇 때문에 희망을 꿈꾸었는지, 고양신문 기사의 행간을 통해 응답해달라고 말이다.
◆ 그동안 <응답하라 고양 1989~1990> 연재를 읽어주시고, 피드백을 해 주신 여러 독자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