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이어지는 이웃과 함께하는 꿈 "문화 넘치는 동네 됐으면"
나경호의 사람도서관 (19) 김미화 이랑서점 대표 (83년생)
[고양신문] 학업, 취업과 창업, 더 나은 미래와 기회를 위해 서울로 삶의 중심을 옮기는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습니다. 덕분에 전국 곳곳의 공간들은 비워지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더욱 희미해지는 것 같습니다. 고양시도 예외는 아닐 겁니다. 그럼에도 일산서구 가좌동에는 다양한 작물들을 키워내는 밭의 이랑처럼 다채로운 주민들이 모이는 지역서점이 있습니다. 동네라는 단어가 희미해진 요즘, 지역서점을 운영하는 한 아이의 엄마에게 지역에 정착하기 위해 어떤 고민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들어봤습니다.
❚어린 시절의 풍경은 어떠했나요.
초등학교 2학년 때 가족들과 외삼촌 외숙모가 살던 곳 근처, 서울 석촌호수에 놀러간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 풍경과 기억이 지금도 기분 좋게 떠오릅니다. 저는 엄마가 사준 빨간색 투피스를 입고 있었어요. 무릎까지 오는 빨간 치마에 하얀색 블라우스, 하얀색 스타킹. 예쁜 옷을 입고 가족들과 평화롭게 산책하던 날이었는데 지금도 그때 사진이 남아있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누구의 생일날이라거나 명절날 등 친척들과 만날 기회가 많았는데 이제 어른이 되니 다 같이 만나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저는 아빠, 엄마, 나, 한 살 차이 남동생과 서울 신림동에 살았어요. 제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부모님은 충남 홍성으로 일 때문에 내려가고 동생은 그때 부모님과 같이 내려가 대학 졸업 후 부모님의 일을 도왔습니다. 대학 3학년 때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졌습니다. 그때 동생은 군대에 있었는데 휴가를 나오면 번갈아서 어머니를 간호했던 기억이 납니다. 엄마의 병환에 집중해서일까 동생도 그렇고 가족들 간 근황을 서로 묻거나 가깝게 지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어요.
가족 간 대화가 많이 없었지만 돌아보니 저는 부모님에게 사랑을 많이 받고 살았습니다. 부모님 덕에 유학도 다녀오고 그렇게 하고 싶어 했던 미술과 영화도 실컷 공부하고 온갖 혜택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당시 저는 그냥 저희 집이 잘 사는 줄 알았어요. 아이를 낳아 키워보니, 부모님이 내 뒷바라지를 하며 동시에 생계를 꾸리셨던 게 참 힘들었겠구나 라는 생각을 최근에서야 하게 됐습니다. 부모님 덕분에 저는 지금까지 커다란 구김 없이 평화롭게 살았고 그렇게 저는 미대 나온 여자가 됐으며 한 아이의 엄마이자 책방지기가 됐습니다.
❚ 간단한 개인소개와 서점소개 부탁드려요.
지금 제 삶이 너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83년생 41살. 일산서구 가좌동에서 '이랑'이라는 이름으로 지역서점을 운영하고, 송포초등학교 1학년 8살 여자아이의 엄마입니다. 그림을 최근에는 못 그리고 있지만 여전히 좋아합니다. 그림전시 보는 것도 좋아하는데 일산으로 이사 오고 아이까지 있으니 전시를 접하기 어렵습니다. 그림은 꼼꼼하게 그리는 편이지만 제 삶과 집은 정리정돈을 잘 못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저희 집은 늘 지저분한 편이에요.
서점 이름 ‘이랑’은 ‘책이랑 그림이랑’을 뜻하는 이랑입니다. 이랑은 무언가를 이어주는 접속사입니다만, 동시에 무언가를 심고 피워 낼 수 있는 이랑의 의미도 얼마 전 생겨났어요. 그래서 최근에는 ‘함께’라는 의미가 더욱 커진 것 같습니다. 혼자 있어도 좋은, 함께 있어도 좋은 동네서점 이랑은 바로 옆에 가좌공원이 있어 일상에서도 쉽게 쉼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에요. 최근에는 이랑이 자리한 거리에 전시공간이나 공방 등 문화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이 많아지길, 그래서 문화가 넘치는 거리가 되길 희망하며 하루하루 서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서점을 하기 전에는 어떤 일을 했나요.
어느 날 남편이 말했어요. 둘 중 하나는 영화 말고 돈을 벌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래서 돈은 제가 벌기로 하면서 영화일을 그만두었고, 26살 때 미술학원에서 일을 하다 탄현에서 미술학원을 하던 제 친구한테서 학원을 인수했어요. 그때 당시 저는 미술학원장이 되고 싶었어요. 내가 번 돈을 내가 전부 다 갖고 싶어서! 너무 탐욕스럽게 들렸나요? 당시 학원이 탄현 9단지에 있었는데 무척 잘 됐습니다.
대화 성저마을로 학원을 옮기자마자 얼마 안 되어 임신을 했어요. 아이를 엄청 기다렸거나 노력한 건 아니었지만 아이가 잘 생기지 않아 파주에서 용하다는 한의원에서 한약을 먹고 피가 잘 돌았는지 한두 달 사이에 아이가 생겼습니다. 아이를 낳고 잠시 다니던 교회 독서모임과 그림모임에 나갔는데 안전한 공간에서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가 잘 받아들여지는 느낌이 너무 좋았어요.
이후 책을 통해 전달받은 느낌과 나의 고민을 말할 수 있는 곳을 찾지 못하다가, 친구를 통해 독립서점이라는 곳에서 비슷한 유형의 프로그램을 많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손님이 없으면 내 작업실처럼 쓰고, 손님이 오면 내가 치유 받았던 독서모임처럼 운영하고 싶어 책방을 차렸습니다.
독립서점이라는 곳도, 서점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프로그램도 전혀 모른 채 서점을 운영하면서 책, 그림, 글은 배운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 누구와도 서로 다 연결되는 지점이 있네! 책과 그림, 글로 누구라도 행복할 수 있네! 라는 깨달음을 얻고 사람들과 이 깨달음을 같이 공유하고 싶어졌어요. 지금도 이랑을 글도, 그림도, 책도 문턱을 더 낮게 만드는 그런 서점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서점을 열고나서 삶이 어떻게 달라졌나요.
서점을 열고 생각의 중심이 가족에서 책으로 넘어왔어요. 아이를 교육하거나 관계 맺을 때 책으로 무얼 할 수 있을지, 나의 일상을 가꾸거나 산책을 하거나 동네이웃들을 만날 때에도 자연스레 책으로 무얼 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됩니다. 책방을 열고나서 사람들에게 더 좋은 영향을 주고 싶은데, 서점을 통해 너무 저만 효용과 혜택을 많이 누리는 것 같아 조금 아쉽습니다.
서점을 열고나니 제가 책을 팔아서 무얼 하고 싶기보다는 이제 보니 사람들을 위한 작은 도서관을 하고 싶어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어요. 그전까지는 작은도서관이라는 존재조차 몰랐지만. 마을에서는 커다란 공립도서관, 작은도서관, 지역서점, 독립서점 이 모든 게 하나의 생태계로 연결되어 주민들의 삶을 가꾸어 나간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지나고 보니 또 해보고 나니 알게 되는 게 하나둘 많아집니다.
❚어떤 분들이 이랑서점에 자주 오나요.
동네인 가좌마을 주민분들이 많이 옵니다. 가좌동주민자치회가 진행한 '가좌동 어디까지 가봤니?'라는 모임 기간이 끝나 사적모임으로 전환된 후 당시 모임 참가자들이 많이 옵니다. 그들과 서점에서 플리마켓도 하고 텃밭을 가꾸기도 하고, 지난 여름에는 감자를 키워서 나눠먹기도 했어요. 플리마켓을 통해 발생한 수익으로는 책을 구입해 서점에 온 동네 청소년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하는 일도 하고 있어요. 서점 초창기 때부터 있어왔던 독서모임, 어반스케치 모임, 아티스트 웨이 모임 분들도 계속 모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서점에 자주 드나들며 오래 활동하면 서로 자연스레 친구를 사귈 수 있으니 자주 오는 것 같습니다.
❚ 지역서점은 마을과 지역에 어떤 영향을 주는 공간인가요.
가좌동에 오래 사신 분들 중 다른 동네에서 독립서점을 경험하신 분들은 이런 서점이 마을에 생기길 손꼽아 기다렸다는 분들이 많아요. 동네서점은 지역에 보이지 않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데 이 영향은 정말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서점에서 다루는 글과 책은 전부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가고, 서점을 통해 마주친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천천히 은은하게 다양한 형태로 지역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 밖에도 서점에서 북토크를 진행하면 동네주민들이 좋아하는 작가들을 직접 만나 작가의 내면과 이면을 알 수 있게 되는 기회가 생깁니다.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북토크의 관계는 1회성이 많은데, 동네서점에서는 작가님들도 서점에 온 주민들과 서로 친구와 이웃이 될 수도 있습니다.
❚ 이랑서점이 어떤 서점이 됐으면 좋겠나요.
가좌동에서 제 몸이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오래오래 이 서점이 동네에 있으면 좋겠습니다. 최근 저희 모임 중 한 분이 이 동네를 떠나 더욱 시골로 내려가신다고 했어요. 서울이나 더 번화한 곳으로 간다 했으면 강하게 말렸을 텐데 하필이면 더 시골로 간다니. 여기도 시골인데 얼마나 더 시골로 가려는지. 그때 떠난다고 하니 마음이 서글퍼졌습니다. 우리 모두가 결국 언젠가 헤어지게 되어 있다는 걸 익히 알고 있지만. 그래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떠나지 않고, 헤어지지 않는 그래서 오래오래 올 수 있는 서점이 되면 좋겠습니다.
❚지금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책방에 오는 분들께 “너랑 있으면 기분이 너무 좋아”, “이랑에 오면 기분이 좋아”라는 말이 듣고 싶어집니다. 그렇게 동네사람들과 늘 같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가족한테도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냐고요? 가족은 당연히 저를 좋아하겠죠. 동네서점에서는 책을 읽고 단순히 감상을 나누는 게 아니라 자연스레 마음을 나누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서로 주고받았던 관계가 끊어지면 이전에 이어왔던 대화와 서로에 대한 애정이 마음 한편에 계속 남아 그때는 조금 많이 서글퍼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