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의 젊은이들에게서 찾은 희망… “판 뒤집혔구나, 탄핵 되겠다!”

[특별인터뷰] 류태선 목사, 고양비상시국회의 상임지도위원

2024-12-12     유경종 기자

70대 시민사회운동가가 겪은 계엄령의 밤
사태 예견하고 일찌감치 ‘윤 퇴진운동’ 앞장
“탄핵 후 선거법·정당법 제도개혁 이어져야”

서울 창덕궁 인근에 자리한 '긴급조치사람들' 사무실에서 만난 류태선 목사. 

[고양신문] 지난 3일 밤, 전 국민을 경악케 한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로 인해 대한민국은 혼돈의 한가운데로 빨려들고 말았다. 위기의 순간, 민주주의를 지켜낸 건 한밤중 국회 앞으로 달려온 시민들이었다. 

시민들의 민주적 역량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앞장서 간 이들이 험한 시간을 견디며 디딤돌을 놓아준 덕분이다. 이를 방증해줄 시민사회 원로 중 한 명이 류태선(71세) 목사다. 류 목사는 서울대 외교학과 3학년이었던 1975년 5월, 박정희 유신정권이 휘두른 가장 폭압적인 포고인 ‘긴급조치 9호(1975년 5월~1979년 12월)’에 의한 첫 시국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이후 50여 년 세월 동안 기독교계와 재야를 넘나들며 진보·민주 운동의 험한 길을 올곧게 걸어왔다. 

10여 년 전 고양의 이웃이 된 후 다양한 시민활동에 힘을 보탰다. 특히 지난해 봄 윤석열 정권의 반민주적 폭정 종식을 목표로 한 ‘고양비상시국회의’를 출범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류 목사를 만나기 위해 그가 상임이사로 일하고 있는 ‘(사)민주·인권·평화를 실천하는 긴급조치사람들(이하 긴급조치사람들)’ 사무실을 찾았다. 서울 안국역 인근의 오래된 빌딩 2층에는 전국비상시국회의, 6월항쟁기념사업회, 국민주권연구원 등 다양한 단체들이 칸칸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창밖으로 창경궁 돌담이 건너다보이는 작은 사무실에서 류 목사는 담담하면서도 강직한 말투로 분노와 희망을 얘기했다.

[사진제공=류태선 목사]

어떤 상황에서 비상계엄 소식을 들었나.

3일 낮에는 올해로 50주년을 맞는 여러 민주단체 관계자들과 기념사업을 논의했고, 저녁에는 지인들과 함께 활동하는 노래동아리 ‘60플러스 기후행동 방탄노년단(BTN)’의 연습에 참여했다. 평범한 하루를 마치고 지하철을 타고 백석역으로 귀가하던 중 지인의 전화를 통해 계엄 선포 소식을 들었다. 귀를 의심했지만 현실이었다. 많은 이들이 국회 앞으로 달려간다는 메시지를 전해왔다. 나는 여의도로 가지는 못했고, TV로 상황을 지켜보며 SNS로 다급한 의견을 나누며 밤을 지새웠다.   

이후 어떤 일정을 보냈나.

5일에는 공동대표로 참여하고 있는 ‘윤석열 폭정 종식을 촉구하는 1만인 그리스도인 선언’에 동참한 이들과 함께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보름 전부터 진행해 한겨레신문에 전면광고로 게재한 서명에는 8700여 명 그리스도인들이 이름을 올렸다. 돌아보니 지금과 같은 파국의 상황이 곧 오리라는 것을 미리 예견한 듯하다. 

첫 탄핵안이 상정된 7일에는 일찌감치 국회 앞으로 가서 늦은 시간까지 탄핵안 표결 여부를 지켜봤다. 국민의힘 퇴장으로 표결이 불성립된 후에는 고양비상시국회의 멤버들과 만나 논의를 이어갔다.

9일에는 ‘민주단체 활동 5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50년 전인 1974년은 시대의 어둠을 뚫고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분출하기 시작한 해였다. 한국교회인권센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민청학련동지회, 한국작가회의, 자유언론수호투쟁위, 4·9평화통일재단 등이 같은 해에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이렇게 뜻깊은 시간에 계엄령 사태를 맞게 된 현실이 아이러니하다. 

'윤석열 폭정종식 그리스도인 모임 출범예배'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류태선 목사. [사진제공=류태선 목사]

첫 번째 탄핵안이 무산됐는데.

제 정신을 가진 국민이라면 누구나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계엄령을 내린 대통령은 물론 아무런 명분도 없이 표결에 불참한 국민의힘 의원들도, 여러 번 입장을 바꾼 한동훈 대표도 참으로 간교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깜짝 놀랄 희망도 보았다. 평생 수많은 집회 현장을 경험했지만, 지난 토요일처럼 엄청난 젊은이들이 쏟아져나와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유와 민주를 외치는 광경은 처음 보았다. 놀랍고 기뻤다. 완전히 판이 뒤집히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오늘은 아니지만 시간문제다. 다음 주말에는 탄핵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야당들의 대응은 어떻게 보았나. 

이후 이어진 상임위 활동 등을 통해 요소요소에 숨어있는 2차 비상계엄의 위험한 뇌관들을 착착 뽑아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국회의원 개개인의 역량이 높아진 측면도 있고, 야당 내부의 세력 정비가 잘 된 결과로도 보인다. 

무엇보다도 줄줄이 나오는 내란 가담자들의 고백이 언론을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된 덕분에 많은 시민들이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게 됐고, 민주주의를 거스른 행위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적도 이어지고 있다. 이제 여당 의원들도 버티기 힘들 것 같다.

2차 탄핵을 앞둔 시민사회의 움직임은.

가장 큰 과제는 주체가 둘로 나뉜 광장을 하나로 합치는 일이다. 크게 보면 시민세력인 ‘촛불행동’과 노동운동세력인 ‘민주노총’, 두 개의 집회가 따로따로 열려왔다. 하지만 일반 시민들은 주체가 중요하지 않다. 윤석열 퇴진이라는 하나의 목적 아래 단일대오를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를 나부터 양쪽 그룹에 계속 전달해왔고, 논의가 진행 중이다. 이번 주말에는 광장이 하나로 통합되리라 기대한다. (※ 인터뷰 다음 날인 11일, 류태선 목사가 예고한 대로 1549개의 노동·시민운동 단체가 함께 참여하는 ‘윤석열 즉각 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 출범했다.)  

지난해 4월 윤석열 퇴진을 외치며 출범한 고양비상시국회의 기자회견 모습. [사진제공=류태선 목사]

 

성급한 질문이지만 윤석열 정권 이후의 개혁과제는 무엇일까.

시급한 것이 정당법과 선거법 개정이다. 거대양당 독식을 벗어나 다양한 소수 정당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대통령선거에서는 결선투표제를 반드시 도입해야 한다. 그래야 사표에 대한 우려를 털고 각자의 소신대로 선택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제도개혁을 실현하는 과정에는 일정 부분 민주당의 양보가 필요하다. 

또한 AI혁명에 대한 지혜로운 대처, 기후위기 시대에 걸맞은 패러다임의 변화, 남북관계의 공존 추구 등 다음 정권이 감당해야 할 과제와 책임이 너무도 크다.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시민사회가 합리적인 조정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젊은 시절 겪었던 박정희 정권과 윤석열 정권을 비교하면. 

둘 다 말도 안 되는 정권이지만, 박정희는 실질적 힘이 있는 독재자라 정말 두려웠다. 그래서 저항하는 이들도 목숨을 걸어야 했다. 반면 윤석열은 너무도 무식하고 무례한 행태를 보여 두렵다기보다는 한심하고 혐오스러웠다. 한마디로 21세기에 절대로 탄생해선 안 되는 정권이 괴물처럼 나타난 느낌이었다. 그래서 취임 초부터 ‘임기 끝까지 못 가겠구나’ 싶었다. 물론 이번처럼 급발진해서 자폭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비상 시국을 맞은 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은 시민들이 정치에 관심 안 둬도 내 삶은 잘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번 계엄선포와 탄핵국면은 정치상황의 변동이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해 준다. 
정치는 특정인만의 것일 수 없다. 윤석열이라는 과제를 누가 해결해야 할까. 누군가는 추운 거리로 나가는데, 누군가는 지켜보며 누리기만 할 것인가. 모두가 책임을 나누어 감당하는 ‘N분의 1’ 힘들을 모아 우리가 꿈꾸는 멋진 나라를 함께 만들어가자.

[사진제공=류태선 목사]

“고양 시민사회, 남북 상생의 미래 꿈꾸며 다시 도약하자”

[류태선 목사가 걸어온 길] 

새문안교회 대학생회에서 사회문제 눈 떠 
‘긴급조치 9호’ 위반 첫 시국사건으로 옥고 
민주시민운동, 교회개혁운동 넘나들며 헌신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 전환을 촉구하는, 각계원로 외신기자회견에서 입장문 낭독하는 류태선 목사(2024. 10. 14) [사진제공=류태선 목사]

상임이사로 활동하는 '긴급조치사람들'은 어떤 단체인가. 

1975년에 선포돼 박정희 정권 마지막 4년 동안 유지됐던 ‘긴급조치 9호’로 인해 감옥에 가거나 희생을 당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파악된 인원이 400여 명, 단톡방에 들어와 있는 멤버들은 170여 명이다.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이들도 여럿이고, 일부는 지금도 민사·형사소송이 여전히 진행 중이다. 단순히 젊은 시절의 민주화운동을 기억하기 위한 모임이 아니다. 이름 그대로 민주, 인권, 평화를 위한 활동을 50년 전과 동일한 마음으로 해 나가려고 한다.  

젊은 시절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다. 처음 사회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한국 개신교 모교회를 자처하는, 예장통합 교단 새문안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자랐다. 그런데 70년대 초 새문안교회 대학생회는 전태일 열사의 분신 등의 영향을 받아 각 대학, 또는 각 교단 기독교 청년운동의 본거지 역할을 하게 될 정도로 굉장히 의식화되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대학 1학년 때 교회 학술세미나를 마치고 ‘유신철폐’를 외치며 횃불행진을 하다 연행돼 처음으로 유치장 신세를 진 게 시작이었다. 이후 긴급조치 9호 이후 첫 시국사건인 서울대 ‘오둘둘 사건’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고, 학교에서 제명됐다가 81년 늦은 나이에 졸업했다.

기독교 사회활동을 시작한 계기는.

군대로 불법징집돼 3년을 채우고 제대해 갈 곳 없는 신세가 됐을 때 기독교장로회 교단에서 운영하는 임시신학교인 ‘선교교육원’을 알게 됐다. 이곳에서 안병무, 서남동, 문익환 등 민중신학의 태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소중한 인연은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 사무실을 두고 있던, 기독청년운동의 센터 역할을 했던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EYC)’와의 만남이었다. 그곳에서 실무간사를 거쳐 회장으로 일했다. 다른 시민단체들이 모두 숨을 쉬지 못하고 있던 전두환 정권 하에서도 그나마 기독교라는 기댈 언덕이 있어서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85년부터 87년까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 인권위원회에서 정치적으로 구속된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목요기도회’를 매주 진행했다. 아울러 한주간의 인권 소식을 담은 <인권소식>을 매주 편집·발간하는 작업을 내가 담당했다. <인권소식>은 엄청난 시국사건이 연이어 터진, 당대 민주화운동의 자취를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다.

윤석열 폭정 종식 촉구 기독교 목회자 1000인 시국선언. [사진제공=류태선 목사]

목회자가 된 것은 언제인가.

89년, 36살 늦은 나이에 예장통합교단 장로교신학대에 입학했다. 신학교에서는 ‘열린신학 바른목회연구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기복과 번영을 추종하는 목회를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과 소통하는 열린 목회, 제대로 된 목회를 하자는 뜻이다. 고맙게도 그 모임이 지금도 장신대 안에서 이어지고 있다.  

대학원 마치고 목사 안수 받은 후에는 교단 총회본부 사회부에서 8년간 총무로 일했다. 이 때 교회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지침을 문서화하고, 식량난을 겪고 있는 북한에 비료와 식량을 지원하는 일을 활기차게 벌였다. 북한의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을 파트너 삼아 북한 땅을 여러 차례 방문하기도 했다. 이대로라면 남과 북에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대감이 차올랐지만,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며 관계가 단절돼 버렸다. 

이후 서울 용산의 모 교회에서 4년간 담임목회도 해 봤는데,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 사업 등을 비판하는 ‘목회자 1000인 선언’을 주도한 것이 빌미가 되어 교회를 떠나야 했다. 또한 명성교회 세습사태를 겪으며 교회가 자정능력을 사실상 상실했다는 실망감이 들었다. 결국 나의 남은 에너지를 교단개혁에 소진하겠다는 생각을 내려놓게 됐다. 

고양비상시국회의 활동을 함께 하는 고양의 시민활동가들. [사진제공=류태선 목사]

60이 넘은 나이에 고양으로 이사를 왔는데.

고양으로 오니 일단 살기가 좋았다. 도시 인프라가 잘 되어 있고, 아름다운 호수공원도 있고. 고양시민사회와의 만남도 반가웠다. 마침 박근혜 국정농단사태를 맞아 퇴진운동이 뜨겁게 전개됐다. 곧바로 여러 시민사회 리더들과 교유하게 됐고, 이후 고양평화미래포럼 상임대표를 비롯해 행복한미래교육포럼, 고양햇빛발전사회적협동조합 등 여러 단체 활동에 참여했다.

또한 윤석열 정권의 폭정이 용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지난해 봄부터 정권 퇴진을 목표로 한 ‘고양비상시국회의’ 출범에 앞장섰다. 시국회의 활동은 지난 22대 총선 후 잠시 휴지기를 갖는 중인데, 다시 비상시국이 터졌으니 새로운 활동의 틀을 짜나가야 할 것 같다.    

고양시 시민활동 역량을 어떻게 평가하나.

처음 고양에 왔을 때 외형적으로 시민활동이 굉장히 활발하다는 인상을 받았지만, 지내보니 기대만큼 탄탄하지 못하다는 아쉬움도 있다. 시민사회의 역량이 과거에 비해 위축된 건 비단 고양시만의 현상은 아니다. 최근에는 정치의식이 높은 시민들이 효능감 때문에 정당활동에 더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민사회활동은 정당활동과는 다른 독자적인 가치를 담당한다. 고양의 시민활동이 재분발해 다시 한 번 활기를 되찾게 되기를 기대한다. 

무엇보다도 고양은 언젠가는 찾아올 남북 평화시대를 이끌어갈 중심도시다. 고양 시민사회 리더들이 남북 상생의 원대한 비전을 공유하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를 바란다.

[사진제공=류태선 목사]
1973년 새문안교회 대학생회 회원들의 유신철폐 촉구 횃불시위를 기념하여  만든 '광화문 횃불 밴드'의 숭례문 촛불 광장 버스킹 장면. [사진제공=류태선 목사]
민주단체 합동 50주년 기념식 에서 축하공연을 하는 '60+기후행동 BTN(방탄노년단)'. [사진제공=류태선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