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밤도 N플릭스] 새해 첫 달, 영화 25편 본 이야기
[고양신문] 새해 들어 꼭 실천하자고 스스로와 다짐한 것 중 하나가 ‘감상 영화 목록 정리’다. 주로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영화를 보던 젊은 시절에는 영화 감상노트를 만들어서 날짜와 정보, 간단한 감상평과 별점까지 꽤 오래도록 꼼꼼히 정리하곤 했었지만, 40대 이후부터는 사는 게 바쁘다 보니 몇 번 다시 시작했다가 중단하기를 반복했다.
케케묵은 취미를 되살리려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OTT플랫폼 덕분에 영화를 볼 수 있는 환경은 훨씬 좋아졌지만, 그걸 수용하는 나 자신의 감성과 기억력이 점점 감퇴하고 있다는 심각한 자각 때문이다. ‘이게 재밌겠네?’ 하면서 플레이버튼을 눌러놓고는 십여 분 지나서야 전에 보다가 중도 포기했던 영화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혼자서 참 민망해진다.
목록을 작성하면 또 볼 필요가 없는 영화와 언젠가 다시 봐도 좋을 영화가 가려져서 좋다. 재밌게 본 영화에 애정어린 별점을 매기고, 출연 배우의 이름과 영화 속 캐릭터를 메모하다 보면 마치 내가 그 영화와 특별한 관계를 맺은 듯한 뿌듯함이 차오른다. 세상에 볼 영화는 너무나 많고 인생은 짧기 때문에, 두 번 봐도 좋을 영화는 그때그때 잘 체크 해 둬야 한다.
그렇게 작성된 2025년 1월 감상 목록에는 25편의 영화가 이름을 올렸다. 너무 많은 것 아니냐고 하겠지만, 시리즈물이나 예능에 눈 돌리지 않고 오로지 영화만 골라 보면 충분히 가능한 숫자다. 더군다나 1월에는 긴 연휴가 있어줘서 ‘꼬리에 꼬리를 물 듯’ 관련 영화를 몰아보기도 했다.
25편 중에는 오래간만에 다시 감상한 작품들도 많다. 80년대 영화 마니아들에게 ‘편집의 교과서’로 칭송받았던 <미드나잇 익스프레스>(1979)는 지금의 관점에서 보니 특정 국가에 대한 편견과 반감이 너무 노골적이라 깜짝 놀랐고, 시드니 루멧 감독의 마지막 연출작인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2009)를 볼 때는 드라마 장인이 선물해줬던 여러 전작들이 하나둘 떠올랐고,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2003)을 22년 만에 다시 보면서는 영화 속 주인공이 관여하는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사건의 모티브가 고양 금정굴 이야기일 거라는 짐작이 들었다.
1월 관람작 중 ‘최우수 연기상’ 수상자를 꼽아볼까 했는데, 후보가 너무 많다. <머더리스 브루클린>(2019)에서 틱 장애와 비상한 기억력을 동시에 지닌 사설탐정을 연기한 에드워드 노튼과 <23아이덴티티>(2017)에서 무려 23개로 분열된 자아 변신을 표현한 제임스 매커보이는 치열한 별종 캐릭터 연기경쟁을 펼쳤고, 수녀역을 연기한 매릴 스트립과 에이미 아담스, 사제 역을 맡은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이 ‘의심과 진실’이라는 화두를 두고 불꽃 튀게 격돌한 <다우트>(2008)는 셋 중 누가 수상의 영광을 안아도 안 이상한 작품이었다.
한편으로는 한국영화의 전반적 품질 하락도 또다시 감지됐다. 송중기의 <화란>(2023), 강동원과 박정민의 <전,란>(2024), 황정민과 정해인의 <베테랑>(2024) 모두 연기자가 아깝다는 생각만 들 정도로 상투적이었다. 영상물의 덩치는 잔뜩 키워놓고, 창작자의 영역은 한껏 좁혀버린 ‘넷플릭스 공세’의 폐해가 이제는 치료 불가능한 수준으로 한국영화 전반을 잠식해버린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다. 넷플릭스는 참 고맙기도 하고, 밉기도 한 존재다.
스스로 매긴 평점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나라는 사람이 좋아하는 스토리의 패턴이 정리된다. 대체로 범죄와 연루된 캐릭터에 끌리고, 선과 악을 구분하기 힘든 상황에 흥미를 느낀다. 반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예측 가능한 캐릭터를 지루해하고, 가족주의를 앞세워 눈물을 짜내려는 짓거리를 질색한다.
하지만 이 역시 상대적인 경향일 뿐이다. 눈물샘을 자극했던 멜로영화 <어톤먼트>(2008)를 십수 년 만에 다시 찾아보기도 했고, 오해받는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찢어지는 마음이 고스란히 표현된 <리차드 쥬얼>(2019)에 별점을 아끼지 않고 쏘기도 했으니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관심사도 감성도 한쪽으로 굳어지기 쉬운데, 영화관람 목록을 작성하면 여러 면에서 도움이 된다. 연초에 세운 결심을 이번엔 좀 오래도록 지속해 봐야겠다.
▶유경종 기자가 2025년 1월에 재미나게 본 영화들
<머더리스 브루클린> (Motherless Brooklyn, 2019, 에드워드 노튼) / 작품마다 놀라운 연기 변신을 보여주는 에드워드 노튼이 직접 연출도 한 작품. 브루스 윌리스, 알렉 볼드윈, 웰렘 데포 등 반가운 배우들이 등장한다.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Before The Devil Knows You're Dead, 2009, 시드니 루멧) / 필자가 꼽는 인생작 중 하나인 <허공에의 질주><1988)를 만든 시드니 루멧 (1924~2011) 감독의 마지막 연출 작품. 몇 번을 다시 봐도 재밌다.
<리차드 쥬얼> (Richard Jewell, 2009, 클린트 이스트우드) / 존경해 마지 않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옹이 89세에 연출한 영화. 어르신께서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들도 너무 잘 만든다.
<바튼 아카데미> (The Holdovers, 2024, 알렉산더 페인) / 외로운 인간들끼리 따뜻한 온기를 만들어내는, 오래간만에 만난 감동 코미디.
<어톤먼트> (Atonement, 2008, 조 라이트) / 가슴이 먹먹해지고 싶으면 이 영화를 떠올리면 된다. 제임스 매커보이와 키이라 나이틀리의 미모가 빛난다.
<로만 J 이스라엘, 에스콰이어> (Roman J. Israel, 2017, 댈 길로이) / 제목이 독특해서 무슨 영화일까 궁금해서 봤는데, 보길 참 잘했다. 덴젤 워싱턴과 콜린 패럴, 멋진 배우들의 앙상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