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여행] 서울역 서쪽 중림동·만리동... 도시의 어제와 오늘 '옹기종기'
서울역 주변 산책코스② 약현성당과 손기정공원
약현, 만리재, 애오개… 서소문 밖 오래된 동네들
130살 넘은 성당과 마라톤 영웅 기리는 체육공원
언덕으로 이어진 구도심 골목길 정감 어린 풍경
[고양신문] 서울역 주변 산책 두 번째, 오늘은 철길 너머 서쪽 동네로 가보자. 외지에서 서울역을 이용하는 이들의 동선은 대개 중심부인 서울역 동북쪽이나 동남쪽이기 때문에, 특별한 용무가 아니고서는 기찻길 서쪽 동네로 갈 일이 별로 없다. 하지만 서울역 서쪽은 중구 중림동과 만리동을 중심으로 마포구 아현동, 서대문구 북아현동, 용산구 청파동 등 오래된 주거지역이 옹기종기 이어져 있어 한번쯤 산책해볼 만한 코스가 많다.
서울스퀘어빌딩과 숭례문, 시청, 광화문 광장으로 이어지는 서울역 동쪽이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상징경관을 보여준다면, 오래된 골목길과 새로 올라간 빌딩들이 뒤섞여 있는 서울역 서쪽 산책은 서울 중심부 바로 옆 동네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을 구경하는 재미를 준다.
순교자 터 굽어보는 붉은벽돌 성당
서울역 서쪽 마을로 향하는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부쩍 가까워진 계기는 공중보행로 ‘서울로7017’ 개통 덕분이다. 보행로 위에서 만리동광장 방향으로 걷다 보면 40년 전 자동차 고가도로가 개통하던 당시에 세워진 ‘서울고가’ 표시석 기둥도 만날 수 있다.
과거 서소문 밖으로 통칭되던 서울역 서쪽은 약현, 만리재, 아현(애오개) 등의 언덕 지형이 이어진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중림동 비탈길 중턱을 130년 넘게 지키고 있는 약현성당(藥峴聖堂)이다. 앞서 소개했던 서소문 역사공원에서 큰길을 건너 계단을 따라 언덕을 오르면 붉은 벽돌로 지은 고풍스러운 성당 건물이 산책자를 반긴다. 100평이 조금 넘는 아담한 규모지만, 명동성당보다도 6년이나 먼저 우리 땅에 최초로 건립된 서양식 성당이기 때문에 종교사와 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성당의 위치가 오래도록 참혹한 핏물이 마르지 않았던 처형터와 순교지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점도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약현’이라는 이름은 예부터 이 언덕에서 약초를 재배했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 하늘을 향해 솟은 고딕식 종탑, 라틴십자형 삼랑(三廊)구조 등 약현성당의 멋진 외형은 이후 우리나라 성당 건축의 원형이 되었다. 정갈하게 가꿔진 마당과 정원을 둘러본 후, 살짝 문을 밀고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아름다운 채광이 실내를 은은하게 채우고 있는 광경을 감상할 수 있다. 가톨릭 신자가 아니더라도 잠시 머물며 마음을 차분히 비우기에 좋은 곳이다.
오르막 지형에 순응한 성요셉아파트
약현성당으로 오르는 계단길에서는 나지막하고 길게 지은 인상적인 건물의 뒷모습이 보인다.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복합아파트’라는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는, 1971년에 준공된 성요셉아파트다. 가장 오래된 성당과 가장 오래된 주상복합건물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출입구가 열린 전면은 언덕 골목길 방향이라, 마치 성당 부지를 등에 업고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자세히 보면 언덕 아래쪽은 층수가 높고, 위로 올라갈수록 낮아져 맨 위는 3층으로 마무리된다. 때문에 골목길 아래쪽에서 올려다보는 느낌과 위에서 내려다보는 느낌이 서로 다르다. 가파른 언덕을 따라 터를 잡은 건물의 균형을 지혜롭게 맞춘 듯하다.
외양은 낡고 오래됐지만 여전히 입주민들이 살아가고 있고, 1층 상가 역시 이런 저런 가게들이 장사를 하고 있다. 몇몇 매장은 요즘 취향에 맞게 깔끔하게 단장한 곳도 있어서 레트로 분위기를 즐기며 구경할 만하다.
옛 양정고 본관에 들어선 손기정기념관
발걸음을 만리재 방향으로 옮겨 오르막길을 오르다 보면 손기정체육공원이 나타난다. 일제강점기인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목에 걸며 대한 남아의 기개를 만천하에 떨쳤던 손기정 선수를 기리기 위해 모교인 옛 양정중고등학교 자리에 조성한 공원이다. 공원은 언덕 지형을 그대로 살려 러닝트랙과 운동장, 어린이도서관 등이 만들어져 있어 인근 주민들의 생활체육과 산책 코스로 사랑받고 있다,
체육공원 뒤편에는 구 양정고 본관 건물을 리모델링해 손기정 선수를 기리는 공간으로 꾸민 ‘손기정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붉은벽돌로 만든 근대식 2층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손기정 선수의 귀중한 유물과 함께 업적을 조명한 각종 사진과 전시물을 만날 수 있다. 특히 베를린 올림픽 시상식에서 손 선수가 머리에 둘렀던 월계관, 그가 신었던 마라톤화, 시베리아 횡단철도 티켓 등 흥미로운 소장품들이 생생한 감동을 전한다.
전시관 옆에는 ‘손기정 월계관 기념수’라는 거목이 당당히 서 있는데, 손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 기념으로 받았던 묘목을 자신의 모교에 심은 것이라고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전통적으로 마라톤 우승자의 월계관은 지중해산 월계수로 만드는데,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아메리카 대륙이 원산지인 대왕참나무를 사용했다고 한다. 손기정 월계관 기념수의 수종 역시 잎이 무성하고 수형이 곧은 대왕참나무다.
기념수 뒤편 계단을 올라가면, 마라톤 우승 기념으로 받은 그리스 청동투구를 들고 있는 손기정 선수의 동상이 서 있다. 동상 뒤편 언덕 꼭대기에는 봉래초등학교 건물도 눈에 들어온다. 손 선수의 동상은 아래쪽 러닝트랙 옆에도 서 있는데, 앞의 것과 달리 혼신을 다해 질주하는 기운찬 모습이다.
다양한 시간대가 공존하는 풍경
손기정 체육공원에서 골목길을 따라 좀 더 올라가면 또 하나의 도시숲인 충정녹지공원으로 연결된다. 제법 고도가 높은 이곳에서는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서울 도심의 고층빌딩이 보이고, 그 너머로 서대문 안산, 멀리 북한산 형제봉의 우뚝한 실루엣이 조망된다.
녹지공원에서 충정로역 방향으로 내려오는 골목에서는 신축 아파트단지와 구축 빌라와 연립, 오래된 노후주택 등 여러 가지 색깔의 시층(時層)을 차례로 만날 수 있다. 계단과 담장, 축대와 대문, 도로와 골목이 뒤섞인 시간이 멈춘 듯한 구도심 풍경을 서울 한복판에서 만나니 묘한 기분이 든다. 군데군데 도시환경정비사업이 시작된다는 안내가 걸린 것으로 보아, 수년이 지나면 이곳 풍경도 달라질 것 같다.
서울로 덕분에 활기 찾은 먹자골목
산책의 재미를 완성해주는 포인트는 뭐니 뭐니 해도 맛집이다. 중림동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대로인 중림로 양쪽에는 오래된 한식집과 중식집을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식당들이 자리하고 있다. 기자는 점심을 간단히 먹으려고 콩나물비빔밥집에 들어갔는데, 콩나물과 김가루와 송송 썬 부추가 푸짐하게 들어간 비빔밥이 6000원이다. 요즘에 이런 가격을 만나면 왈칵 감동스럽다. 나중에 찾아보니 역시나 가성비로 소문난 집이었다.
중림로가 밥집 골목이라면, 만리재로 초입에는 수년 새 젊은 세대들이 즐겨 찾는, 다채로운 퓨전 요리를 내는 주점들이 많아졌다. 역시나 서울로7017이 가져온 변화다. 느릿느릿 중림동과 만리동 산책을 마치고 나니 시원한 맥주 한잔이 당긴다. 예전 같으면 기나긴 귀가 시간 때문에 서울에서의 술자리가 부담스러웠는데, 이제는 GTX-A가 있으니 걱정 없다. 아무래도 서울역 가까이에 사는 친구 한 명 불러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