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열의 고양 사(史)랑방 - 월산대군 부부의 묘는 왜 앞뒤로 배치되어 있나?
[고양신문] 고양시청(원당)에서 국도 39호선(호국로)을 따라 고양동으로 가다가 낙타고개를 넘어 중간쯤에서 어렵게 우회전을 하면 이내 굴다리가 하나 나온다. 위로는 2007년 개통한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가 쌩쌩 소음을 내며 달리고 있고 굴다리에서 조금만 더 앞으로 가면 고양시 향토문화유산 제 1호인 월산대군 부부의 묘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다른 부부의 묘가 나란한 것에 비해 이들의 묘는 앞뒤로 배치가 되어 있다.
월산대군(月山大君 李婷, 1455~1489)은 조선 제 7대 왕 세조의 적장자인 의경세자(추존 "덕종)의 큰 아들이다. 정상적인 절차대로라면 조선의 제 8대 왕은 의경세자, 제 9대 왕은 월산대군이 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런데 의경세자 대신에 그 아우인 해양대군 예종이, 월산대군 대신에는 그 아우인 자을산군 성종이 왕위에 올랐다. 의경세자야 선대왕 세조가 살아있을 때인 열아홉 살에 요절하여 할 얘기가 없지만 월산대군은 정당한 왕위계승권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궁중암투 속에서 밀려났다. 그러니 그 억울함이 오죽했겠는가? 성종 즉위 이후 월산대군은 왕이 된 아우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자연 속에 은둔하며 독서와 시문 짓기로 여생을 보낸다. 그는 지금의 묘가 있는 고양북촌(고양시 신원동 능골마을)에 별장을 짓고 문인들과 교류하며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이후 어머니 인수대비의 병환이 깊어지자 지극히 간호하다가 자신도 병을 얻어 35세에 세상을 떠난다.
월산대군의 부인은 승평부대부인 박씨이다. 그녀의 남동생이 훗날 중종반정을 주도하는 박원종이다. 남편이 성종에게 왕위를 양보한 덕분인가? 그녀는 성종 연간에 분에 넘치는 배려와 물질적 혜택을 받는다. 백성들이 혹독하고 피폐한 삶을 연명하는 연산군 대 폭정의 시기에도 호화스러운 삶을 지속한다. 게다가 성리학이 정치와 삶의 윤리를 지배하는 시대에 독실한 불교신자이기도 했다. 월산대군 사후 남편의 묘 인근에 흥복사(興福寺)라는 절을 짓고 명복을 빌었을 뿐 아니라 자주 불사(佛事)를 일으켜 사회적인 물의를 빚는다. 그러니 신하들이나 백성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원성을 들었겠는가? 그녀를 처벌해야한다는 상소가 줄을 이었지만 성종과 연산군은 오히려 그녀를 감싼다. 연산군은 세자를 지금의 덕수궁 자리에 있던 큰어머니 박씨 부인의 집으로 보내 보살피게 했다. 그리고 자주 들러 머물렀다. 이러한 이유로 백성들 사이에서는 폭군 연산군이 큰어머니와 정을 통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게다가 세자가 환궁할 때에 큰어머니도 함께 불러 소문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런데 궁에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던 박씨 부인이 입궁한지 한 달 만에 갑자기 자살을 하였다. 소문은 다시 무성해 진다. 박씨 부인이 조카 연산군의 아이를 임신하여 그 수치심으로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연산군일기에 근거를 하고 있다. 연산군일기는 반정으로 등극한 중종 대에 기록한 것이라 객관성에 다소 문제가 있어 보인다. 아마도 반정 세력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연산군의 폭정을 더욱 과장해야 했을 것이고 이를 위한 희생양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박씨 부인은 호화로운 생활과 불교신봉자라는 이유로 눈엣가시였다. 반정세력들이 희생양으로 삼기에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여하튼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는 자살로 기록되었고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하고 있던 조선사회에서는 자살을 한 여자는 남편과 나란하게 묻히지 못했다고 한다. 이 역시 명확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월산대군 부부의 묘는 배치가 앞뒤로 되어 있어 우리의 의문을 자아내게 한다.
월산대군 묘는 '고양시 향토문화유산 제1호'라는 이름에 걸맞게 봉분과 함께 묘비, 상석, 문인석, 망주석, 장명등 등 빼어난 석조물을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대군 묘 양식의 전형(典型)으로 손꼽히고 있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이 신도비이다. 묘역 앞쪽 별도의 보호각 안에 있는 신도비는 복련(伏蓮) 문양의 대좌와 문자를 새긴 비신, 용문양의 이수를 갖춘 비석으로 조각미가 뛰어나다. '월산대군비명(月山大君碑銘)'이라고 적힌 전액(篆額)과 비문은 연산군 시대 최악의 간신으로 알려진 임사홍(任士洪, 1445~1506)이 썼다. 비문의 글씨는 대부분 마모되어 알아볼 수가 없으나 흥미롭게 상형문자 스타일로 새긴 전액이 선명하게 남아있어 임사홍의 재치와 문장가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확인할 수가 있다.
월산대군의 삶은 한마디로 고단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처지도 그렇지만 부인의 말로도 순탄치 못했고 어머니 인수대비는 손자인 연산군의 만행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월산대군이 지은 시조 중에서 우리에게 익히 알려져 있고 마치 자신의 자화상을 묘사한 듯한 것이 있어 소개한다.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오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