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지 칼럼] 그 새벽, 여자가 지리산에서 발견한 것

<예술 비슷한 거 하는 M세대의 글쓰기>

2025-03-19     김수지(노파) 작가

[고양신문] 모든 것은 우연히 본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에서 시작됐습니다. 노숙인들이 땅바닥에 식판을 둔 채 식사하고 있었습니다. 무료급식을 거리에서 했기 때문입니다. 그 장면이 지독하게 비인간적이라고 느낀 저는 노숙 생활 대신 지리산 첩첩산중으로 들어간 한 여자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지리산으로 떠났던 겁니다. 여자가 그곳에서 무얼 마주하게 될지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전날 20도까지 오르던 구례 기온은 산행 당일 영하로 뚝 떨어지더니 비까지 부슬부슬 내렸고, 비는 이내 수분을 가득 머금은 습설로 변했습니다. 전날 저녁 게스트하우스 옥상에 앉아 불길한 전조처럼 산마루를 짙게 덮은 운무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저길 내가 왜 가야 하냐고, 내가 지리산 여자도 아닌데 고생을 왜 내가 해야 하냐고.

산행 전날 저녁 게스트하우스 옥상에서 올려다 본, 짙은 운무가 몰려오고 있는 지리산의 모습. [사진=김수지]

치열했던 내적 갈등이 무색하게 다음날 새벽, 저는 기계처럼 일어나 우비 위로 토독토독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한 시간 길을 걸어 화엄사 등산로에 도착했습니다. 이런 자신이 징그럽다고 느끼며 장장 여섯 시간 산행의 첫걸음을 뗐습니다. 네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길이나 초행이고, 마지막 산행이 무려 5년 전 일인 데다, 눈과 살얼음이 낀 돌길을 올라야 했기에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습니다. 

산을 오를수록 이거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마다 지리산 여자는 나약한 소린 하지 않는다며 스스로를 채찍질했습니다. 진짜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와버린 후였고, 허벅지 높이로 쌓인 눈길을 뚫고 간신히 대피소에 도착하고 나서야 오늘 이 위험한 산행을 감행한 사람이 저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이 유명한 대피소의 예약자가 저뿐이었던 겁니다. 이런 날씨에 지리산에 올 만큼 이상한 사람을 저 말고 두엇은 더 볼 줄 알았는데, 쓸쓸해졌습니다. 대피소 직원도 진짜 올 줄 몰랐다는 얼굴로 (설마) 새벽에 노고단 정상도 갈 거냐고 물었고, 저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습니다.
"예."

새벽 눈길을 헤치고 오른 노고단 풍경. [사진=김수지]

이것이 전 세계에 유일무이하다는 3월 4일 자 노고단 사진입니다. 여자가 사투 끝에 다다른 지상 1500미터의 고지. 그곳엔 돌과 맹렬한 바람, 그리고 온통 흰 것밖에 없었습니다. 이 아찔하고 몽환적인 시공간에 홀로 서서 태곳적 제단을 바라보니 마치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르는 경계에 외람히 발을 들이민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때 바람이 저를 경계 밖으로 밀어내려는 듯 사납게 불어닥쳤고, 순간 저는 살고 싶다는 강한 열망에 휩싸였습니다. 돌 사이로 뿌리를 내려 악착같이 생을 움켜쥐고 싶었고, 생이 제 아귀힘에 짓이겨져 즙이 흐르면 그 즙으로 목을 축여 다시 살아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지리산으로 들어온 여자가 무엇을 발견했을지 깨달아졌습니다. 산을 오르는 내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하면서도 한 걸음도 허투루 내딛지 못하게 한 것. 그것은 끝내 살아내고야 말겠다는 불굴의 생의 의지였습니다. 어쩌면 여자는 이 깊은 산중으로 삶을 마감하러 들어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 안에 있던 이 의지를 깨닫는 순간, 여자는 함부로 죽을 수 없게 됩니다. 버려진 암자에서 나물을 캐고 버섯을 따 먹으면서라도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되지 않을 겁니다. 하산 전에 대피소 직원을 잠시 취재했는데, 국립공원에서는 주기적으로 드론을 날려 무단 점유자를 색출하기 때문에 산에 몰래 들어와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벌금도 백만 원이나 했습니다. 엄혹한 법규를 들으니 삶의 영역으로 돌아온 것이 또렷이 실감 됐습니다. 그렇게 지리산에서 여자는 불굴의 의지를 얻고 저는 스토리를 잃은 채 불굴의 여자를 짊어지고 다시 여섯 시간을 내려와야 했습니다. 

노고단 오르는 길. [사진=김수지]
겨울 지리산의 상고대. [사진=김수지]
[사진=김수지]
[사진=김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