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밤도 N플릭스] 나는 피노키오가 될래요!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2022)

2025-03-25     유경종 기자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시킨 '피노키오'의 한 장면.

[고양신문] 영화의 공식 제목이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다. 적절한 작명이다. 피노키오, 하면 떠오르는 귀여운 이미지를 고착시킨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시작으로 <피노키오>라는 제목의 작품들이 반복해서 만들어졌지만, 이 작품에는 앞선 작품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만의 유니크한 인장이 곳곳에 찍혀있기 때문이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피노키오 이야기의 뼈대를 따라가면서도, 후반부로 갈수록 “얘가 우리가 알던 그 애가 맞나?” 싶을 만큼 전혀 다른 피노키오를 만나게 해 준다. 우선, 피노키오는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나무인형이 아니다.

피노키오에게 ‘사람이기’를 요구하는, 그것도 ‘어떠한 사람이기’를 강요하는 이들은 어른들이다. 죽은 아들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쳐 술과 광기에 취해 뚝딱뚝딱 나무인형을 만든 목수 제페토는 피노키오가 죽은 아들 카를로처럼 착한 아이가 되기를 바라고, 마을 어른들도 말썽을 부리지 말라며 눈에 쌍심지를 켠다. 그러거나 말거나, 타고난 생기발랄을 주체하지 못하는 피노키오는 세상 만물이 놀랍고 즐거울 뿐이다.

‘거짓말을 하면 코가 커지니까, 정직해야 한다’는 따분한 교훈도 이 작품에서는 뒤집어진다. 커다란 물고기 뱃속에서 위기에 빠진 피노키오 일행들을 구출해준 것은 다름 아닌 거짓말이었다. 피노키오가 속 시원히 거짓말을 해댄 바람에 코가 나무처럼 쭉쭉 커져서 탈출구를 만들어 준 것이다. 

시대와 공간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이다. 서커스단 단장과 시장 등 힘을 가진 어른들은 하나같이 독재자 무솔리니의 열렬한 추종자들로 그려진다. 이들은 피노키오의 특별한 재능을 자신들의 욕망을 대리하는 도구로 사용하는데 혈안이 돼 있다. 노래하고 춤추는 피노키오를 무대에 올려 돈을 챙기고, 군복을 입히고 총을 들려 총통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게 하고,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피노키오를 불멸의 전사로 써먹기 위해 전쟁터로 내몬다. 하지만 제멋대로인 피노키오는 거꾸로 자신의 장점을 살려 이들을 제대로 엿먹인다. 총통을 조롱하는 내용으로 공연을 바꿔치기하고, 처형을 당해도 다시 살아오는 식이다. 

전쟁을 배경 삼아 끔찍한 현실과 기이한 판타지를 절묘하게 섞어내는 장기를 감독은 자신의 대표작인 <판의 미로>에서 유감없이 선보인 바 있다. 차이가 있다면, 똑똑하고 잘난 어른들이 만든 위선적이고 폭력적인 세상에서 <판의 미로>의 오필리아는 동화와 상상의 세계로 도피하지만, 나무토막 피노키오는 춤추고 노래하며 사랑하는 이들을 지켜내려고 용기를 낸다.

기독교적 상징성의 차용도 인상적이다. 죽었다 살아나는 피노키오에게서 ‘부활’의 이미지가 떠오르고, 물고기 뱃속 장면에서는 자연스레 ‘요나 이야기’가 연상된다. 피노키오가 성당 제대에 내걸린, 나무로 조각한 예수상을 가리키며 “저 사람도 나도 똑같이 나무로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왜 저 사람은 좋아하고 나는 싫어하죠?”라고 묻는 대목은 관객들을 종교성의 본질에 대한 질문 앞에 세워놓는다.

작품에는 기독교와 연관된 다양한 상징들이 차용된다. 

한편으로는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제페토는 아들이 보고파서 나무인형을 깎고, 귀뚜라미는 피노키오의 이야기를 아름다운 연주와 문장으로 기록하고, 추한 외모를 가진 원숭이 스파차투라는 천재적 재능으로 인형극을 연출한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인간의 언어로 말하지 못하는 스파차투라가 자신이 조종하는 마리오네트를 통해 피노키오와 대화를 한다는 설정이다. 무릇, 예술가가 세상을 향해 어떤 방식으로 말을 건네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처럼 교육과 성장, 욕망과 정치, 종교와 예술을 넘나드는 시나리오의 마법이 시각적 즐거움을 가득 안겨주는 스톱모션 연출기법만큼이나 경이롭다.   

영화의 뒷부분, 우여곡절을 겪으며 각성한 제페토가 “미안하다. 너는 카를로가 되지 않아도 된단다”라고 말하자 피노키오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그럼 나는 피노키오가 될래요!”라고 기쁜 목소리로 대답한다. 가장 큰 감동은 단순한 진리가 새삼스러운 깨달음으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영화는 그 놀라운 순간을 선물해준다.   

피노키오는 영원한 생명을 거부하고 사랑하는 이들의 곁에서 유한한 삶을 선택한다.  자신이 사랑했던 존재들을 하나 둘 떠나보내고, 어딘지 모르는 길로 떠나는 엔딩 장면은 커다란 울림을 전한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과 스톱모션 애니 장인들이 영화를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보여주는 별도의 메이킹 필름도 넷플릭스에서 시청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