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과 인연 깊었던 두봉 주교 "나눠야 가치 생겨"

'파란눈의 한국인' 두봉 주교 선종 1991~2004년 행주성당서 사목 활동 12년간 금정굴 대책위 공동대표 맡아 지역 ·시민들과 가까이 일상도 나눠 "행복은 나눔에 있어, 나눠야 사람"

2025-04-17     김진이 전문기자

 

2003년 KBS에서 행주성당으로 두봉 주교를 방문해 소개 다큐를 촬영했다. [KBS 방송 화면 캡처]

[고양신문] “어려운 시절 금정굴 대책위원회 공동대표도 선뜻 맡아주셨어요. 당시 갑자기 저의 집에 방문하셔서 깜짝 놀랐어요. 정발산의 작은 수녀원을 찾으셨다가 농민운동을 하는 저의 이야기를 듣고 오신 거라고 했어요. 이후 지역에서 뵐 때마다 이 분이 바로 성인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영문 전 고양시민회 대표는 고 두봉 주교와의 인연을 말하며 애도를 전했다. 사회·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 파란 눈의 신부가 누구보다 지역의 어려운 일에 나서고, 소탈하게 성도들을 챙기는 모습에 ‘성인’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었단다. 

두봉 주교는 1998년 11월 결성된 ‘고양 금정굴양민학살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추진위원회’의 상임공동대표를 이창복·서병규·유재덕·박종후씨 등과 함께 맡았다. 엄혹했던 시기 국가의 잘못을 말하는 금정굴 진상규명에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는데 두봉 주교는 “내 이름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쓰라”고 나섰고, 이후 고양시에 머무는 12년 동안 공동대표로 책임을 다 했다. 1979년 경상북도에서 행방불명된 농민운동가 오원춘씨 사건에 나섰다가 정부 탄압을 받고, 추방명령까지 받았던 두봉 주교에겐 어쩌면 당연한 행보였다.  

이춘열 전 금정굴공동대책위원장은 "각 종교계의 대표님을 모셨는데 천주교에서는 두봉 주교님이 맡아주셨고, 같이 싸워주시기도 했다. 당시 금정굴에 대해 지역에서도 다들 나서지 않으려는 일이었는데 유가족과 시민사회단체가 너무 감사하게 생각했다"고 전했다. 

tvN 프로그램 '유퀴즈'에 출연했던 고 두봉 주교. [tvN '유퀴즈' 화면 캡처]

“물질과 행복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내 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우리가 더불어 잘 사는 것이 우선이고 그 다음 내가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내 것을 나누는 기쁨, 이보다 더 큰 행복은 없습니다.”

두봉 주교는 행주성당에 머물던 2003년 고양신문과도 인터뷰를 했다. 80이 훌쩍 넘어버린 파란 눈의 주교는 온몸으로 ‘물질이 행복의 조건이 되어버린 세상’에 대해 절절한 감성과 호소를 쏟아냈다. 두봉 주교와 고양시는 인연이 매우 깊다. 2003년 12월 27일 두봉 주교는 작은 짐 꾸러미를 3개나 들고 백혈병 소아암 어린이 돕기 재활용품 매장을 찾았다. 청빈한 삶터 한 공간에 자리잡고 있던 성모상과 그림, 조각과 도자기 등이 그의 소중한 기증품이었다. 

당시 매장을 한바퀴 둘러보고 강연자의 자리에 앉은 주교는 자신이 겪은 일들을 하나 둘씩 설명하며 나눔을 이야기했다. 두봉 주교는 아주 작고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를 전했다. 술자리에서 행복이 도대체 뭐냐고 논쟁을 벌이다 새벽 2시에 주교를 찾은 이웃 사람들, 기형아 출산이 우려되니 검사를 해보자는 의사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어떤 아이든 소중하게 기르겠다고 마음먹은 젊은 부부 등.  

“온전한 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부모로부터 나누어 받은 것이 내 몸입니다. 내 몸도 온전한 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물질 또한 내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것입니다. 내 것은 나누어야 진정한 가치가 생깁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입니다. 행복은 물질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나눔에 있습니다. 나누어야 사람입니다.”

그때 두봉 주교가 나눈 이야기이다. 두봉 주교는 원래 한국 사람들은 더불어 살아온 민족이라고 강조하고 ‘우리’라는 말에 대한 느낌을 덧붙였다. 프랑스나 다른 나라의 경우 우리라는 단어가 극히 제한되게 사용되지만 한국은 ‘우리 집’ ‘우리동네’ ‘우리회사’ 등 ‘우리’라는 말이 숱하게 많이 쓰인다며 이는 한국의 오랜 전통이자 민족성이라고 말했다.  

“큰 꿈을 꾸십시오. 큰 꿈은 미래에 있지 않습니다. 미래에 얽매이지 말고 지금 주어진 환경 속에서, 현실 속에서 남에게 도움을 주고 봉사하세요. 여러분이 베푼 도움이나 봉사보다 훨씬 값진 행복과 보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좀 더 어렸을 때부터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남에게 좋은 것을 주는 체험을 해야 보람 있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얻고 싶은 만큼 많이 주세요. 받으려고 하면 받지 못하고 주면 받을 수 있습니다. 저의 체험에 미루어보면 이 원리가 어긋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고양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두봉 주교가 전한 메시지다. 두봉 주교는 1929년 프랑스 오를레앙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1947년 오를레앙시 쌩끄로아 고등학교, 1949년 오를레앙 대신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1950년 파리외방전교회에 가입, 1953년 6월 29일 사제수품을 받았다. 1954년 12월 19일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 신부, 1967년 9월~1969년 6월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 신부, 1969년 5월 29일 교황 바오로 6세 명에 의해 제1대 안동 교구장으로 임명됐다. 1990년 10월 6일 안동교구장을 은퇴한 이후 행주성당으로 부임했다. 2004년 11월 안동교구에서 의성군 봉양면 문화마을에 마련해준 거처로 이사해 텃밭농사를 하며 이웃사람들과 벗하며 살다가 2025년 4월 10일 선종했다.

파란 눈의 한국인 원조격인 고 두봉 주교. 고양시와 한국사회에 남긴 깊은 족적과 헌신에 고양시민과 많은 이들이 애도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