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지 칼럼] 잔인하고 맛있는 봄

<예술 비슷한 거 하는 M세대의 글쓰기>

2025-04-24     김수지(노파) 작가
가장 손쉽게 봄내음을 즐길 수 있는 미나리밥. 미나리를 썰어 전자레인지에 2분 돌리면 끝. [사진=김수지]

[고양신문] 잔인한 봄이었습니다. 지리산과 섬진강이 내다보이는 숙소에서 3개월간 소설을 쓰기로 했으나 마지막 순간에 계획이 무산됐습니다. 생각날 때마다 하나둘 챙겨 둔 짐이 베란다에 수북했고, 해외직구로 구매한 전기 자전거는 곧 숙소에 도착한다고 연락을 받은 후였습니다. 인터넷 정지도 신청했고 여행자 보험도 들어뒀습니다. 그런데 숙소 관리자가 영 협조적이지 않았습니다. 이사 자체를 다시 생각해야 할만큼 중요한 문제도 마지막까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지금껏 공들인 시간이 아까웠으나 여자 혼자 생면부지의 외딴곳으로 살러 가는 일입니다. 아닌 줄 알면서도 들인 게 아까워 계속 가는 짓은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오래 준비한 계획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것은 역시 타격이 큰 일이어서 한동안 마음을 잡지 못했습니다. 광양까지 갔던 전기 자전거가 우여곡절 끝에 일산 집으로 배송됐을 때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실은, 꼴도 보기 싫어 한동안 포장도 뜯지 않고 방치해 뒀습니다. 

하지만 봄입니다. 주변에 모든 것이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그 생명력에 이끌려 미나리를 한 단 사서 고기와 함께 구워 먹었습니다. 샐러리도 송송 썰어 치즈를 두껍게 바른 베이글 위에 올려 먹었습니다. 향긋한 달래로 양념장을 만들어 밥에 비벼 먹으니 봄이 와락, 하고 입안으로 안기는 기분입니다. 몸 구석구석 봄기운이 퍼지니 며칠간 방치해 둔 자전거가 생각났습니다. 포장을 뜯고 자전거를 조립한 뒤 내친김에 파주 출판단지까지 내달렸습니다. 역시 너무 많이 갔나 봅니다. 김기림의 나비처럼 날개가 푹 절여져 돌아와 다시 힘을 얻기 위해 쑥을 한 봉지 주문했습니다. 쑥버무리를 해 먹어야겠습니다. 

요즘 인터넷을 보면 죽고 싶다는 글이 자주 눈에 띕니다. 어떤 사람은 영정사진도 지브리 풍으로 해야겠다고 써놓았습니다. 고약한 농담입니다. 봄은 ‘스프링 피크’라고 해서 일 년 중 자살률이 가장 높은 시기입니다. 갑자기 밝고 따뜻해진 세상이 견디기 어려워 그렇습니다. 나는 아직 겨울인데, 주변은 온통 빛과 온기로 채워지니 세상에 불행한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웅크리는 겨울보다 나만 불행한 봄이 더 괴로운 법입니다.

미나리와 닭고기와 애호박 구이. [사진=김수지]

그럴 땐 나가서 미나리를 한 단 사 오시기 바랍니다. 캐나다산 목심은 킬로에 만오천 원도 안 하니 그것도 한 덩이 주문해 목심을 굽고 남은 잔열로 미나리를 구워 고기를 돌돌 싸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어보시기 바랍니다. 남은 미나리로는 장아찌를 담가 다음번 고기를 구울 때 함께 드시면 됩니다. 애호박도 싸고 싱싱하니 후추와 소금을 뿌려 구워 먹고, 오이고추도 쌈장을 듬뿍 찍어 와삭와삭 먹어보시기 바랍니다. 

계절마다 피어나는 것들을 먹으면 몸 안으로 계절의 기운이 가득 채워집니다. 그게 제철 음식의 힘입니다. 그러니 봄에는 미나리를 먹고, 여름에는 복숭아를 먹고, 가을에는 단감을 드시기 바랍니다. 먹다 보면 봄이 지나고, 여름도 가고, 한 해가 흐르고 세월도 저만치 가 있습니다. 일부러 세상을 등지려 하지 않아도 어느덧 갈 때가 됩니다. 그러니 우울한 생각이 들면 시장으로 달려가 계절이 내놓은 것들을 사 드시기 바랍니다. 시절마다 바뀌는 맛을 찾아 먹는 재미가 제법 쏠쏠합니다. 힘든 마음도 그럭저럭 견딜 만해집니다. 사람들이 ‘살 맛 난다’고 할 때 ‘살 맛’이 제철 음식의 신선하고 쌉싸름한 맛임을 알게 됩니다. 

저는 얼마 전에 해남군에 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미나리를 먹어 북돋워진 기운으로 ‘남도 한 달 살기’를 신청했더니 선정된 겁니다. 그리하여 ‘지리산 여자’ 이야기는 반도의 끝, 해남에서 쓰게 됐습니다.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을 열면 되고, 기운이 떨어지면 제철 음식을 먹으면 됩니다. 그러니 걱정할 게 없습니다. 쓰기만 하면 됩니다. 그게 유일한 문제입니다. 

치즈를 듬뿍 바른 베이글 위에 샐러리를 송송 썰어 얹었다. [사진=김수지]
서로의 풍미를 한껏 올려주는 달래와 목심. [사진=김수지]
상큼한 샐러리와 딸기. [사진=김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