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산 산신께, 진밭마을 주민들의 정성 올립니다”

진밭마을 고봉산 봄 산제사 열리던 날

2025-05-02     유경종 기자

조라술 담그고, 음식 만들고, 예 올리고…
수백 년 내려온 전통 주민 힘으로 계승  

고봉산 동북편 자연마을인 진밭마을(고봉7통) 주민들이 정성을 모아 수백년 이어오고 있는 고봉산 산제사.  

[고양신문] 사위가 어슴푸레 밝아오는 지난달 30일 새벽, 고봉산 동북편 기슭 산제사 터에 올라온 마을 주민 10여 명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음력 4월 3일, 고봉산 동북편 자연마을인 진밭마을(고봉7통) 주민들이 수백년 이어오고 있는 고봉산 봄산제사가 열리는 날이다. 한쪽에서는 정성껏 준비해 온 음식들이 진설되고, 한쪽에서는 이틀 전 땅에 묻어 둔 독을 꺼내 잘 발효된 밑술을 걸러 향기 그윽한 조라술을 내린다. 제상이 차려지고 이날 제례를 담당할 상하주, 중하주, 하하주로 지정된 마을 주민 김재식, 조태영, 최창의씨가 제례복을 갖춰 입자 집례자인 이재규 통장(고봉8통)이 산제사 시작을 알린다.     

산제사는 산신을 맞는 참신례를 시작으로 축문을 읽는 독축, 산신께 예를 갖추고 물러나는 송신례의 순서로 치러지는데, 산신을 모시는 본제단 제례에 이어 토지신 제단에서도 약식 제례를 따로 올린다. 

산제사에서 낭독되는 축문에는 산신에 대한 예의와 함께 학생들의 학업성취, 주민들의 경로효친 실천, 풍년과 살림살이의 번성, 나아가 나라의 부강을 기원하는 마음이 함께 담겼다. 순서 하나하나마다 진지하게 참여하는 주민들의 표정에 경건한 정성이 배어있다.

고봉산 산제사에서는 상, 중, 하하주 순으로 각각 동일한 제례가 3회 진행된다. 

상하주의 제례가 끝나자 중하주의 제례가 시작됐다. 3명의 하주가 각각 동일한 절차로 제례를 따로 올리는 것이다. 중하주 제례를 마치자, 집례자가 참가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회의를 소집한다. 주민들은 어느새 20여 명으로 늘어있다. 회의에서는 음력 10월 3일 치러지는 가을산제사의 상·중·하하주를 주민들의 추천과 동의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내용을 하하주 제례 순서에서 산신에게 고한다. 매년 봄가을로 열리는 고봉산 산제사가 마을 주민들과 산신과의 지속적인 소통임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하주 제례까지 마무리되자 어느덧 아침햇살이 산제사터를 환하게 비추고, 제사터 마당에는 푸짐한 식탁이 차려졌다. 참가자들도 이제야 엄숙했던 표정을 풀고 이웃들과 함께 음식과 술을 나누며 정겨운 이야기꽃을 피운다. “옛날에는 산제사 날이 마을 잔칫날이었는데, 요즘에는 참가자가 점점 줄어 아쉽다”는 얘기도 들리지만, 한편으로는 “그래도 우리마을만큼 번듯한 산제사를 여지껏 이어오는 동네가 또 어디 있겠냐”는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도 들린다.

주민들의 말처럼, 농경문화의 전통을 이어온 우리 민족은 예부터 산제사, 산신제, 도당제 등 마을 단위의 제사를 지내왔다. 하지만 농사공동체가 흩어져버린 오늘날, 마을제사의 전통을 원형 그대로 이어오고 있는 진밭마을 고봉산 산제사는 무척 소중한 향토문화적 자산이 아닐 수 없다. 고봉산 산자락 안쪽에 자리한, 개발에서 비껴난 진밭마을이 진밭두레패농악 등을 비롯해 마을 전통문화의 전승에 각별한 정성을 쏟아온 덕분이다.               

오랜 전통에 따라 풍성하게 진설된 제물들.  

고봉산 산제사는 당일 하루 동안 치러지는 이벤트가 아니다. 상·중·하하주로 선정되면 각자가 맡게 될 역할과 절차를 숙지하고, 일상의 금기를 잘 지켜야 하기 때문에, 봄제사가 끝남과 동시에 가을제사가 준비되는 셈이다.  

제사의 실질적 시작도 사흘 전인 음력 그믐날부터 시작된다. 이날 상·중·하하주는 산제사터를 미리 정비하고, 조라술을 담글 산우물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제사 품목과 비용을 점검한다. 산제사 이틀 전에는 항아리에 조라술을 담가 산제사터 한쪽에 묻어두고, 마을 각 집을 찾아다니며 성금을 걷는다. 이때 산제사 참여를 원치 않는 집은 절대로 성금을 강제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어 제복과 제기를 준비하고, 제수 음식을 만들며 분주하게 사흘을 보내야 비로소 산제사의 준비가 빈틈없이 갖춰진다.    

고봉산 산제사를 이어가기 위한 진밭마을 주민들의 노력은 한해 한해 새로운 결실을 낳고 있다. 2013년에는 산제사터 축대와 산우물터를 정비했고, 2019년에는 <고봉산 산제사> 소책자를 발간했고, 올해는 산제사의 유래와 의미를 설명하는 입간판을 산제사터에 세웠다. 

올해 봄 산제사에 맞춰 새롭게 세운 고봉산 산제사터 안내간판. 

6년 전, 김수정 당시 통장의 주도로 발간한 <고봉산 산제사> 소책자에는 산제사의 기원과 의미, 일정과 절차 등이 일목요연하게 잘 담겼다. 무엇보다도 제물 만드는 법, 진설 방법, 제수 및 물품준비 목록을 매우 꼼꼼하게, 수량과 중량까지 구체적으로 적시해 넣었다. 한마디로 산제사의 A부터 Z까지를 담은 매뉴얼북인 셈이다. 김수정 전 통장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의적 성격과 함께, 오늘날에는 주민들간의 소통과 화합을 도모한다는 의미가 더해졌다”고 고봉산 사의 의의를 설명했다.   

전통의례인 제사 매뉴얼북이 있다는 사실은 무척 바람직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선대에서 후대로 경험을 통해 이어졌던 공동체 지식의 전승이 위기에 처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산제사의 가치와 과정을 몸으로 체득하고 있는 세대는 점점 노령화되고, 젊은 세대들은 산제사에 대한 관심이 점점 낮아지는 것은 고민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긍정적인 소식도 있다. 고봉산 자락 전원주택 마을에 입주한 새로운 이웃들이 두어 해 전부터 산제사의 새로운 멤버로 발을 들인 것이다. 이번 산제사에 하하주로 참여한 최창의 행복한미래교육포럼 대표가 그런 경우다. 최 대표는 “지자체 등의 지원 없이 마을주민들의 힘만으로 산제사를 이어오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면서 “직접 참여해보니, 참 즐겁고 뜻깊은 경험이 됐다”고 말했다. 

계승에 대한 고민을 묻는 질문에 이재규 통장은 “크게 걱정 안한다”면서 “어릴 적부터 보아온 산제사를 우리 세대가 정성껏 이어가면, 다음 세대 누군가가 또 이어가지 않겠냐”고 말했다. 이어 “할 수 있다면, 더 많은 고양시민들에게 고봉산 산제사의 가치를 알리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밝혔다. 

<사진으로 만나는 진밭마을 고봉산 산제사>

산제사 사흘 전, 산제사터를 정비하고 산우물도 깨끗이 청소한다. [사진제공=진밭마을]
제사 이틀 전, 산우물에서 뜬 맑은 물로 조라술을 빚는다. [사진제공=진밭마을]
조라술을 빚은 항아리는 산제사터 한쪽에 잘 묻어두고 짚으로 만든 덮개를 덮어둔다. [사진제공=진밭마을]
산제사 당일 아침, 항아리를 열어 조라술을 거르는 모습. 
산제사 축문에는 주민의 안녕과 마을의 번영을 비는 기원이 담겼다.
산신제단 바로 옆 토지신 제단에서도 약식의 제례가 동일하게 올려진다. 
중하주 제례와 하하주 제례 사이에 잠시 모여 다음번 산제사 상, 중, 하하주 선정을 논의하는 주민들.
2025년 봄 산제사를 집례한 주민들. (왼쪽부터) 이재규 고봉7통장, 조태영 중하주, 김재식 상하주, 최창의 하하주. 
산제사가 끝나면 모든 주민들이 함께 음식과 술을 나누며 친목을 다진다. 
오랜 전통을 함께 이어오고 있는 고봉산 진밭마을 주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