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악당의 나라
[높빛시론]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고양신문] 차를 몰고 나서는 순간 우리는 모두 악당이 된다. 전방을 주시하고 제한 규정 속도를 지켜 ‘얌전히’ 달리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전방을 주시할 뿐 옆을 보지 않는다. 특히 사람을 보지 않는다. 자동차 전용도로야 그렇다 치지만, 주차장이나 횡단보도에서 사람을 봐도 멈출 줄 아는 차를 보기 어렵다. 행여 사람이 지나갈까 더 빨리 지나간다. 혹은 아주 천천히, 그러나, 사람보다 먼저 지나간다. 스쿨존에서 시속 30㎞를 넘으면 과태료가 많이 나오니까 속도를 잘 지킨다. 그러나 주변에 아이들이 보여도 시속 30㎞이다. 행동 특성상 아이들이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에 ‘걷는 속도(시속 10㎞ 혹은 7㎞ 이하)’로 주변을 살피면서 언제든지 브레이크를 밟을 준비를 한 채 서서히 지나갈 줄 아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자동차 전용도로에 나가면 더 가관이다. 1차선을 중심으로 왼쪽 차선은 꽉 막혀 있거나 서행하고 있는데, 오른쪽 끝 차선은 비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일단 왼쪽 차선을 타서 목적지 출구가 나올 때까지 얌전히 앞만 보고 달리라는 교육을 운전면허 딸 때부터 받았기 때문이다. 요즘은 1차선 정도는 비워두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아랑곳 없이 왼쪽으로 꿋꿋하게 달리는 차들을 여전히 본다. 모든 차가 똑같은 속도로 달릴 순 없다. 그래서 앞차와 간격이 좁아진 차들이 오른쪽, 왼쪽으로 곡예운전을 하면서 추월해 간다. ‘마이웨이’ 하시는 분들은 그런 차들을 보면서 심지어 한탄도 한다. 사람들의 운전이 거칠다고. 자신이 다른 운전자의 시야와 주행길을 가로막고 간다는 의식은 전혀 하지 않는다. “모든 차의 운전자는 다른 차를 앞지르려면 앞차의 좌측으로 통행하여야 한다”는 도로교통법 21조는 죽은 조항이다.
왜 그런가? 그렇게 배우는 구조가 있기 때문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성공적으로 이루었다고 자랑하는 나라에서 사람 중심 생활 환경은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길거리에서는 ‘사람 조심’ 표지판보다 ‘차 조심’ 표지판을 더 흔하게 본다. 자동차 도로에서도 ‘1차선 추월 차선, 버스와 화물차는 3~4차선 주행’ 정도만 있다. 그래서 여전히 다른 운전자들의 시야를 가리고 사고를 유발할 수 있는 ‘왼쪽 주행’을 얌전히 한다. 빠른 차가 안전하게 앞지르기해 갈 수 있도록 운전하는 방법을 우리는 모르고 있다.
사람을 보고도 멈출 줄 모르고 다른 운전자의 시야를 가리면서도 소신 있게 마이웨이하는 사람들이, 그런데, 모두 우리의 선한 이웃이다. ‘주차 빌런’ 같은 사람들이 아니다. 엘리베이터에서 어린아이를 보고 웃어주는 어른이다. 손주의 재롱에 맞춰 아이가 되는 할아버지, 할머니다. 내 자식이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소리 듣지 않고 성장할 수 있는지 늘 고민하는 부모다. 그런데 익명성이 보장되면, 보수 진보 편가르기 틀에 들어가게 되면, 상대를 완전히 악마화해 제거하는 혐오의 칼을 휘둘러야 직성이 풀리는 하이에나가 된다.
일단 이야기를 시작하면 논쟁이 되지 않고 서로 물어뜯는 싸움을 하는 사회가 되었다. 그래서 가족이 모이고 친구들이 만나면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이런저런 토론 프로그램을 보더라도 멀찌감치 자리 배치하고 기계적으로 정해진 시간 안에 상대방의 주장과 관계없이 자신이 가져온 자료를 읽는 연설회 같은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혐오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다.
내편 아니면 맞아도 틀렸고 틀려도 틀린 사회가 되었다. 이런 사회를 바꿀 희망과 비전 없이 또다시 편가르기를 하는 대선 국면이 펼쳐지고 있다. 대통합을 외치는 분들이 계시지만, 6월 3일 이후 어차피 잊어버릴 이야기임을 모두가 안다. 나중에 자신이 전리품으로 받을 높은 연봉의 자리를 생각하며 침을 흘리는 사람들은 많지만, 지금까지 자신들이 앞장서서 만들어 놓은 선한 악당의 나라에 대한 반성은 없다. 정치꾼들이 만들어 놓은 선한 악당의 구조가 있다. 나도 모르게 우리는 선한 악당이 되었다. 그 구조를 깨자는 목소리를 높일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