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살에 시작한 노래… ‘한국의 피트 시거’ 꿈꿔요

[특별인터뷰] 최원영 동아그룹 전 사장 동아그룹 창업주 최준문의 차남 예음그룹 회장 지낸 기업인이자 ‘시사저널’ ‘객석’ 창간한 문화예술인 어릴 적부터 음악에 남다른 애정 ‘우리겨레’, ‘DMZ 동산에서’ 등  평화 염원 노래 잇달아 발표 다음달 6일 ‘코리아 평화의 날’에서 ‘임진강의 노래’ 새로 선보여 “반전 노래했던 서양 음악인들처럼 노래 통해 평화 통합 일구고 싶어”

2025-05-16     박경만 편집인
최원영 작가

[고양신문] 동아그룹 창업주 최준문의 차남이자 고 최원석 회장의 동생인 최원영(71세)씨가 평화를 염원하는 노래를 잇달아 발표해 화제다.
최씨는 동아건설 사장과 예음그룹 회장을 지낸 기업인이자 음악공연 예술지 ‘객석’, 시사주간지 ‘시사저널’을 발행한 언론인, 『소설 바라바』, 『예수의 할아버지』 등을 쓴 작가, <우리겨레>, <디엠지 동산에서> 등 노래를 만든 작곡가이기도 하다. 최씨를 지난 8일 서울 강남구의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인터뷰에 앞서 호칭을 뭐라고 부르는 게 좋겠냐는 물음에, 책을 두 권 냈고 현재 소설을 연재하고 있다며 “작가로 불러달라”고 했다. 유튜브 채널 ‘최원영TV’를 운영하며 백건우, 김훈 등 많은 문화예술인들을 인터뷰한 인터뷰어답게 대화가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답변만큼이나 질문도 많았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그의 궁금증과 호기심은 젊은이 못지않았다. 

최원영 작가

재벌가에서 태어나 기업인으로서 살 수 있었는데 문화예술인의 길을 걸었습니다. 다른 길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어려서부터 음악 자체를 좋아했던 것 같아요. 서울 서소문에 있는 평안교회 성가대에서 연주를 하고 음악을 많이 들었어요. 미국 포크송 그룹인 피터폴앤메리의 노래에 매료되어 ‘Gone the Rainbow’, ‘Puff, the magic dragon’ 등을 즐겨 따라 불렀지요. 장충동 자택 지하실에서 김민기가 만든 지 며칠 안 된 <아침이슬>을 들려주었고, 오랜 벗 한돌과는 함께 기타 치며 노래를 불렀어요. 당시 제가 가사를 쓰고 한돌이 곡을 붙여 만든 노래가 40년이 지나 다시 불려진 〈꿈속에서〉입니다. 영락교회에서 첼로 반주를 하면서 고전음악에 심취했고 음반을 사모아 충무로에 음악감상실 ‘필하모니’를 열었지요. 당시 유신시대의 아픔을 음악으로 달래려는 젊은이들의 문화공간으로 반응이 좋았어요. 

대학원에서 플루트를 전공했는데 작곡가의 길을 걷게 된 사연이 있나요.
필하모니를 만든 이후, 플루트를 공부해 서울대 음악대학원 기악과에 입학했어요. 입시 곡은 프랑스 작곡가 다리우스 미요의 작품이었는데, 학부 전공자가 아닌 저에게 큰 도전이었죠. 면접에서 한 교수가 “최원영씨가 입학하면 학부에서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으로는 두 번째 사례가 된다. 입학 후에도 플루트를 계속 불겠다고 약속하겠냐”고 물었어요. 첫 번째 사례는 법대 출신으로 국악계에 큰 발자취를 남긴 황병기 선생이었지요. 이후 서울시향 악장 이택주, 베이스 수석 안동혁 등과 함께 ‘예음클럽’을 만들어 당시 거의 불모지였던 실내악 운동을 펼쳤습니다. 20여 년 전 손이 떨려서 플루트를 멈추고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지요. 

20여 년 동안 작곡을 했는데 특별히 애정이 가는 작품이 있나요.
오랜 외국 생활과 수감 등 삶의 여러 굴곡 속에서도 한번도 음악을 놓지 않았어요. 20년간 80여 곡을 만들었고 발표한 것은 30~40곡 정도 됩니다. 나중에 들으면 발표하지 말걸 그랬다는 생각도 들어요. 지금도 처음엔 그럴 듯 한데 고치고 싶을 때가 많죠. 2023년 <보랏빛 꽃 그림자> 등 가곡 10곡을 모아, 바리톤 박흥우 선생의 음성으로 무대에 올렸어요. 박 선생은 목소리 좋고 음악성이 뛰어난 성악가로 제 노래 대부분을 부르십니다.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노래도 여럿 만들었는데 가장 최근 작품은 <임진강의 노래>입니다. 민족의 아픔과 화해, 자연의 포용을 담아낸 곡으로 철원 국경선평화학교의 위촉을 받아 만들었습니다. 몇 해 전 만든 <우리겨레>, <디엠지 동산에서>는 지금도 많이 불리고 있습니다. 

❚<우리겨레>와 <디엠지 동산에서>를 들어봤는데, 따라 부르기 쉽고 가사도 좋았습니다. 평화를 염원하는 노래를 만든 이유가 있을까요. 
<우리겨레>의 가사를 보면 “하나 될 금수강산 생각에 내 가슴이 다시 설레고 손잡고 함께 할 날 떠올리며 또 하루가 새롭다”로 시작합니다. 요즘 평화나 통일에 대한 지향점이 많이 흔들리거나 혼선도 많이 오고 세대별로 그런 걸 잘 모르는 분들도 많아 평화, 통일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뜻에서 만들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해방된 지 80년, 분단된 지 70년이 넘었는데 사람들 생각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평화와 통일은 좌나 우를 떠나서 꼭 필요한 시대정신이 돼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노래를 만들어 함께 부를 수 있어 큰 즐거움이고 영광입니다.

6월 6일 코리아 평화의 날에서 선보일 <임진강의 노래>는 대금 연주와 소프라노가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대금이 처음에 1분15초 정도 나오는 데 분위기가 참 좋죠. 6월 행사에서는 음악에 맞춰 무용도 할 겁니다. 한국 무용을 하시는 남성 무용수인데 가사를 생각하면서 안무를 짜고 있습니다. 음악에 무용을 곁들이면 시선이 더 집중되고 좋은 것 같아요. 대금을 처음에 길게 넣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노래는 소프라노 윤인숙 선생님인데 윤이상 선생님의 제자입니다. 연세가 있으신데도 노래를 참 잘하십니다. 

이런 가사를 쓰려면 단순 호기심을 넘어 신념이나 철학 같은 것이 필요할 것 같은데 평화운동이나 남북 관계 같은 데 관심이 많았나요. 
음, 있었겠죠. 다른 분들처럼 희생적인 훌륭한 일을 한 적은 전혀 없지만 '시사저널'과 '객석'을 만들면서 삶이 평화나 화합이란 개념과 멀어질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정지석, 이충재, 안바나바 목사님의 열정적이고 순수하고, 평화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는 모습에 감동받고 작으나마 노래를 만들어 함께 하고 있습니다. 디엠지 접경지역은 몇 해 전부터 1년에 한두 번씩 가보는데 처음엔 철원이 남북으로 분단된 곳인지도 몰랐어요. 북에도 철원이 있다는 걸 알고 ‘남북의 철원 땅이 하나인데 활짝 열리길 바란다’는 가사를 만들었죠.

앞으로 어떤 노래를 만들고 싶은가요.
우리나라가 너무 분열돼 있어 화합할 수 있는 노래를 만들고 싶어요. 남북관계, 동서관계, 좌우관계 등이 극단적으로 치달아 힘을 모을 수 있는 평화 노래를 해보고 싶어요. 외국에선 우디 거스리, 밥 딜런, 피트 시거 등 반전, 평화 노래를 부른 분들의 업적이 대단했잖아요. 제가 개인 홈페이지와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데 새로운 음악채널을 만들어 제 노래를 만들어 올리면서 저도 노래를 좀 해볼까 합니다. 혼자보다는 두세 명이 함께 부르며 70대에 가수로 데뷔해볼 생각입니다. 잘못하면 욕먹기 십상이어서 살살 해보려고요. 

노래로써 세상을 바꾸고 싶은 건가요. 
종교나 정치의 화합 차원에서 표현이 적합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중도가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진보와 보수, 좌와 우의 중간이 아니라 어떤 시대 상황의 정곡을 찌르는 게 중도라고 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노래를 만들어 사회적 공감을 얻고 싶어요. 이 당, 저 당 국회의원 20명이 똑같은 노래를 부르면 모양이 좋을 것 같지 않나요? 평화와 자유가 서로 부딪히는 개념으로 생각하는데 어떤 면에서 동전의 양면처럼 둘 다 꼭 있어야 되는 거잖아요.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양축으로 삼고 환경문제, 생명 문화 이런 주제를 다뤄보려고 합니다.

중도가 사회적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요.
잘못하면 양쪽에서 욕먹을 수 있겠죠. 그런 얘기가 있잖아요. 우리나라에 중도가 어딨어? 맞으면 맞고 틀리면 틀리는 거지, 이런 의미잖아요. 그래서 이쪽은 다 선이고, 저쪽은 다 악이다고 하다 보니 누가 정권을 잡아도 비슷한 부작용이 날 가능성이 높아요. 그래서 저는 개헌의 필요성을 공감합니다. 87년 헌법 자체가 억지로 만들어진 거잖아요. 지금은 승자독식 체제라 서로 원수가 되게 돼있어요. 이건 제도상의 문제라 사회통합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개헌 연구를 본격적으로 했으면 좋겠어요. 

최원영 작가 부부(왼쪽에서 3, 4번째)가 1990년 서울 평창동 자택에서 백건우, 윤정희 부부와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음악 애호가답게 음악인들과 교류가 많았던 것같아요. 백건우 선생과는 40년지기라고 하던데요.
1984년 '객석'을 창간하는데 객석이라는 이름도 백건우, 윤정희 선생님과 설악산에서 상의하며 지었습니다. 윤정희 선생님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파요. 제가 수감 생활할 때 면회를 세 번이나 오셨어요. 품성이 좋고 뛰어난 영화배우는 물론이거니와 음악을 굉장히 많이 아셨죠. 객석 파리 특파원을 하시면서 세계적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 인터뷰를 했는데 지금 봐도 문답이 아주 기가 막혀요. 윤이상 선생과 마이클 잭슨, 스티븐 호킹과 인터뷰 등이 새로 나올 책에 담겼습니다.

최원영 작가.

기업인으로 살았으면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기업인으로 열심히 활동한 건 70년대 후반부터 10년 정도입니다. 1989년 시사저널을 창간하면서 완전히 나왔지요. 당시 기업가로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잘 몰랐던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고 나이 먹은 지금 돌이켜 보면, ‘기업을 하려면 이렇게 해야겠다’, ‘기업가로서 훌륭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있었겠다’는 생각은 들어요. 하지만 그때는 철이 없었고, 기업이라는 것이 여기까지가 한계라고 생각했어요. 기업가로서 누리는 삶이 썩 재미있지도 않았고 할 수 있는 게 한계가 있어 다른 것을 해보자 그렇게 된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굴곡진 삶을 살았는데, 아쉬움은 없나요.
방금 얘기한 것처럼 기업할 때는 철이 없었고요,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부모님한테 효도를 못했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아버님이 85년에 돌아가셨는데 벌써 40년이 지났어요. 세월이 무너지는 느낌입니다. 어머니는 제가 미국에 있었던 2010년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못했어요. 그리고 IMF 당시 회사에 일하시던 직원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주세요. 
지금 『새로운 끝으로』라는 책을 출간 준비 중입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다시 시작은 할 수 없지만 이제라도 잘 정리하면 누구나 새로운 끝은 만들 수 있다는 뜻이 담겼습니다. 지난해 말 출간하려 했는데 계엄령 때문에 늦춰졌어요. ‘새로운 끝’으로 주변 환경에 대한 생명 존중, 인간은 물론이고 동물까지 좋은 생명 문화를 생각하고 있고, 채식의 노래도 만들고 있어요. 평화와 자유를 연결하는 노래 모임이나 카페 같은 것도 만들고 싶은데 좀 막연합니다. 

화제가 DMZ로 넘어가자 최 작가는 거꾸로 인터뷰어가 되어 기자에게 디엠지와 관련한 많은 질문을 쏟아냈다. 이를테면, 디엠지를 개발할 수 있는 권한이 한국에 있는지, 디엠지가 보존되고 있는 건지 망치고 있는 건지, 디엠지 관광은 할 수 있는지, 북한의 디엠지 상태는 어떤지, 디엠지에 유엔평화학교를 만들면 전쟁 가능성이 많이 줄어들텐데 어쩌면 트럼프가 할 수 있지 않을까 등이다. 통일을 반대하는 일부 젊은 층에 대해서도 아쉬움과 쓴소리를 보탰다. “젊은 친구들은 통일을 하면 우리가 손해 본다고 생각하는데 굉장히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어요. 평화와 통일을 향한 노래는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