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도 예술도 늘 늦었지만 끝까지 남을거예요”
나경호의 BOOK회귀선 ➋ 이예숙 팝업북 작가 (77년생, 풍동) 10년 만에 낸 첫 책 『이상한 동물원』 팝업 통해 동물복지에 관심 환기 두 번째 책 출판사 못 구해 직접 출판 팝업북은 읽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연출, 놀이하며 이야기 만들 수 있어
❚어린 시절 인상 깊게 보았던 책이나 장면이 있나요?
창작자로 작가로 책과 관련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제게, 제 인생의 첫 책을 떠올리는 일은 조심스럽고 어려운 일입니다. 남들처럼 제 인생의 첫 책을 말할 때 근사한 제목을 말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당시에는 집에 책이 한 권도 없었습니다. 가난했고 주변에는 저를 위한 무언가가 너무 없었습니다. 늘 심심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런 와중에 집안끼리 사이가 좋지 못한, 별로 친하지 않았던 큰어머니가 어느 날 저희 집에 와 책 두 권을 버리다시피 던져줬습니다. 전집 시리즈 중 2권이었는데 만들기 책과 글쓰기 책이었습니다. 그 두 권을 정말 마르고 닳도록 읽었습니다.
그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월부 책장수를 통해 (열두 달 나눠 책값을 내는) 아동문학책을 들여온 적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는데 엄마가 먹고사는 것도 힘든데 왜 쓸데없는 걸 사왔냐며 아버지와 다투던 기억이 납니다.
학교에 가면 네모난 교실 한 곳에다가 형식적으로 만든 도서실이 있었는데, 졸업할 때까지 도서실 문이 항상 잠겨있었습니다. 학생들은 청소할 때만 자물쇠를 열고 도서실에 들어갔던 기억과 그 도서실 앞을 기웃거리는 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읽을 수 있는 책이 없다보니 그래서 책을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너무 어려운 이야기만 한 것 같습니다. 오늘날 제 삶은 심플합니다. 사람도 많이 접하지 않고 오로지 작업과 산책, 가족을 살뜰히 돌보는 무던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의 저는 만들고 싶은 게 너무 많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타인을 위해 시간을 내고 함께 연대하고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삶에 대한 동경, 존경을 가슴깊이 간직한 채 매일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간단한 본인 소개와 팝업북 작업을 하게 된 계기를 말해주세요.
풍동에 거주하며 장항동에 있는 작업실에서 팝업북(책의 일종으로, 전체 혹은 일부의 페이지를 펼쳤을 때 준비된 그림이 입체적으로 올라오도록 고안된 북아트의 일종)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예술이 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과 누구에게나 다가갈 수 있는 예술을 고민하며 그림책, 팝업북 작업, 팝업북으로 진행하는 마리오네트(1인 인형극)와 그림자극을 왕성하게 하고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7~8평 자취방 겸 작업실을 구해 평생 이곳에서 그림만 그리고 살다 죽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있습니다. 순수미술만 하려다 보니 자연스레 생계에 대한 불확실성과 현실적인 고민으로 이어졌고 이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쳐도 되겠다는 생각에 미술학원을 운영하였습니다. 학원을 하다 일러스트를 배우러 온 비전공자 친구를 통해 출판미술이라는 영역을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책에 그림을 그릴 수 있다니!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고 책을 만들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에 전율했습니다. 당시 저에게는 딱 맞는 옷을 찾은 느낌입니다. 그렇게 2009년부터 동화 표지, 교과서 표지 등 삽화작업을 해오며 15년 동안 일러스트레이터로 작업했습니다. 처음에는 저의 작업이 작게나마 다양한 독자에게 닿을 수 있어 좋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그림을 기간 내에 납품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나의 작업에 대한 열망이 점차 커졌던 것 같습니다.
네모난 책의 물성을 좋아합니다. 책의 물성을 가지고 다양한 실험과 예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출판사들을 만나면, 팝업북은 수작업 공정이 꼭 들어가다 보니 시도 자체가 안되거나 중국과의 가격경쟁이 안 되어 한국에서 만들어진 팝업북은 전무한 상황입니다. 덕분에 출판사와 함께 그림책 작업을 많이 했는데도, 내 그림책을 내야겠다고 마음먹고 10년이 지나 저의 첫 책 『이상한 동물원』이 나왔습니다.
❚사람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책이 있나요?
제가 관심있거나 소장하는 분야가 아무래도 팝업북인데 제가 만든 책 이외에는 전부 외국서적이라 설명하거나 소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른 작가의 책을 소개하고 싶은데 어쩔 수 없이 제 책을 소개해야겠습니다. 제가 만든 첫 책 『이상한 동물원』에서는 어린 주인공이 설레는 마음으로 동물원으로 갔다가 바위 위에 축 늘어져 있는 곰, 기운이 하나도 없는 악어, 멍하니 앉아 있는 얼룩말, 노는 법을 잊어버린 원숭이 등등 주인공과 달리 하나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 동물들을 보며 이상함을 느낍니다.
『이상한 동물원』은 보통의 그림책에 비해 글의 양도 적고, 팝업이 붙어 있는 데다, 병풍처럼 쫘악 펼쳐지기까지 합니다. 글 대신 그림을 통해, 그리고 팝업이라는 물성을 통해 동물 복지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며 철장 안에 갇혀 있는 동물원 뿐만 아니라, 자유롭게 뛰어노는 동물들의 행복한 모습 역시 담겨있습니다. 팝업북 고유의 특성이 잘 간직된 이 그림책은 아이들이 책을 만지고 놀며 스스로 문제점을 고민하고 생각해볼 수 있도록 만든 책입니다.
두 번째 책인 『이상한 구십구』는 그림책 출판사들과 오랜 시간 함께 일을 해왔던 저 역시, 팝업북 특유의 높은 제작 비용과 수작업 등의 이유로 함께 작업할 출판사를 더 이상 찾지 못해 직접 ‘아트앤팝업’이라는 출판사를 직접 차려 출간한 책입니다.
『이상한 구십구』는 기후위기, 멸종위기로 사라지는 동물 친구들의 이야기를 무겁지 않게 귀엽고 친근한 그림으로 제작한 팝업북입니다. 단순히 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책을 병풍처럼 세워서 요리조리 장면을 바꿔가면서 연출할 수도 있고, 잘려진 종이 사이로 빛을 비추면 그림자극 놀이를 하며 이야기를 만들어 갈 수도 있게 설계되어 아이들이 그림책을 입체적으로 경험하고 환경보호에 대한 메시지가 잘 전달되도록 기획되었습니다.
❚책을 통해 삶의 괴로움이나 고단함을 지나거나 위로받은 적이 있다면?
저는 책을 읽는 것보다 책을 만드는 일을 먼저 시작한 경우라, 독자보다는 작가로 책을 접한 경험이 강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의 작업과 관련된 책을 많이 소장할 수밖에 없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그림책으로부터 다가오는 위로와 따뜻함을 좋아합니다. 호무라 히로시라는 작가의 <눈 깜짝할 사이>라는 그림책이 떠오릅니다. 이 그림책은 갈래머리를 한 소녀의 그림으로 시작하여 삶에서 포착할 수 있는 찰나의 순간들, 예를 들어 고양이의 짧은 움직임, 찻잔 속 각설탕이 녹는 시간 등이 한 장 한 장 아름답게 표현되다가 마지막 장에는 늙어버린 할머니의 모습이 나옵니다. 인생이 찰나로 지나간다는 의미가 마치 한편의 시처럼 표현할 수 있구나를 느낄 수 있는 그림책입니다.
❚남은 생애의 시간을 어찌 보낼지 계획이 있습니까? 존엄하게 늙어죽을 방법이 있을까요?
저는 결국 예술이 삶을 바꾼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규정화된 사회의 선입견에 맞춰 사는 게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살다보면 사회의 권위와 온갖 강요로부터 훼손당하거나 방해받는 일이 줄어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결국 존엄에 이르지 않을까요?
과거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해 절박하게 삶을 살았던 어른들에게서 예술은 부자들이나 하는 것이고 그림은 쓸데없는 짓이니, 여자는 당장 공장에 취업해서 가족 뒷바라지라도 하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커왔습니다. 이런 과거의 기억을 떨치기는 쉽지 않습니다
돌아보니 저의 삶도 예술도 지지나 응원을 받지 못한 기억이 많습니다. 게다가 저의 모든 시작은 항상 늦었습니다. 늦은 만큼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삶에서도 예술에서도 저는 늘 늦었지만 그럼에도 항시 제가 갈 수 있는 최대한까지 갔고 끝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훗날 죽을 나이가 다 되어서도 여전히 느리지만 저의 창작과 예술을 끝끝내 하고 있는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저의 존재와 저의 예술이 끝끝내 남아있는 이런 삶과 죽음이 저에게는 곧 존엄입니다.
❚나의 삶을 책으로 만든다면 제목으로 무엇이 좋을까요?
죽기 직전까지 작업하다 죽을 겁니다. 그렇게 작업하는 과정에서 기어코 제가 드러내지 않을까요? 저의 작업에는 결국 지구, 생명, 공존에 대한 이야기, 세상에 나 하나가 아니라 함께 있다, 같이 있다는 메시지가 담기길 고대합니다. 저의 삶을 책으로 만든다면 책 제목은 아마 <함께 사는 삶>이 될 겁니다. 제게 주어진 시간과 삶을 나를 위해서만 쓰는 게 아니라, 주변 친구와 이웃들에게 곁과 여유를 줄 수 있는 삶을 살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