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오로라와 함께한 374일… “남극 안전 지키고 왔습니다”
『남극 일 년 살기』 펴낸 김성한 고양소방서 소방관
서울서 1만2740㎞ 남극 장보고기지
육상안전파견대원 4번 도전만에 선발
자국연구소 둔 나라 40여개 국 불과
일기를 책으로, 인쇄는 수해성금으로
[고양신문] “남극에서 영하 20도면 따뜻한 날씨입니다. 가장 추운 날엔 38도 이하까지 떨어진 적도 있으니까요. 세찬 바람까지 불면 체감온도는 훨씬 혹독한 지경으로 떨어집니다. 잠깐 장갑을 벗었다 껴도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듯한 고통이 10여 분 동안 이어지곤 했어요.”
고양소방서 화전119안전센터에서 근무하는 김성한 소방관의 체험담을 듣다 보니 무더위가 싹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2022년 12월부터 2023년 12월까지, 남극 장보고과학기지 제10차 월동연구대 소속 육상안전대원으로 파견돼 374일 동안 활동했던 날들의 에피소드들을 실감나게 들려줬기 때문이다.
20년째 고양시에 살고 있는 김성한 소방관의 삶은 늘 새로운 도전의 연속이었다. 7년 동안 명지병원 간호사로 일하다 소방관이라는 새로운 직업으로 이직했고, 전국의 소방대원 지망생 중 단 한 명만 선발하는 남극기지 파견대원에 도전해 3전 4기 만에 꿈을 이뤘다.
김 소방관은 남극기지에서 동료 대원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중책을 수행했다. 이동이나 장비 운용 시 안전을 확보했고, 응급의료 서비스도 제공했다. 1년간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남극에서의 체험을 정리해 지난 4월 『남극 일 년 살기』라는 흥미로운 책을 출간했다. 혹독한 환경을 이겨내며 임무를 수행하는 남극기지 대원들의 이야기가 생생한 사진과 함께 실린 책은 독자들의 호응을 얻으며 초판이 완판됐다. 김 소방관은 최근 책 판매로 얻은 인세를 수해복구 기금으로 써 달라며 전국재해구호협회에 기부해 또 한 번 감동을 전했다.
선발 공지 보는 순간 가슴 뛰어
김성한 소방관이 ‘1년 살기’를 하고 돌아온 남극 장보고기지는 서울에서 무려 1만2740㎞ 떨어진 동남극 연안에 자리하고 있다. 가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갈 수 없는 남극대륙. 소방관 신분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수마다 단 한 명 뽑는 육상안전 파견대원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선발공지를 보는 순간 가슴이 뛰었어요. 세상의 끝에 가보고 싶다는 동경이 있었거든요. 2019년부터 도전을 시작했는데, 처음 두 번은 서류심사에서 떨어졌고 2021년에는 최종면접까지 올랐죠. 자격증과 스펙을 좀 더 보충한 후 4번째 도전 만에 드디어 꿈을 이뤘습니다.”
파견대원이 되기 위해 김 소방관은 많은 준비를 했다. 간호사 경력과 응급구조사 자격증은 기본이고, 해양에서 보트를 운전할 수 있는 동력수상레저와 소형선박, 드론 조종 자격증도 취득했고, 영어 인터뷰 준비에도 적잖은 시간을 쏟았다. 합격통지서를 받고 뛸 듯이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헤어져 있어야 하는 가족들에게 많이 미안하기도 했단다.
“처음에는 아내가 꼭 가야 하냐며 섭섭해했지만, 두세 번 떨어져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 가고 싶으면 꼭 합격해서 잘 다녀오라’며 응원해줬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고맙죠.”
쇄빙선 타고 8일 만에 남극기지 도착
김 소방관은 쇄빙선 아라온호를 타고 처음 기지로 향할 때의 설렘을 잊지 못한다.
“뉴질랜드를 출발해 장보고 과학기지까지 가는 데 8일이나 걸렸어요. 어느 순간 유빙 위에 펭귄들이 보이는 거예요. 이제 진짜 남극에 왔구나, 실감이 나더라고요.”
2022년 12월 3일 드디어 남극대륙에 첫발을 디뎠다. 우리나라와 계절이 반대인 남극은 12월에 24시간 해가 지지 않는 백야가 이어진다. 한밤중에도 온 세상이 눈부시게 빛나는 모습은 오묘하고도 신비했다. 반대로 온종일 해를 볼 수 없는 극야 기간에는 밤하늘을 수놓는 휘황찬란한 오로라를 보며 감탄사를 터뜨리기도 했다. 극야가 끝나는 8월 중순, 드디어 태양이 먼 산 끄트머리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에는 울컥 감동이 밀려오기도 했다.
펭귄들은 남극생활의 단조로움을 달래 준 반가운 친구였다. 펭귄마을로 조사를 갔을 때는 헬기 주변을 펭귄들이 빙 둘러싸고 서로가 서로를 구경하기도 했다.
혹독한 눈폭풍 만나 방향감각 잃기도
낭만적인 기억만 있었던 건 아니다. 기후조건이 워낙 가혹하다보니 조금만 방심해도 위험한 상황에 놓이곤 했다. 한번은 세찬 바람이 부는 캄캄한 밤중에 생활동에서 100m 떨어진 안전장구동에 갔다 와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익숙한 거리였기에 별일 없겠거니 문을 나섰는데, 몇 걸음 걷다가 세찬 눈폭풍에 휩싸이고 말았다.
“사방에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고, 방향감각마저 혼란스러웠어요 더 이상의 전진을 포기하고 동행했던 동료와 함께 발길을 돌려 겨우 돌아왔는데, 다음날 보니 엉뚱한 방향으로 갈 뻔했던 거예요. 판단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아찔한 순간이었죠.”
대한민국 위상 보여주는 장보고기지
김성한 소방관은 우리나라가 남극에 연구기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커다란 자부심을 표했다. 남극에서 대기, 지구물리, 우주 기상 등 여러 과학분야의 조사와 연구 활동을 수행하는 장보고 과학기지는 해양수산부 산하 극지연구소(KOPRI)가 운영하는데, 자국의 연구소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40여 개 국에 불과하다. 때문에 가끔씩 과학기지를 갖지 못한 나라의 연구활동을 지원하는 일도 수행한다는 게 김 소방관의 설명이다.
“한번은 대만대학교 연구팀을 지원해서 해발 3000m 되는 산악지대에 간 적이 있는데, 갑자기 기상이 악화돼 장시간 고립되는 상황을 맞았습니다. 추위에 떨며 헬기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대만대 학생이 눈덩이로 이글루(얼음집)를 만드는 거예요. 이유를 물었더니 ‘대만은 남극기지가 없어서 내가 최초로 만드는 것‘이라고 답하더라고요. 헬기가 도착하자 급하게 배낭에서 골판지를 꺼내 ‘타이완 스테이션(Taiwan station)’이라고 써 붙이고는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남극에 과학기지를 갖고 있다는 것이 다른 나라에겐 얼마나 부러운 일인지를 실감했죠.”
극한의 추위가 상존하는 남극이지만, 역설적으로 전 지구적 온난화와 기후위기를 실감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뉴질랜드에서 남극까지 갈 때 원래는 항공기를 타고 가는 계획이었죠. 하지만 비행기가 착륙해야 할 해빙(바다 얼음)이 예년보다 일찍 녹는 바람에 비행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또한 기지 주변의 거대한 빙산들이 녹아 바다로 떨어지나가는 속도도 과거에 비해 빨라졌다는 얘기를 전해 듣기도 했습니다. 남극다운 모습이 유지돼야 할 텐데, 우려스럽죠.”
귀국하며 가장 반가웠던 매운떡볶이
모든 환경이 제한된 남극에서 일 년을 버티다 돌아오니, 일상의 모든 것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김 소방관은 “가장 반가운 건, 먹고 싶은 음식을 언제든 배달시켜 먹을 수 있는 우리나라의 완벽한 배달 시스템”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남극에서 생활하는 동안 매운떡볶이가 정말이지 간절하게 그립더라고요. 인천공항으로 귀국하던 날, 마중나온 아내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전화로 매운떡볶이를 주문해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먹었어요. 눈물 날 정도로 맛있었습니다(웃음).”
인세 뜻깊게 쓰고파 수해복구성금 쾌척
김성한 소방관은 남극에서의 소중한 체험을 개인의 기억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남극 일 년 살기』라는 책속에 알뜰하게 담아냈다. 책을 낼 수 있었던 건 남극 생활 내내 지속한 일기쓰기 덕분이었다.
“처음에는 의욕적으로 매일 A4 한 장 정도를 채웠는데, 나중에는 몇 줄 메모 정도를 끄적이기도 했어요. 그래도 꾸준히 일상을 기록한 덕분에 남극에서의 기억들을 되살릴 수 있었죠. 고맙게도 소방 관련 매체 ‘119플러스 매거진’의 요청으로 1년 동안 남극 체험기를 연재했고 책까지 출간했습니다. 동료들과 독자들의 반응이 좋아 너무 감사합니다.”
책 출간은 청소년기 작가를 꿈꾸기도 했던 김 소방관에게 뿌듯한 성취였기에, 자신이 쓴 글로 받은 첫 인세 역시 남다른 의미일 수밖에 없었다.
“큰돈은 아닐지라도 뭔가 뜻깊게 쓰고 싶었어요. 마침 극한 호우로 피해가 급증하는 시기에 첫 인세가 딱, 들어왔어요. 고민할 것 없이 제 돈 조금 보태 입금 당일에 기부를 했죠.”
화전119안전센터 구급대원인 김성한 소방관의 주 업무는 응급처치와 환자이송을 위한 현장출동이다. 여기에 구급전문교육사, 소방안전교육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간호사에서 소방관으로, 남극기지 대원으로, 책을 펴낸 작가로 늘 새로운 꿈을 향해 나아가는 김 소방관의 다음 도전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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