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기도, 침묵의 고요… 같은 듯 다른 '빛'의 해석
방혜자·나희균 특별기획전 <빛의 숨결>
한국 현대미술 1세대 여성작가
평생 몰두한 미적 탐구 한곳서 감상
9월 21일까지, 양주 안상철미술관
[고양신문] 빛에 숨결이 있다면, 화가는 그것을 어떻게 그려낼 수 있을까. 빛은 한 줄기 바람처럼 스치고, 심장박동처럼 고동치며, 때로는 허공을 가르며 내려앉는다. 양주에 자리한 안상철미술관(관장 안재혜)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기획전 <빛의 숨결>은 빛이라는 주제를 평생 탐구해온 두 작가, 방혜자와 나희균의 작품을 통해 그 대답을 건넨다.
1930년대에 태어나 프랑스에서 공부한 두 여성 작가는 한국 현대미술 1세대다. 전후 프랑스 화단의 신경향으로 떠오른 앵포르멜(비정형) 사조를 습득한 그들은 세계 무대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구축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60여 년 여정에서 빛을 주제로 한 20여 점의 주요 작품들을 선보인다.
방혜자는 한 줌의 빛으로 세상을 밝히고 평화를 주고 싶다는 신념으로 평생 빛을 그리는 데 몰두했다. 그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샤르트르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했고, 퐁피두센터에도 작품이 소장된 세계적인 작가다.
방 작가는 한지, 닥종이, 황토 등 전통 재료에 천연 안료를 덧입히며 작품 활동을 했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대표작 ‘빛의 숨결’은 닥지에 주름을 잡고, 그 틈 사이로 안료를 스며들게 한 후, 다시 펼쳐내는 과정을 반복해 완성한 작품이다. 작가는 ‘빛의 숨결’을 가로와 세로로 각각 그려냈다. 가로는 심장박동기의 심박수 초음파처럼 보이고, 세로는 비와 바람처럼 허공을 가른다. 그림들은 대지에 스며드는 빛의 호흡처럼 느껴진다.
2m가 넘는 대작 ‘우주의 빛’에서 우주는 꿈꾸는 존재다. 마치 NASA의 우주 배경복사 사진을 연상케 하는 이 작품은, 빛이 곧 존재의 근원이자 우주의 언어임을 암시한다. 작품 ‘빛의 탄생’은 눈동자처럼 보인다. 밝고 화려한 빛이 점점 진하게 퍼져 나가서 화면을 가득 채운다.
방 작가는 "우리는 빛에서 와서 빛 속에 살다가 빛으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그에게 빛은 시각적 요소를 넘어선 정신적이고 신성한 차원이다. 작가는 회화를 통해 영혼의 숨결까지 그려냈다.
나희균 작가는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1955년 프랑스로 유학길에 올랐다. 파리 국립미술학교에서 수학하며 20세기 전반 유럽의 주요 미술 경향을 두루 습득했다. 이후 구상과 추상, 회화과 조각, 평면과 입체를 넘나들며 유채, 수채, 한지, 금속, 네온, 오브제 등 재료와 기법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실험을 계속했다.
94세의 그는 지금도 여전히 붓을 놓지 않고 있다. 그의 작품 ‘바라보다’는 관람객들에게 작품을 바라보게 하는 마술을 부린다.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 '바라보는 시간' 자체를 응시하게 만든다.
‘소금이 꽃핀다’ 연작은 햇빛이 바닷물과 만나 이루는 현상을 그린 작품들로, 모래를 화면에 부착해 아크릴 물감과 어우러지도록 했다. 태양이 바닷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만들듯 작가는 물감으로 작품을 응축해 냈다. 기하학적으로 구축된 화면은 마치 염전 같기도 하고 소금 결정체의 단면 같기도 하다. 빛과 소금이라는 성경의 은유가 화폭에서는 직유로 그려지고 있다.
초기 작품은 뚜렷한 사각형의 구조였다가, 후기 작품들은 사각형과 삼각형이 어우러지는 형태로 변화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질서가 무질서로 변하는 엔트로피 법칙을 닮아있다. 가톨릭 신자인 작가는 ‘바다는 빛이 있어야만 소금이 된다’는 명제를 작품에 담은 듯하다.
‘짚’ 연작은 작가가 70대 중반에 완성한 시리즈로, 알곡을 다 털어낸 짚더미를 자신에 비유한 작품이다. 바닥에 놓여 있는 지푸라기들이 할 일을 다한 작가의 모습과 닮았다. 작가는 육신의 허망함과 시간의 부질없음을 이야기했다지만, 보는 이들은 그 안에서 삶의 충만함과 인생의 쓸모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번 전시는 두 작가가 ‘빛’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방식으로 그려냈는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특별한 자리다. 방혜자의 빛이 영혼의 기도로 승화됐다면, 나희균의 빛은 침묵의 고요로 미화된다. 전자는 생명의 숨결로, 후자는 관조의 수행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서로 다른 결의 빛은 하나의 울림으로 수렴된다.
안상철미술관의 김자영 큐레이터는 “방혜자와 나희균은 한국전쟁 이후의 시대를 살아낸 동시대 작가이자, 프랑스 유학을 통해 국제적인 안목을 넓힌 예술가”라면서 “각기 다른 예술적 여정을 걸었지만, 두 사람 모두 빛을 세계와 존재의 근원으로 삼아 평생 탐구했다.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으나 서로 다른 방식으로 ‘빛의 언어’를 화폭에 새긴 두 거장의 만남은, 우리에게 내면을 비추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깊은 성찰의 기회를 줄 것”이라고 소개했다.
여름의 끝자락, 빛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그림 여행을 떠나보기를 추천한다. 야외에 내리 쬐는 햇빛과 작품에서 발산하는 빛에서 서로 대비되는 에너지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미술관 앞에 펼쳐진 푸르른 잔디밭과 탁 트인 기산저수지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이번 전시는 9월 21일까지 이어진다.
안상철미술관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권율로 905
문의 031-874-0734 (월·화 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