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에서 우토피아로

<김경윤의 가파도 편지 19> 

2025-08-25     김경윤 인문학자
김경윤 인문학자

[고양신문] 기원전 6세기 중국 노자가 남긴 『도덕경』에서 그는 정치적 이상향으로 ‘소국과민(小國寡民)’을 이야기했습니다. 춘추전국시대의 중앙집권, 법가적 통치에 대한 반성적 상상으로 ‘반(反)제국적 모델’을 그려낸 것이었지요. 절제된 기술 사용, 소욕과 자족, 안정적인 작은 공동체, 팽창주의와 전쟁을 반대하는 노자의 상상력은 오늘날에도 많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2000년도 훌쩍 넘어 16세기에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썼습니다. 노자가 시로 유토피아를 그렸다면, 모어는 대화체 산문으로 유토피아를 그렸는데, 그 상상의 배경은 ‘유토피아’라는 섬나라였습니다. 그 나라는 사유재산을 폐지하고 공동생산과 분배를 기본으로 하고, 하루 6시간 노동에 모든 구성원에게 기본 교육을 실시합니다. 금이나 보석 따위를 하찮게 여겨 변기나 노예의 사슬로 사용하지요. 종교 다원주의를 주장하고 전쟁을 반대합니다. 노자의 상상력이 산문으로 바뀐 것만 같은 느낌입니다.

‘유토피아’의 어원은 그리스어 ‘ou-topos(없는 곳)’와 ‘eu-topos(좋은 곳)’의 말장난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없지만 좋은 곳'이라는 이중 의미를 품습니다. 이 상상력을 좀 더 확장시켜 봅니다. 사람들은 보통 ‘유토피아(utopia)’라고 말하면 실현불가능한 좋은 곳을 떠올립니다. 그래서 이 말을 원래를 의미를 품은 채로 비틀어 ‘우토피아(eutopia)’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어떨까요. 영어로는 u와 eu로 한 단어가 들어간 것에 불과하지만, 뜻은 ‘없는’에서 ‘좋은’으로 바뀝니다. 유토피아는 실현불가능한 영감이지만, 우토피아는 실현가능한 낮꿈이 됩니다. 예수의 기도처럼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희망하며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상향으로 만들 수는 없지만, 좋은 곳으로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내가 사는 곳을 좋은 곳으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구상하는 것은 민주시민의 일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웅이 이 세상을 구원하기를 바라는 시대를 지나, 우리 스스로가 이 세상을 구원하는 권리와 의무를 가진 민주주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선거 때 잘 뽑은 대통령 한 사람이 대한민국을 잘 운영하기를 바라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운영원리의 가장 중요한 국민주권의 정신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물론 선거로 뽑은 민주정부가 잘 되기를 바라고, 지지와 응원과 후원을 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내가 뽑아줬으니 이제 네가 잘해봐’라는 태도는 방관에 불과합니다. 일상의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것에는 반드시 감시와 견제, 지지와 응원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우리가 사는 곳을 좋은 곳으로 만드는 노력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노자나 모어는 소욕과 자족, 평안과 평화의 작은 공동체로 상상했습니다. 우리는 이 유토피아적 상상력을 지방자치와 평화 생태적 삶을 실현가능한 좋은 곳 만들기로 실천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내년도에는 지방선거가 실시됩니다. 벌써부터 지방선거를 준비하는 분주한 움직임이 있습니다. 이 움직임이 단순히 당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토피아’를 꿈꾸는 청사진 만들기를 병행하는 공동체적 움직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좋은 꿈을 꾸고, 좋은 곳에서 살 수 있는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좋은 나라에서 좋은 꿈을 꾸고, 좋은 곳을 만드는 노력은 늘 있어야 합니다. 자신부터 좋은 꿈을 꾸고, 가족 구성원과 좋은 관계를 맺고, 지역 공동체 구성원과 좋은 곳을 만드는 상상력과 실천력이 늘 함께 하는 아름다운 사람을 돼야겠습니다. 건승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