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우리말, 그런 건 없다

[안희곤의 손에 잡히는 책] 4.사연 없는 단어는 없다 언어는 변화하고 뒤섞이는 존재 우리말 단어와 어휘에 얽힌 문명교류, 혼종의 흔적 제시 사회 과학 역사 철학은 일본 번역어 순우리말 집착 언어순혈주의는 인종주의, 국수주의 빠질 수 있어

2025-08-25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사연 없는 단어는 없다 (2025),   장인용 지음,  그래도봄 발행

[고양신문] #1 우리는 단지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능력이나 인격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지인을 주변에 몇 명쯤 두고 있다. 자신을 개무시하는 나자렛 고향 사람들을 두고 “예언자도 고향과 집안에서만큼은 존경받지 못한다”(마태오 13,57)고 섭섭함을 토로한 예수의 말을 떠올리는 건 너무 과할까? 이 책 『사연 없는 단어는 없다』의 저자 장인용이 그러하다. 내게는 출판계의 큰 선배이고, 이제는 저술가로서 안경 고쳐 쓰고 읽게 되는 책을 여러 권 썼지만, 여전히 사석에서는 허물없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깎아내리기 일쑤인 분이다. 그의 최근작을 소개함으로써 그동안 선배를 놀려먹은 약간의 빚을 덜고자 하는데, 사실은 빚을 덜려는 의도보다 책 자체가 다른 사람에게 널리 소개하기에 충분한 가치를 가진 게 더 큰 이유일 것이다.
저자 장인용은 대만에서 중국미술사를 전공했고, ‘지호’라는 유명 출판사를 오래도록 운영하다가 지금은 저술가로 인생 후반기를 보내고 있다. ‘중국미술사’라고 하지만 그 기나긴 역사를 모두 공부할 수는 없고, 갑골문과 금석문 등의 초기 상형문자가 전공 분야다. 아시다시피 ‘서예’나 ‘캘리그래피’라고 부르는 분야는 그 소재인 텍스트만큼이나 문자의 예술적 재현을 주목적으로 하고 있다. 한자의 초기 형태인 갑골문과 금문(청동기 등에 새긴 문자) 또한 그러하니, 중국미술사의 한 장을 차지하는 게 당연하다. 저자의 미술사 공부가 문자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이제는 우리말의 수많은 어휘에 대한 연구로 이어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겠다. 
오래전에 저자와 함께 전국의 지명이나 고유명사의 유래를 한참 떠들다가, “형, 이렇게 술자리에서 소비하지 말고 책을 한 번 써보는 게 어때?”하고 제안한 적이 있다. 말하자면 『지명고』(地名考)를 내보자는 의견이었는데, 그로부터 수년이 흐른 후에 불쑥 이 책이 나와 버렸다. 배신자… 나와 출판하기로 해놓고…. 그러나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이 책은 ‘지명고’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말의 깊고 풍부한 수원을 이루는 온갖 단어와 어휘들을 다루고 있었다. 단어의 유래와 변천사는 물론이고 언어에 얽힌 역사와 문화, 나아가 언어는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인문학적 사색까지,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솔찬했다. (이 ‘솔찬하다’라는 말도 ‘수월치 않다’는 말이 변한 것으로, 만만치 않다는 뜻이다.)

한자에서 유래된 우리말의 상당수는 뜻하지 않은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띄어쓰기를 하지 않은 ‘동시흥 분기점’이 ‘동시 흥분 기점’으로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거나, 지금은 용암초등학교로 바뀐 부산 기장읍 대변리(大邊里)의 대변초등학교.
전남 구례의 방광(放光)마을은 우리말 어휘의 복잡하고 중의적인 특징을 드러내는 재미있는 사례이다.

#2 배현진 국민의힘 의원이 문체부 장관 청문회에서 ‘소정(所定)의 절차’를 거쳤다는 말을 이해 못하여, 남들은 엄청난 고난의 절차로 취업하는데 그깟 소정의 절차로 자녀가 취업했다고 후보자를 비난한 일은 요즘 우리말이 겪고 있는 수난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심심한 사과’를 진정한 사과가 아닌 ‘심심하다’는 뜻으로 오해한 경우, 학교 알림장의 ‘중식 제공’을 제대로 된 점심이 아닌 짜장면이나 먹이는 것으로 해석한 학부모의 경우 등 이런 사례는 차고 넘친다. ‘동시흥 분기점’을 ‘동시 흥분 기점’으로 읽는 것은 웃음이라도 주지.
원래 언어란 사회적 의사소통을 위해 생겨난 것으로 ‘의미의 공유’를 최소한의 조건으로 한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의 단어로 같은 의미를 공유한다는 대전제 자체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알고 쓰는 단어들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번쯤 짚어두는 것은 ‘시민’이라는 공적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일 것이다.
문제는 어휘력이 부족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게 아니라는 데 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모르는 말투성이고 새로운 말들도 매일처럼 생겨난다. 정말 문제는 다른 사람의 말과 진의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 지금의 사회적 풍조에 있다. 우리는 몇몇 단어를 모른다고 해서 상대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사적 공간에 고슴도치처럼 웅크린 채 타인에 대한 적대감과 혐오감을 발산하는 이들에게는 더 이상 남의 말을 깊게 들을 여유가 없다. 언어뿐만 아니라 사회적 규칙과 유무형의 공유자산이 모두 사유화되고, 우리의 삶 자체가 원자화, 분절화되고 있는 것은 앞서 든 사례와 같이 언어생활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 

#3 그러나 이 책 『사연 없는 단어는 없다』가 이런 사회학적 문제의식을 전면에 내세운 책은 아니다. 이 책은 우리말, 우리 단어의 탄생과 변천을 통해 공유재로서의 우리말에 대한 한층 깊이 있는 이해를 도우려는 데 목적이 있다. 우선 지명에서 시작해보자. 
고양시에도 있고 서울 마포구, 의정부에도 있는 ‘가좌동’이라는 지명은 ‘가재골’이라는 순우리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가재’를 적을 한자어가 없다보니 가좌(加佐 또는 佳佐)라는 한자를 음차해서 붙인 경우다. 일산서구에도 있고 파주시에도 있는 탄현동 역시 그러하다. 숯막이 있던 고갯마루를 일컫던 ‘숯고개’가 탄현(炭峴)이 되었는데, 산이 있어 나무를 쉽게 지고 내려올 수 있고, 민가에서는 멀리 떨어져서 화재의 위험이 없는 바로 그런 고개에 숯막이 있었다. 그래서 계곡물이 차고 맑아 가재가 살던 가좌동과 숯을 구웠던 낮은 고갯마루의 탄현동이 전국에 산재하게 된 것이다. 이제 가좌동, 탄현동, 모래내 같은 지명을 보면 그 지형과 우리네 살림살이를 금세 짐작해볼 수 있다. 
언어는 우리의 삶처럼 끝없이 변하고 뒤섞이는 것이다. 이런 특징은 일제강점기를 거친 우리말에서도 여러모로 확인되는데, 깡통이나 깡패는 영어의 ‘캔’과 ‘갱’이 일본을 거쳐 우리말 어미와 결합한 경우이고, 가방이나 구두는 아예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우리말에 들어온 일본어다. 지금 우리는 국어의 순혈성과 민족의식을 내세워 일본말이라면 질색을 하지만, 사회, 과학, 역사, 철학 같은 말이 모두 일본에서 고안된 번역어라면? 서구 근대문화를 가장 일찍 받아들인 일본이 언어야말로 그 문화를 차용할 수단이자 입구로 보고 국가적 과제로 번역에 힘쓴 일은 『번역어의 성립』이나 『번역과 일본의 근대』 같은 책에 잘 설명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부 기자의 출입처 순회를 이르는 사쓰마와리(察廻), 건축현장의 단도리(준비)나 가다(틀), 이은재 전 의원이 내뱉은 겐세이(견제)나 뿜빠이(분배)처럼 은어나 비속어로 취급받는 일본어까지 받아들일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4 다시 말하지만 언어는 늘 변화하고 뒤섞이는 혼종적 존재다. 그렇다고 해서 순우리말로 여기는 낙지가 락제(絡蹄, 길게 늘어진 발)에서 왔고, 사냥 역시 산행(山行)이 변한 것이며, 대추가 대조(大棗)에서 왔다는 것을 하나하나 알아둘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순우리말 아닌 우리말까지 ‘순우리말’이라는 틀에 가두고서 언어순혈주의를 고집하는 경우다. 걸핏하면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와 우리말 사랑을 내세우는 언어순혈주의는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언제든 인종주의나 국수주의로 바뀔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다. 우리말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계에서 유례없는 독립 어족으로 분류되면서도 다른 언어에 흡수되지 않은 우리말의 고유성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고, 그런 언어를 통해 우리들의 말글살이를 더욱 풍부하게 발전시켜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런 의사소통의 역할과 과학적으로 설계된 한글의 빼어난 기능을 보존한다는 것이, 우리말에 들어온 수많은 이질적 요소와 언어의 생생한 변화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와 배치되는 건 아니다. 
흔히들 민주주의는 일정한 경제적 수준과 시민의 교양을 전제로 해서만 성립 가능하다고 말한다. 시민의 교양이란 결국 시민의 언어생활과도 불가분의 관계일 텐데, 같은 어휘를 공유하고 그 말로써 서로 의사소통하고 논쟁하고 합의하는 과정이 없다면 민주주의적 원리도 성립하기 어려울 것이다. 
책을 소개하는 마지막 결론이 너무 심각하다. 이 책이 이런 정치적 주장을 담은 것은 아니다. 아무 페이지나 펼치면 우리말 단어와 어휘에 얽힌 기상천외한 이야기들을 바로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김진해 경희대 교수는 이 책을 이렇게 추천한다. “이 책은 (…) 사라져 없어진 말을 훈고학적으로 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흔하게 쓰는 말에 새겨진 문명 교류와 혼종의 흔적을 제시하니 (…)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렇다. 읽는 재미가 정말 쏠쏠하다. 

안희곤 / 사월의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