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을 '장군'이라 불러야 하는 이유
[기고] 만주여행을 다녀와서
[고양신문] 고양신문이 주최한 일주일간의 만주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가장 큰 소득은 ‘광개토대왕비’와 ‘백두산 천지’ 그리고 ‘시인 윤동주’와 ‘군인 안중근’의 삶의 궤적을 살펴본 일이다.
여행의 대미를 장식했던 것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거사 현장인 ‘하얼빈역’과 ‘안중근의사기념관’ 답사였다. 이곳에 남겨진 그의 유품을 보며 나는 그저 모골이 송연했다. 죽는 날까지 안중근은 자신의 신분을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고 밝혔다. 사형이 집행되던 날 호송관인 일본인 간수에게 직접 써 준 휘호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에도 그의 사상과 신념이 잘 드러나 있다.
‘의사(義士)’는 무력으로 나라를 위한 큰 공적을 세운 사람을 말하며, ‘열사(烈士)’는 직접적인 무력 행동은 안 했어도 죽음으로 정신적 저항의 위대성을 보인 사람을 일컫는다. 의사의 조건이 되는 총이나 칼의 ‘무력’을 흉기가 아닌 ‘의로운 행위’로 판단한 것이다. 팔이나 다리가 없는 사람들이 착용하는 의료 보조 기구를 ‘의수(義手)’나 ‘의족(義足)’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들에게 보조 기구는 가짜 팔다리가 아니라 생명을 위한 ‘의로운 도구’이기에 ‘의수’와 ‘의족’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중근은 ‘독립운동’을 한 의사가 아니라 ‘독립 전쟁’을 한 군인이다. 그러므로 안중근은 ‘의사’가 아닌 ‘장군’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몇 해 전 ‘영웅’이라는 안중근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보고서 감상평을 올린 일이 있다. 어느 신학자가 글의 내용 중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에 대하여 실존하지 않는 허구이며 의도적인 영웅 만들기라고 주장하였다. 과거 자신이 쓴 논문의 당위성을 주장하고자 <대한매일신보>의 일부 기사를 인용하며 편지 말미에 내세(來世) 운운한 기사는 카톨릭 신자인 모친의 신앙과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자신의 종교관만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단견이며, 당시 민중의 시대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졸견이다. 특정 종교의 교리 이전에 당시의 민중들에게 ‘전생’이나 ‘내세’ 운운하는 윤회설은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이고 일상의 언어였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안중근의사기념관에는 1910년 1월 30일 자 <대한매일신보>의 ‘놀라운 부인 시모시자(是母是子)’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존되어 있다. ‘시모시자(是母是子)’란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란 의미이다. 본 기사에는 “안중근이 한 일은 우리가 이미 놀라고 있지만, 그 어머니의 사람됨도 한국에 드문 인물이다”라고 하며, 항소를 포기하고 수의를 지어 보낸 편지의 내용과 행적을 치하하고 있다.
편지의 존재가 실존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런 역사적 사실 자체가 없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매우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다. 이미 항소를 포기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라며 수의를 지어 보낸 모친께서 이 정도의 편지는 얼마든지 작성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시신조차 유족에게 전해주지 않은 일제가 편지를 은닉하거나 폐기하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편지가 어떤 경로에서 유실되었을지는 몰라도 동생들의 면회와 관계자들의 구전을 통해 편지의 내용이 여러 사람에게 회자되었을 가능성을 결코 배제할 수는 없다. 자료를 조작해서까지 의도적인 영웅 만들기를 해서도 안 되겠지만 개연성이 충분한 타당한 사유조차 사료가 남아 있지 않다는 것만으로, 사건 자체를 부정하거나 폄하를 할 이유는 없다. 당시 각국의 인사가 안중근 장군을 추모하며 칭송하는 글을 모아봤다.
장제스 총통 - “7억 중국인이 하지 못하던 일을 한 명의 조선인이 해냈다.”
손문 – “공(功)은 삼한을 덮고 이름은 만국에 떨쳤노라. 삶은 백 세도 못 살았지만 죽음은 천추에 빛나도다. 약한 나라는 죄인이요 강한 나라는 재상이라. 그러나 처지를 바꾸면 이토 또한 죄인이다.”
진독수 – “나는 청년들이 톨스토이와 타고르가 되기보다 콜럼버스와 안중근이 되기를 원한다.”
안중근을 조사했던 일본 검사 - “일본인으로서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안중근은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다.”
루쉰(魯迅)의 스승이었던 중국의 석학 장타이옌(章太炎)은 안중근을 이렇게 평하였다. “안중근은 조선의 안중근, 아시아의 안중근이 아니라, 세계의 안중근이다.”
1910년 4월 16일 영국의 「더 그래픽(The Graphic)」에 소개된 기사이다.
“그는 이미 순교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준비 정도가 아니고 기꺼이 아니 열렬히 귀중한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싶어 했다. 그는 마침내 영웅의 왕관을 손에 들고는 늠름하게 법정을 떠났다.”
중국의 속담이 된 말 가운데는 이런 것도 있다.
“혁명가가 되려거든 손문처럼 되고, 대장부가 되려거든 안중근처럼 되라.”
내가 안중근을 영웅으로 추모하는 까닭은 민족의 원수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기 때문이 아니다. 자기의 목숨보다 민족의 자존을 더욱더 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며, 그 생각을 실천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수감 중 장군께서 쓰신 이백(李伯)의 시 한 수와 모친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장부의 기개가 흘러넘치는 시이다. 이역만리에서 풍찬노숙하며 숱한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구국의 거사를 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웅혼한 기상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五老峯爲筆 (오로봉위필) 三湘作硯池 (삼상작연지)
靑天一丈紙 (청천일장지) 寫我腹中詩 (사아복중시)
“‘오로봉(五老峯)’을 붓으로 삼고 ‘삼상(三湘)’의 물로 먹을 갈며 푸른 하늘로 편지지를 삼아 내 마음속에 담긴 시를 쓰노라.”
장군의 활달한 기상과 원대한 포부를 잘 드러낸 시이다. ‘오로봉’은 다섯 명의 노인이 나란히 서 있는 듯한 중국 여산(廬山)의 다섯 봉우리를 말하고 ‘삼상’은 동정호로 흘러드는 세 강 소상(蕭湘), 증상(蒸湘), 원상(沅湘)을 말한다.
아래는 장군의 모친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이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박황희 고려대 한문학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