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죽음이 남긴 질문, 존엄한 마무리 어떻게 준비할까
<고양신문 창간36주년 기획> 나로 존중받으며 살다가고 싶다3 존엄사를 고민하는 사람들
엄마,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했지만
서류 없다는 이유로 보호자들 동의 요구
의견 갈린 가족, 결국 중환자실서 생 마감
“엄마는 어떤 죽음을 원했을까” 남겨진 질문
[고양신문] “어머니가 오래 아프셨어도 혼자 어느정도 생활이 가능하셔서 한번도 죽음을 고민하지 않았어요. 죽음의 과정에서 누가 중심이어야 하는지, 당사자가 중심에서 존중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미리 알고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아요. 어머니는 평소 어떻게 살다가 가고 싶었을까를 알았더라면…. 어머니의 죽음 앞에 가족들도 각자의 입장만을 가지고 있어서 더 괴로웠을 것 같아요.”
얼마 전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한 장진우(43세)씨. 고양시 불이학교 교사, 김포장애인야학 활동가 등으로 일했던 그는 최근 1년여 동안 어머니의 병간호를 하며 ‘죽음’을 준비하고 맞이했다. 지난 6월 어머니를 보낸 이후 어머니의 사후 신변정리와 정서적 이별을 하고 있는 그는 그동안의 경험을 담담하고 진솔하게 전해 주었다.
대부분의 다른 가족들처럼 그도 죽음을 예상하거나 준비하지 못하고, 가족들은 서로 충분한 대화를 나누지 못했기에 갈등이 당연했다. 지금 그와 가족들은 여느 가족들처럼 ‘이랬더라면’을 되뇌이고 있다. 장진우씨는 그전에 잘 몰랐던 연명치료, 사전연명의료의향서, 호스피스, 존엄사, 유언, 후견인 제도 등의 단어를 새롭게 배웠고, 어머니의 죽음은 그에게 새로운 언어들을 남겼다. 그는 말한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와 같다.”
엄마를 통해 접하게 된 죽음
“2025년 6월 어느 날 밤 9시, 병원에서 전화가 왔어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말이었죠.” 장씨와 그의 형은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해 어머니의 곁은 아버지가 지켰다.
그는 그 상황이 지금도 또렷하다. “사전에 가족의 합의하에 심폐소생술은 안 하기로 했는데, 병원이 아버지의 동의를 얻었다며 결국 심폐소생술을 진행했고, 어머니의 마지막은 고통스러우셨을 것 같아요.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말 한 적 없다, 산소마스크정도 사용해 달라고 했는데’라고 하셨어요. 병원과 아버지의 말이 달랐지만 당시는 경황이 없어서 그냥 넘어갔는데 지금도 그렇게까지 했어야 하나 생각이 들어요.”
그의 어머니는 1951년생. 2000년대 초 폐에 곰팡이 감염 진단을 받았고, 이후 정기검진을 받으며 20년 가까이 병을 안고 살았다. 어머니는 3년 전 은평성모병원 중환자실에 입원을 하기도 했지만 퇴원 후에는 방문요양 서비스를 받으며 혼자 살았다.
“산소마스크, 콧줄에 의지해 집에서 생활하셨어요. 장기요양보험으로 주 5일 요양보호사 도움을 받았고요. 어머니가 요양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연락하셔서 업체 바꾸고, 병원 옮기거나 이런저런 돌봄을 제가 했었죠.”
올해 4월, 어머니는 침대에서 미끄러져 한 시간 넘게 몸을 가누지 못했다. “그때 처음 생각했어요. 이제 진짜 가실 수도 있겠구나.” 그 후 신변정리, 은행업무 정리를 둘째아들인 장씨에게 요청했고, 곧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어머니는 입원한 지 보름 정도 지나서는 퇴원하고 싶다, 집에 가서 뒹굴거리고 싶다, 먹고 싶은 게 있다고 표현하셨어요. 그런데 기도기관삽관 이후로는 말도 못 하고, 의식도 없어지셨어요. 계속 괴로우셨을 거예요. 마스크가 세게 조여서 코뼈가 내려앉았고, 벗으려는 몸짓만 계속하셨어요.”
고통스런 어머니를 보며 호스피스기관으로 옮기자는 제안을 장씨가 했다. 그러나 형은 “보낼 준비가 안 됐다”고 했고, 아버지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연명치료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렸다. “어머니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셨다고 했는데, 정작 서류가 없더라고요. 결국 보호자들 동의가 필요했어요.”
그렇게 가족들이 합의를 보지 못하는 동안 결국 어머니는 중환자실에서 생을 마감했다. 당시의 깡마른 채 콧줄을 끼고 고통스러워하던 어머니의 모습에서 아직 장진우씨는 자유롭지 못하다.
존엄한 죽음, 이제는 나의 고민이 되다
“대부분 장례절차나 장지를 어디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전에 이야기들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정작 죽음의 과정은 잘 얘기하지 않아요.” 장씨는 어머니의 죽음을 겪으며 자신에게 닥칠 죽음을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게 됐다. 고인의 신변처리, 유산정리, 은행 위임업무, 사전연명의료의향서, 후견인 제도까지 하나하나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이용하시던 새마을금고에서 돈을 찾으려고 했는데, 위임장은 본인 발급 인감이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일본엔 이런 경우에 출장서비스도 있다는데. 미리 인터넷뱅킹을 했더라면 하고 후회했어요.”
아직 40대 초반에 젊은 장진우씨가 더 구체적인 죽음을 고민하는 이유는 그가 비혼이기 때문이다. “나는 법적 보호자도 없고, 1인 가구예요. 내가 의식이 없을 때 누가 저의 죽음에 대한 결정을 내려줄 수 있을까요?” 그는 1인·2인 가구가 ‘어떻게 잘 죽을 것인가’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족이 없으면 돌봄 공동체가 필요하고, 제도가 보완되어야 해요. 병원에 가지 않아도 죽음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하고요.” 발달장애인 후견 관련 제도,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존엄사 등 장씨는 마치 입시생처럼 죽음을 공부하고 있다. 어머니의 죽음은 이제 그의 고민이 된 듯하다.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확 다가오더군요. 우리 성장이 그렇다고 하잖아요. 오르막길처럼 천천히 오는 게 아니라 계단처럼 확 올라가고 내려가고 하는 것처럼. 준비를 하지 못하면 결국 갑자기 닥친 죽음 앞에서 당사자는 어떤 선택도 할 수 없게 되더라고요.”
당사자가 존중받는 준비된 죽음
인터뷰 내내 장씨는 “당사자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누군가의 입장이 아니라, 본인의 생각이 존중되어야 해요. 어머니도 그러셨을 거예요. 생전에 ‘나는 연명치료 원하지 않는다, 대소변은 스스로 처리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결국 그때가 오니까 가족들의 의사만 중시되면서 그 뜻이 묻혔어요.”
장씨는 미리 자신의 죽음을 고민해보고, 가족들에게 충분히 본인의 의사를 전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죽음을 무겁게 인식하고, 장례문화에만 더 민감한 한국사회에서 합리적인 ‘죽음 준비’는 가능할까. 그 역시 개인적인 일을 겪으면서 이런저런 고민을 사회화할 생각을 하게 됐다. “호스피스, 편안한 죽음 이야기를 하면 바로 약물이나 주사를 말해요. 근데 그 전에 선택지가 있어야 하잖아요. 집에서 편히 죽을 수 있는 제도, 고통을 줄일 수 있는 환경, 그런 것들이요.”
장씨는 이제 묻는다. “나는 어떻게 죽고 싶은가.” 그 물음은 곧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와 같다고 믿는다. 그는 이제 ‘잘 죽기 위해 살아간다’는 각오로 하루를 시작한다. 존중받는 삶, 친절한 죽음에 대한 고민을 이제 사회가 같이 시작해야 할 때다.
“우리는 후회 없이 평온한 마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또한 의료인들이 환자의 인간적인 죽음을 지켜주는 것으로부터 보람과 자부심을 얻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죽기 전 병원으로 옮겨져 연명의료를 받다가 중환자실에서 삶을 마감하는 자동화된 시스템을 인간적인 모습으로 바꾸는 것은 가능할까? 우리는 살면서 죽음에 대해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꺼내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까?
박중철 『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