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일기 옆 마을, 흔적으로 더듬어보는 옛 지축동

[유경종 기자의 골목 나들이] ④ 지축지구 주변 옛 흔적들

2025-09-15     유경종 기자

‘3중 규제’ 묶였던 서울 주변 마을
대규모 아파트 건립, 상전벽해
옛 흔적 지축역, 돌예배당, 창릉천 
옆 동네 탐방하며 옛모습 ‘상상’ 

[고양신문] 지축지구의 한 아파트단지 작은도서관에서 ‘지축 마을 역사 발굴 프로젝트’라는 프로그램을 기획했다며 강의를 의뢰해왔다. 아파트로 가득한 지축마을의 옛 기억과 흔적을 더듬어보고, 현장 탐방도 하고, 마을지도도 만든다고 했다. 지축동은 기자가 중학생 시절이던 80년대 초반부터 10년 넘게 살았던 동네라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는 곳이라 반가웠다. 

하지만 막상 강의 구상을 하려니 난감했다. 참가자들을 인솔해 다니며 “여기가 지축동의 역사를 품은 장소입니다!”라고 외쳐주기를 기대할 텐데, 지축지구는 옛 흔적이 대부분 사라져버린 신도시가 아니던가. 고민을 하다가 방향을 잡았다. 몇몇 남아있는 흔적들로부터 최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개발에서 벗어난 지축지구 주변을 탐방하며 과거를 상상할 수 있는 힌트를 던져보기로 했다.

길 이름으로 남은 자연마을들

지축지구에는 과거 종이를 만들었다는 지정동, 싸리나무가 많은 싸릿말, 다섯 부자가 살았다던 오부자골, 창릉천 제방을 쌓은 후 수해 걱정에서 벗어난 안진동 등의 자연마을들이 있었다. 큰말, 안말, 장고개, 유곽골, 불당골 등의 지명도 토박이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 이런 옛 지명들은 지정로, 안진로, 싸릿말교 등 길과 다리 이름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차량기지 부속으로 생긴 ‘지축역’

지축지구 중심부에서 개발 전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시설로는 지축역이 있다. 지축역은 지축지구 교통의 중심이지만, 선로가 지상 고가로 올라와 있고, 역사 시설도 매우 협소하다. 35년 전 지축역을 만들 당시만 해도 머잖아 주변이 고급 아파트단지로 개발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창릉천을 경계로 서울 은평구와 맞닿은 지축동은 대표적인 ‘3중 규제(그린벨트·군사보호구역· 수도권정비계획법)’ 중첩지였고, 80년대까지도 비닐하우스와 재래식 주택이 산재한 전형적인 서울 주변부 마을이었다. 1985년 구파발을 종점으로 하는 서울지하철 3호선이 개통되며 대규모 차량기지를 땅값이 싼 지축동에 박아넣었다. “차량기지는 우리 땅에 쓰면서 역도 안 만들어주냐?”는 주민들의 요구가 쌓이자, 뒤늦게 1990년 지축역을 만들어줬다. 35년 전 서울교통공사가 선심 쓰듯 던져 준 소박한 지축역사가 대규모 택지개발 이후에도 엄청나게 커진 교통수요를 여지껏 감당하고 있다. 

3호선 개통 후 5년이 지난 1990년에 만들어진 지축역. 

우연히 보존된 지축초교 첫 건물

지축차량기지가 들어선 덕분에 어부지리로 보존된 건물도 있다. 바로 지축초등학교 첫 번째 건물이다. 1980년 개교한 지축초등학교는 지축과 삼송 중간지점에 교사를 신축했다. 하지만 곧 지축차량기지 조성사업이 추진되고, 학교 건물은 차량기지 부지에 포함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몇 년 쓰지도 않은 학교 건물을 차량기지에 넘겨주고, 동쪽에 새로운 학교 건물을 신축해야 했다. 

지축지구가 개발되며 지축초교 두 번째 건물은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겨우 4년간 사용됐던 첫 건물은 지축차량기지 울타리 안에 남아 지금껏 지하철 승무원들이 생활하는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삼송지하차도를 지나 지축동으로 가다 보면, 차량기지 담장 너머 지축승무사업소 건물을 볼 수 있다.

1980년 개교한 지축초등학교 첫 건물. 4년 사용 후 지축차량기지로 소유권이 넘겨지며 건물이 보존됐다. 

시대상 보여주는 용사촌회관 동판 

지축차량기지 바로 앞은 지난번 골목나들이에서 소개했던 신도용사촌이고, 그 옆으로 1970년대 남북관계를 배경으로 조성된 전시주택인 공무원주택(사랑의전원마을)과 삼송주택이 이어진다. 

신도용사촌에서는 눈여겨 봐야 할 건물이 하나 있다. 붉은 벽돌로 지은 단조로운 2층 건물인데, 정면 중앙에 붙은 동판에 ‘용사촌 복지회관’이라고 적혀있다. ‘본 건물은 이한동 내무부장관님께서 국가유공자 신도용사촌 후생복지를 위하여 기증하신 회관입니다. 1989년 5월 3일 국가유공자 신도용사촌 회원 일동’. 동판에 쓰인 내용이 마을의 성격과 건물의 이력,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 등을 함축하고 있다. 

신도용사촌 복지회관 전면에 붙어있는 동판. 

다채로운 골목길을 만날 수 있는 신도용사촌과 사랑의전원마을 언덕길을 답사한 후에는 마을 뒷동산인 숫고개 언덕의 정자인 여석정에 들러 임진왜란과 명나라 이여송 장군, 숫돌고개 전투 이야기가 적힌 설명문도 읽어보고,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지축동, 삼송동 풍경을 조망해보자.   

명나라 이여송 장군 이야기가 전해오는 숫돌고개의 여석정. 

유일한 옛 흔적, 신도제일교회 돌예배당

지축지구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근대 건물은 신도제일교회 구성전(돌예배당)이다.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교회를 재건하자 애썼던 주민들과 당시 인근에 주둔했던 미군 공병부대의 도움이 만나 창릉천 호박돌로 아름다운 석조 예배당을 1954년에 건축했다. 

애초 개발구역에 포함됐던 이 건물이 교인들의 노력으로 온전히 보존된 것도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덕분에 지축동의 옛 흔적을 찾아 나서게 될 역사발굴 프로젝트 탐방에서 가장 흥미롭게 둘러볼 만한 장소가 바로 신도제일교회 돌예배당이 될 것 같다. 교회 머릿돌에는 건축에 도움을 준 미 공병부대장의 이름이 소중히 새겨져 있다.    

지축동에 남은 유일한 근대 건축물인 신도제일교회 돌예배당. 한국전쟁 직후에 미군 공병부대의 지원을 받아 건축됐다. 

마을 뒷동산 간이상수도 물탱크

교회 뒷동산에는 또 하나의 숨은 장소가 있다. 바로 수십년 간 지축동 주민들에게 가가호호 수돗물을 공급해 준 간이상수도 물탱크다. 지하 깊은 곳에서 길어올린 맑은 물을 이곳에 저장해 두었다가, 실핏줄처럼 연결된 파이프를 타고 집집마다 물을 보내줬던 것이다. 

지금처럼 대규모 정수장이 만들어지기 전, 마을마다 간이상수도 물탱크가 있었다. 서울 서촌 꼭대기 부암동 언덕의 간이상수도 물탱크는 오늘날 윤동주 시인 기념관으로 리모델링 돼 성공적인 공간 활용의 예로 손꼽힌다. 언젠가 지축동 뒷동산 간이물탱크도 지역의 역사를 기억하는 공간으로 활용되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 본다.

신도제읽교회 뒷동산에 남아있는 간이상수도 물탱크. 넓은 시멘트 바닥 아래 공간에 물을 저장했다가 집집마다 수돗물을 공급했다. 

교회 뒤편으로 돌아가면, 지축지구를 형성하는 두 마을인 지정동과 싸릿말을 이어주는 옛길이 흔적을 남기고 있다. 과거에는 많은 주민들이 이용했던 길이지만, 지금은 풀이 무성하게 자랐고 드문드문 차량이 오갈 뿐이다. 

북한산 조망되는 싸릿말 천변길

옛길을 따라 싸릿말로 넘어가면 LH지축8단지 아파트다. 임대주택으로 이뤄진 8단지는 자연경관 면에서 최고의 명당이다. 창릉천이 단지 앞을 감싸고 흐르고, 동쪽으로 북한산의 웅장한 영봉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느긋하게 천변을 산책하며 시원한 물줄기와 북한산의 오묘한 실루엣이 어우러지는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천변을 걷다 보니 기억 속에 저장된 여러 장면들이 떠오른다. 여름 한철 물장구치며 놀던 동네 꼬마들, 그늘에 둘러앉아 솥을 걸고 뭔가를 끓이던 마을 어른들, 모닥불을 피워놓고 군에 입대하는 친구를 송별했던 밤, 지축교 교각에 흰천을 걸어놓고 영화를 틀어주던 야외극장, 간식과 놀이와 품바타령과 야바위와 흥청망청 술판이 뒤섞였던 팔도야시장…. 역사발굴 프로젝트 참가자들에게 이런 얘기를 들려주면 어떤 표정들을 지을지 궁금해진다.

지축LH8단지 아파트 앞을 흐르는 창릉천. 

삼막골에서 만나는 토속 신앙의 원형

지축지구 북쪽, 일영로(371번 지방도)를 따라 오금동을 거쳐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로 이어지는 코스에도 지축동의 옛 삶을 유추할 수 있는 탐방지들이 여러 곳 있다. 오금천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마을의 수호목인 삼막골 느티나무를 만날 수 있다. 얼마 전 비바람에 커다란 가지 하나가 부러졌지만, 여전히 고고하고 영험한 기운을 내뿜고 있다. 

나무 앞에는 오늘날까지도 당산제를 지내고 있는 흔적을 볼 수 있고,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경고문도 붙어있다. 삼막골 뒤편 옥녀봉은 여성 산신(山神)의 대명사인 옥녀에서 유래한 이름이고, 삼막골에서 북한산으로 넘어가는 중고개에는 과거 성황당이 있었던 자리가 남아있다. 현대인의 삶에서 밀려난 토속 신앙의 원형을 지축지구 가까운 곳에서 만날 수 있다는 얘기다.  

마을 주민들이 신성하게 여겼던 삼막골 느티나무. 

서양문물 처음 소개한 이수광 묘

삼막골에서 양주시 경계로 넘어가면 장흥면 삼하리다. 행정구역은 달랐지만, 과거에는 일영로라는 하나의 길로 연결된, 불과 2㎞ 떨어진 곳이었기에 지축동과 삼하리는 친연성이 매우 높았다.  

양주시 경계를 이루는 고개를 넘어가면 일영로 좌우로 두 개의 탐방지가 마주보고 있다. 하나는 조선 실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지봉 이수광(1563~1628)의 묘와 비석이다. 명나라 수도 북경에 세 번이나 사신으로 다녀온 이수광은 우리나라 최초로 천주교와 서양문물을 소개한 인물이며 『지봉유설』이라는 명저를 남겼다. 묘비 안에는 이수광과 아들, 손자 3대의 비석이 잘 보존돼 있다. 건너편 버스정류장 이름도 ‘비석거리’다.    

지봉 이수광 묘 아래쪽에 모여 있는 3대 비석들. 

해피밸리에 잠든 아일랜드 용사들

이수광 묘 건너편에는 기억하는 이가 없는 한국전쟁 기념물이 숨어있다. 바로 해피밸리 전투 안내판이다. 중공군의 대공세에 밀려 유엔군이 후퇴하던 1951년 1월, 고양시와 양주시의 경계를 이루는 해피밸리(삼하리 공릉천 일대를 UN군이 일컫던 이름)에서 영국 왕립 얼스터연대가 중공군의 서울 입성을 저지하기 위해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150명이 넘는 부대대원들이 머나먼 이국 땅에서 전사했다.  

얼스터연대는 아일랜드 전역에서 지원한 병력으로 구성된 부대였다. 영국 본토부대가 아닌, 아일랜드 병력 부대였기 때문일까? 전투의 비중과 희생에 비해 기념물의 규모가 너무 초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UN군은 이 살벌했던 현장을 왜 ‘해피밸리’라는 역설적인 이름으로 불렀을까? 아마도 인근 선유동(신선이 내려와 노니는 마을)의 이름 뜻을 통역을 통해 전해 듣고 붙인 이름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볼 뿐이다.

머나먼 이국 땅에서 희생된 영국군 북아일랜드 용사들의 전적 기록이 스테인리스 설명판 한 장에 담겨있다. 

조만간 사라질 전원일기마을 풍경

삼하리, 하면 떠오르는 첫 기억은 이곳이 80년대 초 국민 드라마 ‘전원일기’의 촬영지였다는 점이다. 마을회관 건너편에 ‘전원일기마을’ 비석이 보이고, 마을길을 따라 들어가면 최불암·김혜자·김수미 등 드라마 출연진들의 사진을 벽에 붙인 테마체험관이 나타난다. 

전원일기가 이곳에서 촬영된 지 40여 년이 지났지만, 마을은 여전히 농경지 사이로 실개천이 흐르는 농촌마을 풍광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 풍경도 얼마 남지 않았다. 장흥지구 개발지역에 포함돼 수용될 날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축동이 그랬듯, 삼하리도 개발이 진행되면 옛 풍경은 흔적 없이 사라진다. 늦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가보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