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둘 떠나간 능곡 골목에 남은, 반세기 평범한 삶의 기억들

고양시 최대 뉴타운사업장 ‘능곡2구역’

2025-10-01     유경종 기자

작년 말 퇴거 시작, 이주율 95% 넘겨
양옥, 연립, 빌라… 다양한 시대의 주거 
근과거 건물 변화 비교 가능한 골목길

능곡2구역 남쪽 언덕에 모여있는 80년대 양옥집들. 뒤편으로 2000년대 초 건설된 능곡현대홈타운 아파트가 배경을 두르고 있다.

[고양신문] 능곡지역의 고양군 시절 행정구역인 지도읍(知道邑)에서 도로명을 딴 지도로(知道路)는 능곡 구도심을 남북으로 가르는 중심도로다. 중앙로와 호국로가 교차하는 토당육교사거리에서 사선으로 가지치기를 하며 시작되는 지도로는 오르막 언덕을 넘어 능곡중·고등학교를 지나 행신로와 만나는 토당사거리에서 끝난다. 

일상의 분주함으로 가득했던 지도로 주변 풍경에 지난해 말부터 적막이 감돌기 시작했다. 복서쪽 능곡2구역, 남동쪽 능곡5구역의 주택재개발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며 주민들이 순차적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떠나간 주택과 연립, 상가들은 철거와 함께 사라질 운명을 앞두고 있다. 

특별한 스토리나 가치가 있는 건물들은 ‘사라짐’에 대한 정중한 애도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능곡 재개발구역의 건물들은 특별할 것 없는 근과거의 단독주택과 빌라, 저층아파트, 상가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수십여 년 동안 평범한 이웃들이 평범한 일상을 살아냈던 공간이야말로 소소한 지역의 역사로 기록돼야 할 장소가 아닐까. 카메라를 들고 능곡2구역 골목 구석구석을 돌아본 이유다.

우여곡절 넘기고 재정비사업 박차 

능곡2구역은 고양시 재정비사업 중 가장 규모가 큰 사업장이다. 면적은 4만3900여 평, 건축이 완료되면 지상 36층 아파트에 2933세대가 들어올 예정이다. 사업 과정은 말 그대로 우여곡절을 여러 번 겪었다. 뉴타운 열풍이 휘몰아쳤던 2000년대 후반, 능곡에도 1구역부터 6구역까지 재정비촉진지구가 지정됐다. 하지만 여건이 바뀌면서 사업은 진도를 내지 못하다가, 2021년 7월이 돼서야 고양시로부터 사업시행계획인가를 받았다. 

이후에도 사업비 증가에 따른 우려가 있었지만, 고비를 넘기고 지난 5월 관리처분계획 인가를 받아 사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재개발조합 측에 따르면 현재 이주율은 95%를 넘겼다고 한다.

90년대 이후 신식 단독빌라들이 들어선 능곡2구역 북쪽 풍경.

서울 인근의 한가로운 농촌마을이었던 능곡 일대는 1904년 경의선 능곡역이 만들어지며 시장이 형성되고 학교와 종교시설, 행정기관이 하나둘 둘어섰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주로 능곡역과 이어진 토당로, 능곡시장, 능골마을(현재의 능곡5구역)이 중심이었다. 사뫼(四山)라 불리던 완만한 언덕이 이어진 능곡2구역 일대는 산업화·도시화로 서울 변두리 인구가 급격히 불어나던 1970년대 이후 주택단지가 밀집되기 시작했다. 

때문에 골목들을 살피다 보면 70년대 이전부터 오늘날까지, 시기를 달리하며 지어진 건축물들을 다양하게 구경할 수 있다. 근과거 건물의 순차적 변화를 비교해 볼 수 있는 박물관 골목인 셈이다. 

빌라촌 사이에 숨어있는, 70년대 이전 지어진 구 가옥 한 채. 

토박이들의 자부심이었던 양옥집들 

구역의 남쪽 중심부에는 70년대 이전에 지어진 구옥 몇 채가 모여있는 골목이 있다. 시멘트 블록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고 나무 대문에 나지막한 돌담을 두른 집들이다. 지금 보면 말 그대로 다 쓰러져가는 폐가지만, 50여 년 전에는 대부분의 능곡 사람들이 이런 형태의 가옥에 살았겠구나 싶다. 고양 구도심을 나름 많이 돌아다녔지만, 반세기를 훌쩍 넘긴 구옥 골목이 능곡2구역 한가운데에 빌라와 연립으로 둘러싸인 채 숨어있었다는 사실은 이번 답사를 통해 처음 알았다. 

구옥 골목에서 남쪽 오르막길로 올라가면 언덕 능선을 따라 마당과 대문을 갖춘 단독주택들이 자리하고 있다. 아래로는 반지하를 깔고 위로는 삼각지붕 다락방을 얹은, 전형적인 70~80년대 단독주택 스타일이다. 경제 발전과 더불어 등장한 이런 형태의 집들을 행정에서는 문화주택이라 칭했고, 사람들은 대개 양옥집, 또는 불란서집이라고 불렀다. 

80년대 초에 지어진 양옥집. 당시로서는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주거 형태였다. 

집을 지을 당시만 해도 남쪽으로 행주산성이 있는 덕양산이 조망되는 명당자리에 줄줄이 양옥집들을 지은 이들은 능곡 토박이들이었다고 한다. 번듯하게 지어 올린 집들은 오래도록 커다란 자부심이었을 것이다.

이 시절의 양옥집들은 형태와 규모가 비슷하지만, 디테일을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우선 담장과 대문에 공을 들인 집들이 많다.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과잉으로 보이지만, 지금보다 치안이 불안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이해되는 면도 있다. “우리 집 절대 넘보지 마!”라는 경고의 압권은 담벼락 위에 줄지어 시멘트를 발라 꽂아놓은 깨진 유리병이다. 능곡2구역에서도 이런 담장을 만났는데, 날카롭게 반짝이는 유리병이 가녀린 나팔꽃 넝쿨과 기가 막히게 어우러져 있었다.  

옥상의 난간, 대문, 창살의 장식적 요소들을 찾아보는 것도 재밌다. 건축주의 의도인지 시공자의 배려인지 알 수 없지만, 일상의 공간에 소소한 미적 감각을 표현하고자 했던 시민 예술가들의 시도가 흥미롭다.

방범용 유리병과 나팔꽃 덩굴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어느 집 담장 모습. 

서민들의 보금자리, 저층 연립·빌라 

80년대 양옥집이 상대적으로 부유한 이들의 주거형태였다면, 서민들의 보금자리는 ‘연립 한 채’였다. 서울 근교 도시들이 다 비슷하지만, 원당·관산·일산 등 고양의 구도심은 하나같이 연립주택 천국이다. 능곡도 예외는 아니어서 00주택, 00연립, 00빌라라는 이름이 붙은 2~3층 짜리 저층 공동주택들이 골목마다 빼곡하다. 

이 시기 연립주택들은 대개 붉은 벽돌로 벽체를 쌓거나, 붉은색 타일로 외벽을 꾸몄다. 아니면 시멘트 벽에 채도 낮은 칠로 마감했다. 구조는 단순하고 건물은 낡았어도 전체적인 느낌은 여전히 은은한 멋이 있다. 

80~90년대를 대표하는 공동주택 브랜드 중 하나였던 윤창빌라. 

능곡2구역의 대표적인 공동주택은 사업구역 남쪽의 세인빌라, 중앙의 5층 건물 장미아파트, 언덕길을 따라 삼각형 부지에 지어진 신진연립, 남쪽 경계지역에 소규모 9동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윤창빌라 등이 있다. 하나같이 고양의 구도심 곳곳에서 동일한 이름을 만날 수 있는, 당대의 이름난 중소규모 주택건설업체 작품들이다.

90년대 이후부터는 붉은벽돌 빌라가 사라지고, 다양한 마감재를 사용한 ‘신식 빌라’들이 등장한다. 능곡2구역에서는 토당로와 접하는 사업구역 북쪽에서 이런 빌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마감재도 고급화되고 이름과 간판도 세련되게 바뀌었지만, 기자의 개인적 감성으로는 이 시기 발라들이 이전 시기의 연립들에 비해 감상하는 재미가 떨어진다. 

사업구역 내에 2000년대 이후 지어진 건물은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2000년대 초 완공된 능곡현대홈타운 1차·2차 아파트가 사업구역 남쪽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덕분에 포인트를 잘 찾으면 80년대 양옥집과 90년대 연립주택, 2000년대 고층아파트를 한 프레임에 담을 수 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새로운 소재와 설계의 신식 빌라들이 건축됐다. 

찜질방 전성기 증언하는 불가마사우나

앞서 말했지만, 능곡2구역에는 특별한 건물이 없다. 시장과 상점가는 남서쪽 6구역에 있고, 초등학교는 1구역과, 중·고등학교는 3·5구역과, 역사가 오래된 교회와 성당도 6구역과 접하고 있다. 기억할만한 건물은 고양시산립조합 능곡본점, 지도로와 접한 산부인과·치과병원, 금강산24시불가마불사우나 등이다. 

찜질방식 목욕시설이 인기를 끌던 2000년대 초, 고양에는 무려 40여 개에 이르는 대형 사우나가 성업했었다. 그중에서도 능곡 금강산불가마사우나는 주거지역 한가운데에 마치 거대한 공장건물 같은 위용을 자랑하며 자리하고 있어서 나름 인지도가 높았다. 건물과 업종 그 자체로 한 시절의 특징을 보여주는 도시화석이다.  

능곡2구역에서 가장 인상적인 외형을 가지고 있는 '금강산 보석 24시 불가마사우나' 건물.

주택가와 공존했던 상가 건물에서 가장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업종은 뭘까? 물론 식당과 주점, 부동산과 학원, 인테리어매장 등도 많지만,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것은 소규모 교회 간판이다. 밤이면 골목길을 돌아설 때마다 붉은 십자가가 눈에 띄었을 것 같다. 토당어린이공원 인근의 두 상가 건물에는 철골빔으로 인상적인 십자가탑을 올린 풍성한교회와 뾰족한 종탑을 올린 능곡동선교회가 사이좋게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철골로 멋진 종탑 구조물을 올린 풍성한교회. 

빈집 점령한 식물, 온기 배어있는 인사

사람들이 떠난 건물들을 급격히 점령한 것은 바로 마당과 자투리 텃밭에서 번성한 식물들이다. 집을 지을 당시 심었던 나무들이 거목으로 자라 집 전체를 압도하기도 하고, 담쟁이 칡 호박과 같은 덩굴식물들이 집주인이 떠난 여름 동안 담장과 외벽을 뒤덮기도 했다. 식물들이 퇴거와 착공의 틈새를 노려 “원래 땅의 주인은 바로 우리들이야!”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듯하다.      

주인이 떠난 양옥집의 대문과 담장을 넝쿨식물들이 점령해가고 있다.

구도심 답사를 하다 보면 다채로운 감정을 담고 있는 글씨들을 만날 수 있다. 빈집 벽에 붉은 스프레이로 쓴 ‘공가~~’라는 표시에서는 단호함이 느껴지고, 재건축을 둘러싼 구호가 적힌 벽보들에는 여전히 긴장잠이 배어있다. 

반면 오랫동안 식당을 찾아준 고객들에게 감사 인사를 적은 손글씨, 이전하는 매장에서 변치 않는 맛과 정성으로 반갑게 만나 뵙기를 바란다는 안내문에는 따뜻한 사람의 온기가 배어있다. 집과 상가를 비우고 흩어졌지만, 어딘가에서 다시금 평범하고 소중한 일상을 이어가기를 저절로 응원하게 된다.    

장미아파트의 정감 넘치는 로고 디자인. 
입주자들이 떠나가고 검정 필름이 둘러쳐진 연립주택.  
사선으로 뻗은 옛 도로와 새로 생긴 길이 교차하며 만들어진 삼각형 대지에도 땅 모양을 따라 건물을 올렸다.
구 가옥들이 모여있는 골목 지붕을 인근 빌라 마당에서 내려다 본 풍경. 
빌라 정원을 가득 점령한 토란잎. 
건물의 측면 폭이 자동차 길이보다 짧은 소규모 연립주택. 
고객들에게 감사 인사를 남기고 떠나간 외식업소 사장님의 글씨.  
한때는 식료품을 사려는 이웃들로 북적였을 '주민 쌀 식품상회' 간판.
연립주택 뒤편 공터에서 무성하게 자라난 나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