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돌봄, 제도 아닌 삶의 재구성” ... 민간 주체 머리 맞대
고양만민공동회 '고양형 통합돌봄, 어떻게 만들까' 내년 3월 통합돌봄법 시행 앞두고 토론회
의료·복지·한의·약계·요양·협동조합 등 거버넌스 주체 한자리
“돌봄은 연결망·권리”… 돌봄중심 지역 관계망 생태계 강조
[고양신문] 내년 3월 통합돌봄지원법 시행을 앞두고, 민간 거버넌스 주체들이 머리를 맞대는 자리가 고양시에서 열렸다. 돌봄이 더는 일부 전문가의 영역이 아닌 지역사회의 공동 과제로 떠오른 가운데, 복지·의료·한의약·요양·약료·협동조합 등 다양한 주체들이 고양형 통합돌봄 모델을 함께 그려보는 첫 모임이었다.
1일 저녁 주엽동 사과나무의료재단 강의실에서 고양만민공동회 주최로 열린 ‘제2차 만민공동회’는 통합돌봄 관련 각 분야 대표들이 참여해 고양시만의 돌봄 체계 구성을 위한 첫 집담회로 의미를 더했다. 행사 제목은 ‘고양형 통합돌봄, 어떻게 만들까’. 전문가 발제와 제안 발표, 질의응답과 자유토론 순으로 2시간 넘게 진행됐다.
사회를 맡은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대표는 “돌봄이 불안, 삶의 공포가 되는 시대, 이제는 지역이 구조를 새롭게 설계해야 할 때”라며 오늘 자리를 ‘함께 그리는 새로운 지도’로 소개했다.
발제를 맡은 김연아 성공회대 교수는 통합돌봄법 시행 배경과 주요 쟁점을 설명하며, 단순한 제도 통합이 아닌 지역 중심 돌봄 생태계 설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 교수는 “통합돌봄은 제도를 연결하는 게 아니라, 돌봄을 중심에 두고 지역사회를 재구성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또한 시행착오를 전제로 한 유연한 제도 설계, 주민 주체성 보장, 지역 특성 반영이 핵심 과제라고 지적했다.
이후 이어진 발표에서는 송미령 고양시사회복지관협의회 회장, 허선주 고양시협동조합협의회 대표, 신동권 고양시한의사회 회장, 홍유경 고양시약사회 부회장, 나윤채 고양시노인장기요양기관협회 회장, 곽정민 사과나무의료재단 예방치과 전문의, 이영아 고양만민공동회 대표 등 각 주체들이 경험을 바탕으로 구체 제안을 공유했다.
송미령 회장은 “현재 논의되는 통합돌봄 설계는 의료와 요양에 무게 중심이 지나치게 쏠려 있다”며 “일상적인 돌봄, 관계 중심의 돌봄, 가족을 위한 돌봄 등 복지관이 수행해 온 다양한 돌봄 형태들이 제도화 과정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송 회장은 특히 “복지관은 단순한 서비스 제공 기관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상을 함께 해온 거점 조직”이라며 “고양시 돌봄체계 설계에서 복지관이 중간지원조직으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공식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 “제도화 과정에서 돌봄 개념이 모호하게 쓰이는 경향이 있다”며, 관계 중심의 돌봄과 서비스로서의 돌봄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허선주 대표는 “협동조합은 이미 다양한 영역에서 돌봄의 주체로 활동해왔다”며, “식생활, 정서, 돌봄 일자리 등 일상과 맞닿은 다양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민간 협동조합의 참여가 중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고양시에는 사회적경제조직이 잘 연결돼 있어 이들을 중심으로 한 돌봄추진단을 구성하고, 마을 단위의 돌봄 협의체를 만들어가는 것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어 “행정 주도의 위에서 내려오는 방식으로는 실효성 있는 모델을 만들 수 없다”며 “지역 주민들이 주체가 되고, 자율적으로 설계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먹거리 돌봄, 돌봄수당, 주민활동가 양성 등 협동조합이 중심이 되어 추진할 수 있는 세부 방안도 함께 제안했다.
나윤채 회장은 “요양기관의 현실을 모르면 돌봄 정책은 공허한 구호가 될 수 있다”며, 현장 경험에 기반한 목소리를 전했다. 그는 “내년 3월부터 시작될 재가 중심 통합돌봄 시범사업은 아직도 제대로 된 설계와 준비 없이 추진되고 있다. 요양보호사의 처우 개선과 안정적인 인력 확보 없이는 지속 가능한 돌봄이 불가능하다”며 고양시에 요양보호사 관련 조례 제정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나 회장은 “돌봄은 관계이자 신뢰의 문제인데, 지금 구조는 행정 처리에 가까운 수준”이라며, 인프라 확충과 함께 요양기관의 현실을 반영한 정책 설계를 요구했다.
신동권 회장은 “한의학은 질병 치료보다 예방적 건강 관리에 강점이 있다. 어르신 대상 건강 강좌나 장애인 주치 사업처럼 이미 지역에서 작은 실험을 해왔다”며 "현재 통합돌봄제도 설계에 한의사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의사 주도로만 팀이 구성되어 있다. 조례와 협의체에 한의사의 역할을 명시하고, 돌봄 인력에 기본적인 한의 돌봄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 “서양의학 중심이 아닌, 동네 한의원과의 연계 모델도 충분히 가능하다”며 다직종 협력 구조 안에 한의사가 포함돼야 함을 강조했다.
홍유경 부회장은 “약물 관리는 돌봄의 핵심 영역 중 하나”라며 “어르신들이 동시에 5~6가지 약을 복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부작용과 상호작용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돌봄의 효과가 반감된다”고 말했다. 그는 “약사가 복약 상담과 모니터링을 통해 돌봄의 질을 높일 수 있지만, 현행 제도에서는 약사의 참여가 배제돼 있다”며 “통합지원협의체에 약사회가 반드시 포함돼야 하고, 약물 관리와 모니터링 체계가 제도적으로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곽정민 전문의는 “경로당을 돌며 노인 구강 건강 교육을 하고, 틀니 관리나 침샘 마사지 같은 간단한 진료 활동을 진행한 적이 있다. 이런 활동은 치매 예방, 영양 상태 유지와도 직결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방문 진료를 하려 해도 이동 장비가 부족하고, 수가 체계가 마련돼 있지 않아 지속하기 어렵다. 장애인 구강 진료는 더욱 열악하다. 집에서 나올 수 없는 분들을 위한 치과 돌봄을 제도적으로 설계해야 한다”며 치과 진료 역시 통합돌봄 체계에 포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영아 대표는 “‘서로 돌보는 마을 고양’을 고양형 돌봄의 비전으로 제안한다”며 돌봄 수당을 비롯해 주민활동가 양성, 경로당 재배치 등 구체적인 실천 모델을 설명했다. 그는 “정책은 관이 설계하고 민간이 시행하는 구조를 넘어, 처음부터 주민이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현장에서 활동 중인 시민들의 자산과 경험이 행정과 연결돼야 지속 가능한 모델이 된다”며 “돌봄은 누가, 언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해야 하며, 단순 공급이 아닌 삶의 재구성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석자와 청중의 질문에서도 지역의 현실적 사례가 이어졌다. 행신동 서화한의원 노태진 원장은 “재가의료 기관 지정을 3번째에서야 받을 수 있었는데 실제 활동은 귀가나 서류 지원 등을 해드리기도 한다”며 “이런 활동이 공식 돌봄 체계로 연결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무리 발언에서 김연아 교수는 “돌봄은 제도 이전에 삶의 관계를 회복하는 작업”이라며 “어떤 돌봄을,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를 지역사회가 함께 질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영아 대표는 “고양형 통합돌봄이 제도의 이름을 넘어서, 사람들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구조로 정착되길 바란다”며, “오늘 같은 자리가 이어질수록 고양시는 돌봄을 함께 만드는 도시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주최 측은 이번 논의를 바탕으로 고양형 통합돌봄의 기본 방향을 정리하고, 정례적인 회의와 시범사업 운영을 준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주민과 현장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돌봄 실험이 고양에서 어떤 모습으로 자라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