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한 나라, 목적지 없이 방황하는 도시 산책자
이인숙의 책속으로 떠나는 여행 (5)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전통과 근대 혼재한 1934년 경성 신문물 유입되며 도시풍경 급변 식민지 조선 구조적 모순에 일도 생활도 없는 젊은이들 좌절
[고양신문] 1934년 경성의 하루. 오전에 천변에 있는 집을 나와 발길 닿는 대로 배회하는 소설가 구보씨는 직업도 아내도 없는 스물여섯 살의 지식인이다. 그는 행복을 찾는다는 막연한 희망을 안고 경성 거리를 방황하지만 고독과 비애를 안고 밤늦게 귀가한다. 그의 하루의 여정을 따라가는 것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다. ‘구보’는 작가 박태원의 호(號)이며 그의 집도 실제로 청계천변에 있었으니 주인공은 곧 작가 자신으로 볼 수 있다.
1930년대의 경성은 전통과 근대가 공존하고 충돌하는 공간이었다. 근대적인 석조건물과 적벽돌 건물들이 도시의 면모를 바꾸었지만, 일본식 가옥과 한옥, 초가집들이 혼재되어 독특한 풍경을 이루었다. ‘모던 보이’ ‘모던 걸’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면서 서양식 복장을 한 젊은이들이 거리를 활보했으며, 다방과 카페 백화점 등은 이러한 신문화의 중심지였다. 전차라는 신문물이 종로통을 가로지르는가 하면 달구지를 끌고 가는 사람, 두루마기에 갓 쓴 노인도 심심찮게 등장하고 지게꾼과 인력거꾼들은 거리에서 손님을 기다렸다. 도시의 외관 못지않게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방식에서도 전통과 근대가 부딪쳤다.
청계천은 조선인 거리인 종로와 일본인 거리인 혼마찌(本町, 충무로)를 가르는 경계선이었다. 도시 기반 시설은 주로 일본인이 거주하는 청계천 남쪽에 집중되어 남촌은 문명화된 공간, 북촌은 낙후된 공간이 되었다. 구보의 집이 있는 청계천변은 전통과 근대가 공존하면서 교차하는 곳이었다. 청계천변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천변풍경>은 박태원의 또 다른 대표작이다.
박태원을 비롯한 젊은 시인 작가들은 모더니즘을 지향하면서 근대 도시의 문물에 매혹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제국주의의 산물이며 그 화려함 뒤에 식민지 조선의 모순과 비애가 숨어 있다는 사실에 그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고 좌절했다. 구보씨의 하루에는 그러한 지식인의 좌절과 우울이 짙게 배어있다.
집을 나온 구보씨는 종로에서 화신상회(지금의 종로타워 자리에 있던 화신백화점)를 거쳐 동대문행 전차를 탄다. 당시에 전차는 경성 외곽을 도는 순환선 역할을 했기 때문에 차창 밖으로 도시 풍경을 관찰하기에 좋은 수단이었다. 시간에 구애됨 없이, 목적지도 없이 경성을 배회하는 구보씨는 도시의 산책자이며 관찰자이다. 동대문을 돌아 경성운동장(지금의 DDP 자리에 있던 서울운동장)을 지나 조선은행(현재 한국은행의 화폐박물관) 앞에서 전차를 내린 구보씨는 길 건너 장곡천정(소공동)의 한 다방(당시에 문인들이 많이 다니던 낙랑파라)에 갔다가 남대문을 지나 ‘도시의 항구’인 경성역으로 간다. 르네상스 양식의 웅장하고 우아한 건물인 경성역은 같은 르네상스 양식의 석조건물인 조선은행과 함께 경성의 근대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건물이었다. 구보는 고독을 잊고자 사람이 많은 경성역에 갔지만 빽빽이 들어찬 군중 속에서 도시의 비정함과 익명성에 오히려 더한 고독을 느끼고 그곳을 떠난다.
구보는 다시 종로경찰서를 지나 친구가 하는 다방에 간다. 시인 이상이 경영하던 다방 ‘제비’이다. 박태원은 이상의 시를 자신의 작품을 연재하던 신문에 게재할 수 있게 주선하여 그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이상의 <오감도>가 신문 한 지면에 한동안 같이 실렸다. 또한 이상이 구보의 소설에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이상이 경영하던 다방 ‘제비’는 월세도 내지 못할 정도로 어려웠다. 가난한 소설가와 가난한 시인은 낙원정의 카페로 간다. 카페의 여급들과 쓸데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밖으로 나온 구보에게 소복 입은 중년여성이 ‘여급 대모집’의 뜻을 묻는다. 그가 조심스럽게 설명하자 절망과 혐오의 표정으로 사라진 “기품과 거의 위엄조차 있는” 중년여성을 보면서 구보는 연민과 비애를 느낀다. 상(喪)을 당한 여성이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각박한 현실이 애달프다.
구보씨의 발길과 그의 상념을 따라가는 소설에는 아무런 서사가 없다. 산책 중에 만나는 도시 풍경과 사람들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달라지고 그의 상념은 파편화된다. 조각으로 흩어진 상념들은 힘을 갖지 못하고, 우울한 공허함이 작품을 지배한다. 친구를 만나 대화하고 저녁 먹고 카페에서 여급들과 희롱하고 자유롭게 도시를 산책하지만 구보는 그토록 애타게 구하는 행복을 찾지 못한다. 그에게 생활이 없기 때문이다. 일상이 제거된 관찰자, 상념을 좇는 지식인에게 행복의 추구란 허상이다. 구보는 구미(歐美) 여행, 아니 동경에 갈 돈만 있어도 행복할 것 같다는 공상을 한다. 하지만 금전이 주는 행복에 굴복하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도시의 룸펜, 지식인, 산책자 구보씨. 그가 갔던 소공동의 다방에는 “일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그곳 등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담배를 태우고, 이야기를 하고, 또 레코드를” 듣고 있었다. “그들은 거의 다 젊은이들이었고, 그리고 그 젊은이들은 그 젊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자기네들은 인생에 피로한 것 같이 느꼈다.” 일을 가지지 못한 다방의 젊은이들도 소설가 구보씨와 마찬가지로 룸펜들이다. 그들이 벌써 인생에 피로를 느끼는 것은 앞이 막혀있는 현실에서 그들이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당시에 조선의 지식인의 실업률은 심각했다. 높은 교육열로 지식인은 양산되었지만, 일제치하에서 고학력을 요구하는 좋은 자리나 관료 충원의 기회는 일인들이 독차지했으며, 조선인은 소수의 친일적 인사들에게만 기회가 주어졌다. 대다수의 조선인은 노동자나 하급직에 만족해야 했다. 월급 자리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설명하는 아들(구보)의 말에 어머니는 “보통학교만 졸업하고도, 고등학교만 나오고도, 회사에서, 관청에서 일들만 잘 하고” 있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또, 동경엘 건너가 공부하고 온 내 아들이 구하여도 일자리가 없다는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든 것이 금광이었다. 경성역에서 만난 무직자들, “이 시대의 무직자들은, 거의 다 금광 브로커에 틀림없었다. … 황금광 시대 … 황금을 찾아, 황금을 찾아 … 시시각각으로 사람들은 졸부가 되고, 또 몰락하여 갔다. 황금광 시대. 그들 중에는 평론가와 시인, 이러한 문인들조차 끼여 있었다.” 실제로 1930년대에 금광 열풍이 불어 너도나도 금광에 뛰어들었다. 일제가 대륙 침략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의 금광 개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금광에 몰려든 것이다. 작가 채만식은 자신이 금광 투기에 참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황금광 시대>라는 소설을 써서 일확천금을 꿈꾸는 인간의 허황된 욕망과 일제 강점기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신랄하게 풍자했다. 생계를 이어갈 ‘일을 가지지 못한’ 시인 작가들까지 금광에 투신하게 만드는 현실, 식민지 자본주의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설 자리가 없었다.
일도 생활도 없는 사람, 거리를 방황하는 구보씨에게서 짙은 우울과 비애, 그리고 무력감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또는 할 게 없는 식민지 지식인의 무력감이 그를 우울하게 만든다. 망한 나라 조선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대한문을 바라보면서 “그 빈약한, 너무나, 빈약한 옛 궁전은, 역시 사람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여주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경성 거리를 배회하며 하루의 피로와 회한을 느낀 구보는 오전 두 시의 종로 네거리에서 벗과 헤어지면서 이제부터 생활을 가지겠다고 결심한다. 내일 또 만나자는 벗에게 “내일, 내일부터, 나 집에 있겠소. 창작하겠소--.”라고 답하자 벗은 “좋은 소설을 쓰시오.”하고 둘은 헤어진다. 집에 돌아온 구보는 그의 일에, 즉 소설 쓰기에 전념하면서 약간의 행복을 느끼지 않았을까.
이념 문제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던 박태원이 해방 후인 1950년에 가족을 두고 혼자 월북한 것은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는 북에서 <갑오농민전쟁>이라는 역사소설을 남겼다. 작가 최인훈은 박태원에 대한 오마주로 1960년대에 같은 제목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발표했다. 박태원은 우리가 잘 아는 영화감독 봉준호의 외조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