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 우리는 모두에게 낯선 사람들이었다
이인숙의 책속으로 떠나는 여행(6)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익명의 도시 밤거리 헤매는 젊은이들 옆사람 죽어도 “우리 탓 아닐 거야” 멀리 두고 바라보는 방관자적 태도 김승옥 작가 어릴 적 겪은 트라우마 탓 ‘끼어들면 위험하다’는 본능적 공포 시대정신 외면, 내면 몰입 아쉬워
[고양신문] 1964년 겨울, 서울의 밤거리 포장마차에서 두 남자가 만났다. 우연히 만난 낯선 사람과 통성명을 하고 나면 서로 할 얘기가 없다. 문득 화자인 ‘나’는 할 말이 생각났다. “안형, 파리를 사랑하십니까?”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대화는 “김형,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십니까?” 라는 대화로 이어진다. ‘김’은 시골 출신에 육사 시험에 실패하고 군대 갔다온 후 구청에서 일하는 스물다섯 살 청년이고, ‘안’은 부잣집 아들에 무슨 대학원생이라는 스물다섯 살 동갑내기다. 차가운 바람에 펄럭거리는 포장마차에서 추위에 저려드는 발을 꼼지락거리며 이런 말들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대화는 점점 이상해진다. 평화시장 앞 가로등 가운데 몇 번째 등은 불이 들어오지 않고, 단성사 옆 골목 쓰레기통에 초콜릿 포장지가 두 장 있었고, 적십자병원 앞 호두나무의 가지 하나가 부러져 있고...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자기만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두 사람은 눈을 빛내며 경쟁적으로 주워댄다. 대체 이런 걸 알아서 무얼 하겠다는 건가. 그것은 쓸모나 가치의 문제가 아니다. 자기 혼자만 알고 있는 사실은 그것이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내 ‘소유’인 것이다. 스물다섯 살 두 젊은이가 ‘모든 욕망의 집결지’인 서울에서 자신의 존재 증명을 할 수 있는 길은 그런 것밖에 없다. ‘나’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자기 옆의 친구는 “틀림없는 부잣집 아들이고, 높은 공부를 한 청년”이라고 했다. 고졸의 시골 출신인 ‘나’는 서울에서는 이방인이니 그렇다쳐도 대학원생인 부잣집 아들이 “왜 이래야만 하는가?”
1964년의 서울은 어떤 곳이었을까. 1941년생인 작가 김승옥은 순천에서 초중고를 다니고 1960년에 대학에 입학하여 처음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그해에 4ㆍ19혁명이 있었고, 이듬해 5ㆍ16 군사쿠데타로 혁명은 좌절됐다. 특히 1964년은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시민과 대학생의 대규모 반대 시위가 연일 벌어지던 해이다. 이에 정부는 위수령을 선포했고 세상은 혼란스러웠다. 역사적으로 중대한 사건들이지만 그러한 정치적 변동은 소설 속에 희미한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이상한 대화와 낯선 행동은 혁명의 좌절에서 오는 무력감, 방향을 잃은 젊음으로 볼 수도 있지만, 196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익명화되고 왜소해진 개인들의 초상으로 해석된다. 대도시 서울 생활은 순천에서 상경한 ‘시골 사람’ 김승옥에게 큰 충격이었다.
산업화와 함께 이농 현상이 심화되고 도시로 들어온 농촌 사람들은 도시 빈민이 되었다. 서울은 점점 비대해졌고 사람들은 익명의 섬이 되어갔다. 특히 시골 출신의 가난한 ‘나’ 같은 사람에게 서울은 도저히 그 벽을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괴물이었다. 하숙방에 들어앉아 벽이나 쳐다보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호주머니에 돈이 좀 생기면 밤거리에 나온다는 ‘나’에게 할 일은 나만이 알고 있는 서울의 비밀을 간직하고 소유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도저히 속을 알 수 없는 거대한 괴물인 서울에 함몰되지 않고 서울의 한 귀퉁이라도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아무 의미 없고 너절한 것이라도 나만의 것이니까.
대학원생 ‘안’은 '서울은 모든 욕망의 집결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자본주의적인 욕망이 한데 모여 용광로처럼 타오르는 서울에서 그는 욕망에 자기 몸을 태우거나 맞서 싸울 마음이 없다. 혹은 그럴 용기가 없는 것이다. “낮엔 그저 스쳐 지나가던 모든 것이 밤이 되면 내 시선 앞에서 자기들의 벌거벗은 몸을 송두리째 드러내놓고 쩔쩔 맨단 말입니다.” 기껏 ‘안’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이 수준이다. 밤이 되어 자신의 알몸을 송두리째 드러내는 사물들, 그것도 하나의 허상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지만, 그래서 밤거리에 나와 혼자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고 구청 직원인 ‘나’와 마찬가지로 허접한 사실들을 수집하면서 자기 소유로 만든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서 같은 지점에” 왔다. 다른 점은 ‘나’는 자신의 하찮은 짓거리들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안’은 자신이 하는 일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안’은 알고 있는 것에 그친다. “만일 이 지점이 잘못된 지점이라고 해도 우리 탓은 아닐 거예요”라고 말하는 ‘안’은 문제를 정면으로 맞닥트리기보다 ‘내 탓은 아니라고’ 하면서 비켜가려고 한다.
두 사람에게 옆자리에 있던 새로운 인물이 말을 걸어온다. 차림새는 깨끗했지만 어딘가 “가난뱅이 냄새가 나는 서른대여섯 살짜리 사내”였다. 힘없는 목소리로 자기도 끼어달라고 간청하는 사내와 함께 세 사람은 거리로 나온다. 1960년대의 서울의 밤거리는 “영화에서 본 식민지의 거리처럼 춥고 한산했고, … 소주 광고는 부지런히, 약 광고는 게으름을 피면서 반짝이고” 있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얼어붙은 길 위에는 거지가 돌덩이처럼 여기저기 엎드려” 한 푼을 구걸하고 “그 돌덩이 앞을 사람들은 힘껏 웅크리고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화려한 네온사인의 불빛이 앞다투어 과시하는 온갖 욕망과 그 이면에 웅크리고 있는 비참한 가난, 이것이 1960년대 서울의 양면이었다. 산업화, 근대화의 기지개를 펴고 있었지만 1960년대의 서울은 참 구차했다.
사내는 술과 밥을 사겠다고 한다. 그의 아내가 그날 세브란스병원에서 죽었는데, 알릴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시체를 해부용으로 병원에 팔았다는 것이다. 가난하지만 아내와 행복하게 살았던 사내는 받은 돈을 오늘 밤에 다 써버리고 싶다고, 그때까지 함께 있어 달라고 간청한다. 세 사람은 중국집에서 비싼 술을 시키고 길에서 택시를 타고 불구경하러 소방차를 쫓아간다. 사내는 남은 돈을 불길 속에 던져버리고 두 남자에게 간청하여 세 사람이 같이 여관에 든다. 혼자 있는 걸 무서워하는 사내를 보고 ‘나’는 세 사람이 한 방에 들자고 제안하지만, ‘안’은 피곤하다는 핑계로 끝까지 따로 자자고 고집한다. 다음날 이른 아침 사내의 주검을 발견한 ‘안’은 “그 양반, 역시 죽어버렸습니다”라고 말한다. 사내의 죽음을 예상했다고 실토한 안은 “혼자 놓아두면 죽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그게 내가 생각해 본 최선의 그리고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라고 하지만 그 말은 자기변명으로 들린다. 타인의 삶과 죽음에 개입하고 싶지 않은 몸사림, 익명의 도시 서울에서 끝까지 익명으로 숨고 싶은 ‘안’의 속마음을 드러낼 뿐이다. 그는 밤거리에 나오는 이유를 “모든 것에서 해방된 것을 느끼기” 때문에, “사물의 틈에 끼어서가 아니라 사물을 멀리 두고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멀리 두고 바라보는’ 방관자적인 태도, 그 틈에 끼고 싶지 않은 ‘안’의 마음이 사내의 죽음을 모른 체하게 만들었다. 시골 출신의 ‘나’는 ‘안’을 이해할 수 없다. 서울 사람의 타인에 대한 극도의 무관심과 몸사림을 그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서울에서 그는 수많은 모래알 중 하나지만 고향에서는 달랐을 것이다.
급히 여관을 나온 후 ‘안’은 두려워진다는 말과 함께 한숨을 쉬며 “우리가 너무 늙어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 그리고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고 헤어진다. 이들이 다시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처럼 문제를 회피하려는 ‘안’의 방관자적인 태도, ‘잘못된 지점’이라도 우리 탓은 아닐 거라는 변명은 어디서 나왔을까. 작가 김승옥이 유년 시절에 겪은 한국전쟁과 더 어릴 때 고향 순천에서 일어난 여순사건은 그의 내면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여순사건으로 김승옥은 부친을 잃었으며, 자고 깨면 이웃 사람이 잡혀가고 처형당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도 본능적인 공포로 남았을 것이다. 어디건 끼어들면 위험하다는 인식,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방관자적인 태도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시대를 외면하고 자신의 내면으로만 파고들던 작가정신은 작가의 수명을 단축시켰다. 1960년대를 대표하는 빛나는 감수성의 작가로 칭송받던 김승옥, 지금 읽어도 감탄을 자아내는 감각적인 문체의 작가가 짧은 전성기 이후에 제대로 된 작품을 보여주지 못하고 관능의 세계로 떨어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시대정신을 몰각한 후과라고 하면 너무 가혹한 평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