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숙 칼럼] 죽음은 내옆에 앉아있는 조용한 동행자

『내가 함께 있을 게』 (볼프 에를브루흐 지음, 김경연 옮김) 『할머니가 남긴 선물』 (마거릿 와일드 글, 론 브룩스그림, 최순희옮김)

2025-11-21     박미숙 『그림책은 힘이 세다』 저자
 박미숙 『그림책은 힘이 세다』 저자

[고양신문] 엄마가 쓰러졌다. 추석 연휴, 식구들과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간 날이었다. 엄마와 함께 화장실에 갔던 동생이 뛰어왔고, 정신없이 달려간 화장실 앞 복도에는 엄마가 누워 있었다. 그때 119가 왔다. 병원에서는 뇌출혈이 있으니 중환자실로 입원시키자 했다. 중환자실 보호자실에 앉아 있는 동안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종교도 없는데 누군가에게 기도하고 있었다. “아직은 안 됩니다. 엄마를 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요. 제발.”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엄마는 인공심장박동기 수술을 받았고, 상태가 호전되면 일상생활이 가능하다는 의사 선생님 말을 들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이번엔 내가 새벽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진통제를 먹어도 소용이 없었다. “나까지 아프면 안 돼.” 그렇게 되뇌이며 버티다가 결국 응급실로 갔다. 응급실에서 주사를 맞고 조금 괜찮아지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새벽, 머리가 곧 터질 것처럼 아파 눈이 번쩍 떠졌다. 그 길로 또 응급실. 그렇게 닷새 동안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 혈압은 200을 넘었고, 나는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이렇게 아프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도망가고만 싶었다. 어디로, 무엇으로부터 도망가는지조차 몰랐지만.

여러 검사 끝에 ‘가역성 뇌혈관 수축증후군’이라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병명 진단을 받고 입원했다. 원인은 정확히 알 수 없단다. 극심한 스트레스일 수도 있고, 심한 기침, 감기약 부작용일 수도 있다고. 그리고 약으로 치료가 가능해져 엿새 만에 퇴원했다.

엄마와 나는 죽지 않았고, 여러 약을 먹어야 하는 상황이지만, 아침에 눈을 뜨고 밤이면 잠드는 일상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런 일을 겪고 나니, 죽음이라는 것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내 옆에, 바로 옆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는 존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책 『내가 함께 있을 게』(볼프 에를브루흐 지음, 김경연 옮김. 웅진주니어)는 한 마리 오리에게 누군가 찾아오는 것부터 시작한다. “나는 죽음이야.” 그 말을 들은 오리는 깜짝 놀라 묻는다. “지금 나 데리러 온 거야?” 죽음은 담담하게 말한다. “아니, 나는 그동안 줄곧 네 곁에 있었어. 만일을 대비해서.” 오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피해야 할 존재로만 생각했는데 막상 마주해 보니, 의외로 점잖고, 예의를 지키며, 오리 말을 잘 들어주는 친구이기도 했다.

오리는 묻는다. “내가 죽으면, 이 연못은 어떻게 될까?” 죽음은 이렇게 답한다. “네가 죽으면 연못도 없어져. 적어도 너에게는 그래.” 내 삶이 끝나면 내 세계도 함께 끝난다는 것. 시간이 얼마 흐르고 결국 오리는 죽음의 품에 안긴 채 물 위를 떠내려간다.

엄마 병실을 오가던 날들, 새벽마다 머리를 부여잡고 응급실로 향하던 며칠 동안, 나는 거의 하루 종일 죽음만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정작 죽음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늘 등 뒤 어딘가에 있다고만 느끼며, 일부러 시선을 피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함께 있을 게』 속 오리는 죽음을 내쫓지도, 외면하지도 않는다. 죽음과 함께 연못을 거닐고, 새로운 일을 시도하고, 삶의 장면들을 한 번 더 깊게 들여다본다. 죽음은 공포가 아니라, 삶의 끝자락을 함께 정리해 주는 조용한 동행자로 그려진다.

만약 내가 죽음을 맞이할 약간의 준비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그림책 『할머니가 남긴 선물』마거릿 와일드 글, 론 브룩스그림, 최순희옮김. 시공주니어) 같았으면 한다. 때가 온 것을 직감한 할머니는 조용히 ‘정리’를 시작한다. 밀린 고지서를 챙겨 납부하고, 통장을 정리한다. 도서관에 가서는 그동안 빌려온 책들을 모두 반납한다. 그리고 손녀의 손을 잡고 긴 산책을 한다. 천천히 걷고, 자꾸만 멈춰 선다. “저기 구름 좀 봐. 하늘에서 수다 떠는 사람들 같지 않니?” “이 흙냄새 맡아 봐. 비가 오려나 보다.” “저기 앉은 오리들 소리 들려? 싸우는 것 같기도 하고, 노래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할머니는 손녀에게 세상을 ‘한 번 더’ 보여준다.

할머니가 떠나고 혼자가 된 손녀에겐 새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리고, 빛과 그림자, 나뭇잎의 떨림까지 하나하나 마음에 찍히듯 들어온다. 할머니는 떠났지만, 할머니의 시선과 감각,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손녀 안에 선물처럼 남는다.

엄마가 쓰러졌을 때 나는 엄마의 죽음을 붙잡고 매달렸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엄마의 죽음은 엄마의 몫으로 남겨야겠다고, 그 일은 엄마와 엄마의 삶이 결정할 영역이라고. 나는 엄마의 곁에 있고, 엄마의 선택을 듣고, 필요하다면 손을 잡아줄 수는 있지만, 대신 죽음을 맞아 줄 수는 없다.

반대로 나의 죽음은 나의 몫이다. 내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떠나고 싶은지, 가능한 한 내가 스스로 결정하고 준비하고 싶다.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게 살 권리가 있고, 또 존엄하게 죽을 권리도 있으니까.

그래서 이 글을 다 쓰고 난 내일, 나는 ‘연명 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서약을 쓰러 갈 예정이다. 막상 죽음의 순간이 오면 또 다른 변수와 감정들이 밀려오겠지. 그래도 나는 알고 싶다. 적어도 한 번은, 삶과 죽음 모두를 내 몫으로 끌어안으려 했던 내가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이 기회를 빌려 부고를 이렇게 남겨둔다. ‘잘 사랑했고, 잘 살았다. 나는 미련을 두지 않으려고 노력할 테니 그대들도 덜 그리워하길. 그래도 조금만 더디게 잊어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