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 누빈 ‘숨은 독립군’ 장흥 장군, 사후 42년 만에 자서전으로 만나다
[기획연재] 고양의 독립운동가 장흥 장군①
미국에서 생활하는 장남, 부친 생가 방문
기자와 동행하며 “생전에 남긴 말씀” 회고
독립운동 지원, 국군 초대 헌병사령관 역임
중국대륙과 한반도 넘나드는 장대한 서사
[고양신문] 귀한 손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고양의 자랑스런 애국지사 장흥(張興, 1903~1983) 장군의 삶을 증언해 줄 장남 장석위씨다. 장흥 장군이 누구인가. 고양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면면을 거론할 때 가장 앞자리에 언급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중국군 헌병장교로 복무하며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을 치른 전장의 용사, 고위장교 신분을 활용해 상해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다방면으로 지원한 숨은 주인공, 해방 후 대한민국 초대 헌병사령관을 지낸 후 한국전쟁에 참전한 창군의 주역….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없는 굵직한 이력들이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계 후손을 만날 수 없어 장흥 장군의 이야기를 본지를 통해 소개할 기회를 갖지 못해 아쉬웠기에 약속 장소로 향하는 발길이 설렜다.
올해 77세인 장석위씨가 건넨 명함에는 ‘한국광복군유족회 미서부지부장’이라는 직함이 적혀있다. 1990년대 중반 가족과 함께 미국 LA로 이민을 가 30년 넘게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인사를 나누며 장씨가 책 한 권을 기자에게 건넸다.
“아버님이 쓰신 친필 자서전을 지난해 초, 돌아가신 지 42년 만에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늦었지만 고양신문에 한 권 전달해 드리려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생전에 남긴 육필원고 정리한 자서전
책 제목은 『장흥 자서전』(장흥 지음, 한홍구 해제, 한울 출판). 장흥 장군이 대한민국 육군에서 예편한 1959년부터 본인의 생애를 육필(국한문 혼용)로 정리한 원고를 전문가들이 언해하고, 근현대사 연구자인 한홍구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해제를 더한 책이다.
표지에는 ‘전격 교체된 대한민국 초대 사령관’이라는 부제와 ‘백범 김구 암살의 전말!’이라는 카피가 함께 적혔다. 해제를 쓴 한홍구 교수는 장흥 장군의 파란만장한 일대기 중 초대 헌병사령관으로서 백범 암살 전후의 정황을 기술한 부분에 주목하며 “그동안 사그라졌던 진상 규명의 불길을 되살리는 데 충분한 불쏘시개가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고 평했다.
김구 암살, 그리고 암살범 안두희를 조사하려 했던 장흥 헌병사령관의 전격 해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임정과 광복군의 정통성을 잇는 세력을 무력화하고 친일·반민족 세력이 대한민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결정적 순간으로 본 것이다.
김구 암살 이야기뿐이 아니다. 『장흥 자서전』에는 30년 넘는 세월 동안 중국대륙과 한반도의 전장을 종횡무진 누빈 경험이 시기별로 담겼는데, 책장을 넘길 때마다 놀랍고 흥미로운 장면들이 등장한다.
기자와 덕양구 성사동 성라산 기슭, 장흥 선생의 고향마을과 생가를 둘러보며 반나절을 동행한 장석위씨는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담담하게, 때로는 벅찬 감회로 회고하며 자서전의 행간을 채워 줬다. 자서전 내용과 장석위씨 구술을 바탕으로 정리한 ‘장흥 장군 이야기’ 연재를 시작한다.
인동 장씨 집성촌 장손, 토박이 고양 사람
장흥 장군 일대기를 시기별로 나눠 정리해 보자. 가장 먼저 언급돼야 할 점은 장흥 장군이야말로 진짜 고양사람이라는 점이다. 애국 독립지사에게는 온 강토가 고향이겠지만, 우리 지역 출신의 큰 인물을 특별한 자부심으로 기리는 것 또한 고장 사람들만의 특권이다. 고양시씨족협회는 2010년 장흥 장군을 ‘제5회 자랑스러운 고양인’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고양군 원당면 성사리에서 성장한 장군의 본명은 장기진(張基鎭)이지만, 21세의 나이에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 후 신분을 감추기 위해 흥(興)으로 이름을 바꾼다.
장군은 자서전의 시작을 ‘장씨의 기원, 문중의 정황’을 설명하며 시작하는데 ‘10대조께서 고양군 원당면 성라산 아래로 이주하시어 현재까지 10대를 선영 산 아래에서 대대로 거주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인동 장씨(仁同 張氏)는 고양에서 집성촌을 이룬 대표적 성씨로서, 오늘날 성사동 먹거리마을로 이름을 얻고 있는 흥도로 로터리 인근에는 ‘배라산 인동 장씨 집성촌 마을’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표지석이 있는 로터리에서 좁은 마을길을 따라 배라산(성라산) 기슭으로 들어서면 너른 마당을 품은 붉은 기와집 한 채가 서 있는데, 바로 장흥 장군의 생가다. 십여 년 만에 생가를 찾았다는 장석위씨의 표정에 깊은 감회가 흐른다.
“아버님이 태어나 청년으로 성장해 21세에 중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사셨던 바로 그 집입니다. 원래는 초가집이었는데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전소됐고, 아버지께서 손수 다시 지은 집이 고스란히 남아있네요. 60~70년대 파주와 고양 곳곳에 흩어져 있던 조상님들의 묘를 이장해 집 뒤 선산으로 모신 분도 바로 아버님이시고요.”
전쟁으로 불타버린 성라산 기슭 생가
장흥 장군이 성라산 기슭 생가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장석위씨는 “24년의 중국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며 가져온 소장품들을 집 마당에 전시했던 날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해방 후 귀국하니까 마을 분들의 환영이 어마어마했대요. 그분들에게 인사도 드릴 겸, 마당에 멍석을 넓게 깔아놓고 중국에서 소중히 챙겨 온 물건들을 전시해 보여드린 거죠. 종전 직후 일본군 지휘관이 항복식의 징표로 바친 칼, 헌병부대장으로 재직하며 매일 같이 작성한 8년간의 부대일지, 중국 고관에게 선물 받은 공민왕의 그림 등 진귀한 물건들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생가는 통한의 장소가 됐다. 한국전쟁의 화마 속에서 잿더미가 됐기 때문이다. 장흥 장군은 자서전에서 ‘불행히 가옥이 적탄에 명중되어 전소되는 바람에 30년간 구국운동 해온 기록과 제반 증빙할 문서를 한 장도 건져내지 못하고 유실되어서 양친 부모님 상을 당한 것보다도 더 통탄해 마지아니했다’고 안타까운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아버지의 삶 재조명하는 계기 됐으면”
장흥 장군의 호는 우석(愚石)이다. ‘우직한 돌’이라는 이름처럼 그의 행보는 소리없이 묵직하다. 책을 읽고 이야기를 들을수록 그에 대한 지역의 관심과 평가가 너무 박했구나 싶다. 장석위씨는 “고양신문의 보도가 아버지 장흥 장군의 삶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중국 망명 이후, 장흥 장군의 활약상을 담은 이야기는 다음 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