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들이여, 죽지 말고 살아서 조국으로 돌아가자!"

[기획연재] 고양의 독립운동가 장흥 장군②

2026-02-18     유경종 기자

성라산마을 청년, 독립운동 헌신코자 상해로 망명
중국군 헌병장교 신분으로 ‘임시정부 지원’ 맹활약 
종전 후 생사기로에 몰린 동포들, 귀국 배에 태워
타국 군 지휘관 역할 마치고 영예롭게 광복군 복귀

[고양신문] 고양의 자랑스러운 애국지사지만, 활동과 행적이 널리 알려지지 못했던 우석 장흥(愚石 張興, 1903~1983)) 장군의 이야기를 장남 장석위씨 인터뷰와 『장흥 자서전』(2025, 한울 출판)을 바탕으로 정리해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편집자 주>  

망명으로 이끈 <동아일보> 신문기사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양군 원당면 성라산 기슭에서 성장한 청년 장기진(張基鎭, 장흥 장군의 본명). ‘옛날 학문만을 숭상하고, 응당 배워야 할 지식을 배우지 못하는’ 가난하고 낙후된 고향에서의 삶에 늘 답답함을 느끼던 그는 ‘종종 왜경들이 우리 마을에 와서도 동네 부형(父兄)께 대하여 불손한 언사와 폭행하는 광경을 볼 적마다 분심이 폭발하여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던 어느 날 <동아일보> 기사를 통해 상해로 망명한 임시정부 기사를 보고 ‘어떤 방법으로든지 상해로 망명하여 우리 정부 밑에서 독립투사가 되기를 혼자 맹세’한다. 그리고는 일본과 상해 방면을 오가며 장사를 하는 친척의 도움을 받아 22세 무렵인 1925년 상해 망명을 결행한다. 

‘조국의 명’ 받고 중국군 장교의 길로  

조국 독립을 위해 한몸 바치겠다는 결심을 품고 정든 고향마을을 떠나 독립운동의 총본부인 상해로 망명한 청년 장흥을 가장 먼저 이끈 선배는 몽양 여운형이었다. 그의 추천으로 장개석이 교장으로 있는, 육군사관학교에 해당하는 황포군관학교(국민혁명군중앙군사정치학교)에 입학한다. 중국 국민당군 최고 엘리트 군인의 길이 시작된 것이다. 독립운동을 하러 가서 왜 중국군 장교가 됐을까? 장석위씨는 이렇게 말한다.

“아버님께서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선택한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조국의 명령이 있으면 언제든지 광복군으로 복귀한다’는 선서를 하고 중국군 군복을 입으셨다고 합니다. 중간에 ‘중국군 생활 그만두고 독립운동 조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전했을 때도 김구 주석이 ‘그 안에서 해야 할 일이 많다. 좀 더 남아 있어라’고 명하셨대요.”  

중국군 헌병 제2단 시절 단장 및 참모진관 함께. 서있는 사람 중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가 장흥 장군이다. [사진제공=유족&한울출판]

일본군 동향 파악 ‘비밀서신’ 독립세력에 전달 

‘중국군 헌병장교 장흥’이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도운 역할은 안팎으로 다양했다. 특히 전시에 막강한 권한을 부여받는 ‘헌병’이라는 병과는 일본군의 통신을 감청하고, 정보를 분석하기에 최적의 자리였다. 장석위씨는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아버님이 일본군 동향 정보들을 꼼꼼히 모으셨는데, 문제는 독립단체 인사들에게 어떻게 소식을 전하느냐였어요. 이때 비밀요원으로 활약하신 이가 바로 어머님이세요. 어머니는 상해 프랑스 외국인학교를 졸업하고 영어교사를 하시다가 아버님과 결혼하셨는데, 친한 동창 친구 중 조소앙 선생의 조카 조기연씨가 있었대요. 친구를 만나는 척, 일본 비밀경찰들의 눈길을 피해 비밀 서신을 수시로 전달하셨답니다. 그 정보로 인해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도움을 얻고, 위험을 피할 수 있었을 겁니다.”   

장흥 장군과 아내 김순경 부부. 김순경씨는 장흥 장군의 비밀서신을 독립단체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사진제공=유족&한울출판]

일체의 기록 남기지 않아야 했던 ‘언더커버’ 

정보 제공은 물론, 광복군을 직접 도운 사례도 적잖았다. 한번은 지청천 장군이 전투에서 패해 쫓겨온 일군의 광복군 병사와 가족 수십여 명을 이끌고 와 도움을 청했다. 장흥 장군은 그들을 자신의 예하 부대 훈련병 장정 명단에 올려 보급품을 지원하고 1년 가까이 생계를 잇도록 했다고 한다. 

“당시 아버님이 받은 월급까지 광복군들의 생계를 위해 쓰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전쟁이 장기화되며 전장은 길어졌고, 아군도 적군도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졌다. 그즈음 계급과 직책도 높아진 장흥 장군은 일본군 포로 중 한인 장병들을 빼내고 탈출시켜 광복군으로 끌어들이는 일에 전념했다. 관할 지역 선무공작을 총괄 지휘한 헌병부대장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중국군 장교 신분인 까닭에 비밀리에 전달된 문서는 매번 즉시 폐기해야 했고, 기록도 일체 남기지 않았다. 광복군이 중국군에 파견한 언더커버, 중국을 무대로 펼쳐진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활동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장흥 장군의 활약상 대부분이 오늘날까지 공식 기록으로 전해지지 못한 이유다.  

의열단 가입 후 손문 묘비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장흥 장군이다. [사진제공=유족&한울출판]

전후 수습하며 동포들의 귀국길 열어 

길고도 힘겨웠던 전쟁은 원폭을 맞은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비로소 끝났다. 중국군은 승전의 기쁨에 환호했고, 조국 대한민국도 광복군도 해방의 감격을 맞았다. 하지만 전후 혼란을 수습해야 하는 과제가 산더미였다. 장흥 장군은 인구가 4000만 명이나 되는 강서성 전역의 치안을 책임지는 중책을 맡는다. 

“그때에도 아버님은 일본군에 끌려와 근무하던 선량한 조선인 장병들, 그리고 중국 군벌들로부터 ‘적국(일본) 식민지 국민’이라는 이유로 재산을 모두 몰수당한 채 생사의 기로에 놓인 동포들을 구제하고, 신분증을 발급해 안전하게 고국으로 귀국시키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셨대요. ‘동포들아, 죽지 말고 조국으로 돌아가자’를 수없이 되뇌이시면서 말입니다. 그때 귀국시킨 동포들이 수만 명에 이를 거라고 하셨습니다.”

장석위씨는 “종전 이후 혼란기를 수습하는 몇 년간, 아버지는 참 보람 있으면서도 힘겨운 시간을 보내신 것 같다”고 말했다. 동포들이 처한 참상을 수없이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한번은 상해에서 배편을 마련해 인천항으로 귀국 동포들을 나르기로 했는데, 한시라도 빨리 배를 타려고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렸다. 안전을 우려한 장흥 장군이 “절대로 정원보다 많이 태워서는 안된다”고 명령을 내렸지만, 실무자들이 뒷돈을 받고 정원의 3배나 되는 인원을 배에 태운 것이다. 그 소식을 듣고 항구로 달려가 보니 이미 배가 출항을 했는데 아뿔싸, 시야에서 채 사라지지도 전에 그대로 가라앉아버렸다고 한다.

“그 참담한 광경을 두 눈으로 보고 있으려니 기가 막히더래요. 그 고생을 해서 이국 땅에서 살아남았는데, 고향 가는 배와 함께 수장되다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김구 선생 모시고 왔지만, 땅도 못 밟아

장흥 장군은 해방되던 해 11월 김구 선생과 이시영 선생 등 광복군을 이끈 지도자들이 귀국하는 비행기에 동승하기도 했다. 당시 장개석 정부가 내어준 특별기를 장흥 장군이 중국군 책임자로서 인솔한 것이다. 

“독립운동의 대장님들을 모시고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오는 기분이 얼마나 설레고 감격스러웠겠습니까. 하지만 잠깐이나마 고향집에 들렀다 돌아가려는 아버님의 꿈은 비행기가 여의도 비행장에 내려앉자마자 산산이 깨졌습니다. 미군정 측에서 ‘현역 중국군 장교는 입국할 수 없다’며 입국을 불허하는 바람에 비행기에서 내려보지도 못하고 되돌아가야 하셨답니다. 20년 만에 형님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배라산 고향마을에서 여의도 비행장까지 걸어서 마중 나갔던 작은아버지도 허탕을 치고 돌아와야 했고요. 아버님도 작은아버님도, 그날의 한탄스러웠던 얘기를 두고 두고 하셨지요(웃음).”  

고양시 덕양구 흥도동 성라산마을의 '고양의 독립운동유적지' 안내판 앞에 선 장흥 장군의 장남 장석위씨.

광복군 복귀와 가슴 벅찬 귀국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2년 동안 전후 수습과 동포 구제, 독립지사들의 귀국을 위해 애쓴 장흥 장군은, 드디어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으로부터 “중국군 직을 사임하고 광복군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고 즉시 명을 이행한다. 그리고는 광복군 복귀와 동시에 총사령부 참모라는 높은 지위를 부여받는다. 장석위씨는 “아버님이 중국군에 적을 뒀지만, 실질적으로 광복군의 핵심 역할을 해왔다는 방증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마침내 1947년 7월, 이번에는 진짜로 아내, 그리고 중국에서 태어난 세 딸과 함께 귀국해 고향집의 노부모와 감격의 상봉을 한다(구술자인 장석위씨는 귀국 후 1949년에 태어났다). 그리고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중국에서 가져온 어마어마한 수집품과 군 활동 자료를 고향집 마당에 펼쳐놓고 친지와 이웃들에게 뿌듯한 귀국 인사를 한다.  

여기까지가 장흥 장군 이야기의 전반부다. 후반부에도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한가득이다. 초기 건군의 주역이었지만 친일세력들에게 밀려나고, 한국전쟁을 치르고, 예편 후 보훈업무와 광복회 탄생의 주역으로 활동한 이야기가 다음 회에 이어진다.  

참고자료 
- 장석위(장흥 장군 장남)씨 구술
- 『장흥 자서전』(장흥 지음, 한울 출판)
- 제5회 자랑스러운 고양인 자료집 「우석 장흥 장군」

사후 42년만에 출간된 '장흥 자서전'.
장흥 장군 생가 앞에 선 장석위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