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음령 숲 그늘에서 만나는 고려의 길, 천년 쉼터
유경종 기자의 역사문화탐방 ⑥ 파주 혜음원지
개경~남경 길목에 자리한 ‘고려 국립호텔’
여행자 숙소, 사찰, 임금 행궁 한자리 배치
몽골침입때 불탔다가 1999년 ‘세상 밖으로’
[고양신문] 고려는 1392년 조선이 건국되기 전까지, 무려 474년간 한반도 역사를 이었던 통일국가였다. 하지만 이후 등장한 조선의 그늘에 가려져 상대적으로 역사적 존재감이 희미한 것도 사실이다. 가까운 듯 낯선 나라 고려. 이번 회부터 고양에서 가까운 고려의 흔적들을 찾아가 보려 한다.
경기 북부 고양, 파주, 양주에는 고려와 연관된 역사유적이 산재해 있다. 임진강 너머 멀지 않은 곳에 고려의 수도 개경이 있었고, 고려 중기 이후에는 남쪽의 또 다른 수도로 개발된 남경(서울)이 번성했기 때문이다. 개경과 남경, 두 도시를 이어주는 길은 늘 오가는 이들로 북적였고, 다양한 성격의 역사유산들이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게 됐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고양시와 지척의 거리에 있는 혜음원지(惠陰院地)다.
그늘 아래 쉬어가는 고개 ‘혜음령’
고양동에서 혜음령 터널을 지나 파주시 광탄면 경계로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으로 ‘혜음원지’ 이정표가 나온다. 조금만 들어가면, 사방이 산자락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터에 옛 건물의 기초석들이 계단식으로 펼쳐진 유적지가 나타난다. 과거 개경과 남경을 왕래하는 행인들을 위한 숙소인 혜음원이 있던 자리다. 7000평이 넘는 넓은 부지에 40여 채의 건물이 빼곡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혜음원에 오늘날 사람들은 ‘고려 국립호텔’이라는 별칭을 붙여줬다.
혜음원이 자리한 혜음령은 우암산 동쪽 해발 164m의 높지 않은 고개지만, 주변 숲이 울창하고 그늘이 짙어, 길을 오가는 이들이 ‘그늘의 은혜를 입는다’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지리적으로는 고양과 파주, 역사적으로는 고려와 조선을 이어주는 관문이다. 고려는 혜음령 북쪽에 국립호텔 혜음원을 건립했고, 훗날 조선은 혜음령 남쪽에 중국 사신을 맞는 국제호텔 벽제관을 세웠다. 굳이 규모를 비교하면, 혜음원이 벽제관에 비해 훨씬 크다. ‘혜음’이라는 이름에서 시대를 초월한 여행자의 고단함과 설렘이 동시에 느껴진다.
옛 건물 서 있던 풍경 상상하는 재미
건물이 사라진 빈 터를 찾는 나들이는 심심하거나 황량할 것 같지만, 가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탁 트인 공터가 주는 개방감과 함께 옛 건물이 서 있던 풍경을 상상하는 재미가 더해진다. 혜음원지 나들이가 이를 증명한다.
5월 초순은 한해 중 숲과 나무가 가장 싱그러운 색을 발하는 시절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잘 정비된 산책로를 따라, 마치 고려시대 여행자가 된 기분으로 혜음원을 느긋하게 둘러보자. 가장 먼저 아래쪽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원(院)터가 나타난다. 여행자들이 묵었던 자리다. 계단으로 연결된 중심선을 따라 여러 단의 마당이 이어지고, 좌우로 건물터가 마주 보며 배치돼 있다. 개경에서부터 지고 내려온 묵직한 등짐을 내려놓고, 허기진 배를 채우고 하룻밤을 자고 나면 남경까지의 남은 걸음이 가뿐했으리라.
원 위쪽에 배치된 건물들은 혜음사(惠陰寺) 절터다. 언뜻 숙박시설과 절이 한울타리 안에 있는 게 특이해 보이지만, 불교국가였던 고려에서 사찰과 승려들은 여러 분야에서 국가기능을 대행했다. 혜음원을 건립하고 관리한 주체도 바로 이들이었다. 절의 가장 큰 건물은 법당인 금당터, 바로 옆은 음식을 만드는 주방과 창고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청자 등 생활유물들이 많이 출토됐다는 점도 이를 방증한다. 예불소리와 밥 짓는 소리가 교대로 들려오는, 먼 옛날 혜음령 숲속의 평화로운 저녁시간이 상상된다.
층층이 반복되는 9단의 건물터
혜음원지의 가장 안쪽, 숲과 담장으로 감싼 아늑한 공간은 놀랍게도 행궁(行宮)터다. 앞서 북한산성 행궁터를 답사했는데, 이번에는 고려의 또 다른 행궁터를 만난다.
김부식이 저술한 <혜음사신창기>(惠陰寺新創記)라는 옛 문헌에 따르면, 행궁은 처음 혜음원을 만들 때는 없었다가 훗날 새롭게 지어졌다고 한다. 발굴조사를 통해 임금이 거처인 정전, 연회나 행사를 열 수 있는 대형 누각, 뒷마당을 감싼 계단식 화단, 누각 앞의 연못 등의 배치가 확인됐다. 국립호텔답게 임금이 거할 특별한 별채를 만든 것이다.
경사지를 따라 층층이 반복되는 9개의 단을 거슬러 올라가며 원과 절과 행궁을 차례로 만나다 보면, 단순히 숙박시설인 줄만 알았던 혜음원의 다채로운 면모가 새롭게 보인다. 설명문과 벤치, 전망대 등 방문자를 위한 최소한의 시설이 적절히 배치됐고, 발굴지에서 수습된 기와조각들을 쌓아놓은 곳도 눈길을 오래도록 머물게 한다.
벽난로 난방, 폭포와 연못도 조성
혜음원지에는 학자들의 관심을 끈 두 개의 흔적이 있다. 하나는 온돌 방식과는 다른 특이한 난방시설이다. 오늘날의 벽난로와 유사한 시설을 방 뒤쪽 벽면에 붙이고, 외부에서 나무를 때 방을 덥혔다고 한다. 조선시대 온돌이 보편화되기 이전 상류층이 사용하던 방식으로, 북한 개성의 고려 왕궁터 만월대에서도 유사한 형태가 발견됐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잘 설계된 배수체계다. 앞서 북한산성 행궁터에서도 보았듯, 산자락에 둘러싸인 건물에서 간과해선 안 될 요소가 배수 시스템이다. 혜음원에서도 건물 양편에 돌로 닦은 배수로를 만들어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을 다스렸다. 또한 건물 안쪽에도 가로 세로의 배수로를 깔고, 중간중간 물을 모으는 집수시설도 만들어 물의 속도를 조절했다.
더 주목할 부분은 단순히 배수 용도만이 아니라, 주요 지점마다 폭포와 연못 등을 조성해 미적 요소를 더했다는 점이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활용해 담장 사이 작은 개울이 흐르고, 폭포소리가 들려오고, 연못에는 물고기가 헤엄치는 경관을 연출해 낸 것이다.
1120년 건립, 몽골 침입 때 불타
혜음원은 고려 예종 임금이 재위하던 1120년에 건립됐다. 앞서 언급한 <혜음사신창기>에는 혜음원의 창건 일화가 상세히 기록돼 있다. “개경과 남경을 오가는 이들이 산이 깊은 혜음령을 넘다가 도적과 호랑이를 만나 해를 입는 일이 빈번히 발생한다”는 신하 이소천의 보고를 들은 예종 임금이 “방안을 찾으라” 명한다. 이에 이소천이 승려들을 모집해 사찰과 원을 조성하니, 깊은 숲이 깨끗한 집으로 변하고 무섭던 길이 안전해졌다. 하지만 혜음원의 역사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학자들은 몽골 침입을 받아 불에 타 무너져 내린 것으로 추측한다.
혜음원은 수백 년간 역사 속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혜음원을 다시 세상 밖으로 불러낸 건 놀랍게도 한 덩이의 기와조각이었다. 1999년, 마을 주민이 산속에서 암막새 기와 하나를 주웠는데, 가운데에 ‘혜음원’ 글씨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여러 옛 문헌에 등장하지만,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던 혜음원이 수백 년의 긴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이후 발굴조사와 학술조사를 통해 혜음원의 실체가 하나둘 밝혀졌고, 2005년 사적으로 지정됐다.
고려시대로 이끄는 ‘기적 같은 선물’
2022년에는 혜음원의 가치와 의미를 알기 쉽게 전달해주는 방문자센터가 문을 열었다. 센터는 모듈건축 방식으로 깔끔하게 지어졌는데, 규모는 크지 않아도 구성이 알차다. 영상실에서는 혜음원의 사계를 표현한 아름다운 영상이 방문객을 맞는다. 혜음원의 역사가 기록된 문헌 <동문선>의 책장이 펼쳐지고, 예종이 신하들과 함께 혜음원으로 행차를 하고, 화려한 연등과 형형색색의 불꽃놀이가 화면 가득 펼쳐진다.
전시실에서는 혜음원의 탄생과 소실까지의 과정을 터치월을 통해 살필 수 있고, 혜음원이 새겨진 암막새와 용머리기와 등의 발굴 유물 모형도 만날 수 있다. 유리창 가득 혜음원의 녹색 전경이 펼쳐진 다목적홀, 루프탑에서 탁 트인 조망을 감상할 수 있는 2층 전망대는 나들이의 쉼표를 찍기 좋은 포인트다.
방문자센터 리플릿에는 ‘혜음원지의 발견은 파주에 온 기적과도 같은 선물이었다’는 문장이 적혀있다. ‘고려’라는 먼 과거의 나라를 향해 여행을 시작하는 기자 역시 혜음원 방문일지에 같은 인사를 남기고 싶다. “선물 같은 하루, 잘 쉬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