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이야기
김한수 소설가의 ‘텃밭에서 세상읽기’
[고양신문] 길고 지루한 장마가 계속 이어지면서 전국적으로 수해를 입은 지역들이 속출하고 있다. 다행히 자유농장은 높은 지대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지만 수마가 할퀴고 간 현장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차마 남의 일 같지 않아서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나이를 먹은 탓일 수도 있겠지만 어려서부터 잦은 물난리를 겪어온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열 살 무렵 우리 집은 금천구 시흥동 산동네에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 집 옆에는 높은 축대가 쌓여있었고 그 위로 시멘트 블록으로 지어진 집이 있었다. 방학이 시작되면서 지겹도록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아버지는 점심을 먹고 나면 우리 사 남매를 옆에 쪼르륵 눕혀놓고 낮잠을 즐겼다.
그러던 하루는 낮잠을 자자는 아버지의 말을 무시하고 나는 동생들을 데리고 여섯 칸짜리 옷장 위로 올라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엄청난 굉음과 함께 축대가 무너지면서 윗집이 우리 집을 덮쳤는데 천행으로 옷장 앞까지만 집이 무너졌다. 다행히도 아버지는 벽에 바짝 붙어서 잠을 청한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때의 기억은 지금까지도 아찔하기만 하다.
몇 년 뒤 우리 가족은 광명시 하안동으로 이사를 갔다. 지금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지만 당시의 하안동은 안양천변보다 지대가 낮아서 극심한 폭우가 쏟아지면 이만 채에 달하는 집들이 처마 밑까지 물에 잠기기 일쑤였다. 그래서 발목이 물에 잠기면 인근 초등학교와 중학교로 대피하라는 긴급한 대피 방송이 동사무소 스피커에서 울려 퍼졌고, 사람들은 서둘러 이런저런 보따리를 이고 지고 긴 띠를 이루었다. 피난이 늦은 일부 사람들은 커다란 고무통에 올라타서 노를 젓거나 두툼한 스티로폼 위에 엎드려서 헤엄을 치기도 했다.
학교에서의 피난생활은 짧으면 사나흘 길면 일주일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물이 다 빠지고 나면 참상도 그런 참상이 없었다. 공터마다 사람들이 내다 버린 가재도구들이 산처럼 쌓였고, 화장실이 죄 넘친 탓에 사람들은 물로 집 전체를 씻어내느라 땀을 뻘뻘 흘려야만 했다.
팔팔올림픽을 앞두고 재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우리 가족은 하안동을 떠났는데 그동안 세 번의 물난리를 겪었다. 지대가 높은 구로동에 살게 되면서 나는 장마철만 되면 높은 곳에 산다는 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물난리를 겪은 것은 십이 년 전 풍동에서 농장을 운영하고 있을 때였다. 농장 옆 하천이 범람하면서 하우스 안이 삼 분의 일쯤 물에 잠겼고, 냉장고부터 시작해서 온갖 집기들이 물에 동동 떠다녔다.
그 이후부터 나는 장마철만 되면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벗들에게 안부를 묻는 버릇이 생겼고, 수해 소식을 전하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장탄식을 내뱉곤 했다.
그나저나 이 놈의 비는 언제쯤 그치려나, 벌써 보름 가까이 농사일에 거의 손을 쓰지 못하고 있다. 덕분에 농장이 온통 풀밭이 되다시피 했고, 그 풍경을 바라보는 내 입에서는 한숨이 절로 푹푹 나온다.
그나저나 비가 그쳐도 걱정이다. 습하고 무더운 땡볕 아래에서 밭일을 하면 현기증이 핑 돌아서 삼십 분마다 한 번씩 쉬어야 한다. 모기도 문제이다. 습한 밭에 쪼그려 앉으면 새까만 산모기들이 사방에서 달려든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장마피해를 입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