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망 없는 사람들의 서점

윤상근의 동네서점기행(14) -스테디슬로우북스 오래 머물 수 있는 안전한 공간 추구 생활 도움되는 ‘한 문장’ 발견하기를

2026-08-18     윤상근 세리서점 대표
일산동구 정발산동에 자리한 동네서점 '스테디슬로우북스'.

[고양신문] “사장님이라고 불리는 게 아직도 창피해요.” 문을 연 지 2년이 지난 스테디 슬로우북스의 이은지 대표는 처음 온 손님들이 자신을 ‘사장님’이라고 부르면 여전히 어색하다고. 그래서 이곳을 자주 찾는 사람들은 사장님 대신 ‘은지님’이라고 부른다. 서점을 운영하는 사람을 만나러 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사람이 서점을 시작하게 된 이야기를 묻게 된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대개 서점 이야기는 어느 순간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책을 좋아해서 시작했다는 단순한 문장 뒤에는 회사를 그만둔 날이 있고, 지쳐버린 시간이 있고, 우연히 들어간 어느 공간이 있고, 어떤 사람을 만난 일이 있다. 그러니까 ‘왜 서점을 시작했나요?’라는 질문은 어쩌면 ‘당신은 어떻게 지금의 당신이 되었나요?’라는 질문이나 다름없다. 은지님은 출판사를 다니며 오랫동안 책을 만들었다. 편집자였고, 책을 무척 좋아했다. 회사에 다니던 시절에는 점심시간이면 마포의 서점을 돌아다녔고, 한 달에 한 번 월급날이 되면 서점에 가서 신나게 책을 샀다. 그렇지만 좋아하는 일도 너무 오래, 너무 열심히 하면 지치는 모양이다.

17년, 18년쯤 쉬지 않고 일한 끝에 번아웃이 왔다. 은지님은 일을 쉬기로 했다. 책읽기도 멈췄다. 서점에도 가지 않았다. 그러다 어머니와 여행을 떠났다. 교토였다.
원래 여행을 가면 꼭 서점을 찾던 사람이었지만 그때만큼은 서점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머니가 서점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너랑 오지 않으면 이런 데를 언제 와보겠느냐”는 말에 마지못해 교토의 유명서점 게이분샤를 찾았다. 문을 열었다. 책 냄새와 나무 냄새가 났다. 그리고 갑자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냥 하고 싶은 일 하고 살아라.” 엄마가 말했다. 그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회사에 다니면서도 언젠가 일을 그만두면 공간을 열겠다는 말을 종종 했었다. 망하더라도 한번 해보겠다고. 교토의 작은 서점에서 잊고 있던 그 말이 다시 떠올랐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12월 31일, 은지님은 주변 사람들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나 서점 시작할 거야.” 자신이 나중에 마음을 바꿀까봐 일부러 사람들에게 떠벌린 선언이었다.
그때부터 서점을 열 자리를 찾아다녔다. 처음에는 익숙한 마포를 생각했다. 오랫동안 다녔고 좋아했던 서점들도 그곳에 많았다. 하지만 곧 생각이 바뀌었다. 이미 좋은 서점이 많은 동네에 굳이 자신이 하나를 더 보탤 필요가 있을까. 무엇보다 은지님은 한적한 곳에 있고 싶었다. 그러다 일산의 지금 자리를 발견했다. 이 공간 안에 앉아 밖을 바라보니 흰 벽과 나무가 보인다. 꽃을 좋아하는데 바로 옆에는 꽃집이 있었다. 월세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해야겠다.” 부동산 계약을 하고 문을 열기까지 석 달이 걸렸다. 인테리어를 맡은 사람과 계속 이야기를 나누며 공간을 만들었다. 은지님이 원했던 것은 ‘지방 소도시의 가게 같은 곳’이었다. 인테리어 공사를 맡아줬던 사람은 이제 손님이 됐다.

스테디슬로우북스의 내부 모습.

은지님은 영화 <안경>과 <카모메 식당>을 보면서 공간의 힘을 상상했다. 두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이곳의 분위기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언가 대단한 사건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서 오래 머물 수 있는 곳. “스테디슬로우북스는 안전한 공간이에요.” 그냥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왔을 때 안전하다고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책을 많이 읽지 않는 사람도 커피를 마시러 들어왔다가 책 표지를 바라보고, 한 권을 펼쳐보고, 그 안에서 생활에 도움이 되는 한 문장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랐다. 책을 고르는 첫 번째 기준은 은지님 자신이 독자로서 읽고 싶은 책인가다. 그리고 두 번째 기준은 재미있을 것. ‘책을 이미 잘 읽는 사람’보다 ‘책을 좋아하고 싶은 사람’을 생각했다. 철학이나 과학도 처음 읽을 수 있는 책을 고르고, 어떤 책이든 적어도 한 줄 정도는 밑줄을 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열린 서점에서 은지님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 ‘사람들’을 만나게됐다. 
서점을 열기 전까지 은지님은 혼자 책을 읽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스테디슬로우북스에서는 마음챙김 북클럽, 심리학을 기반으로 문학을 읽는 모임, 일본문화 북클럽, 낭독모임, 에세이 모임 같은 여러 모임이 이어지고 있다.

책을 함께 읽으며 자신이 사람을 보이는 대로 판단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멀쩡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밝아 보이는 사람에게도 저마다 크고 작은 그늘이 있었다. 혼자였다면 좀처럼 꺼내지 않았을 이야기를 사람들은 책을 가운데 놓고 하나씩 꺼냈다. 그때 은지님은 자신이 서점을 시작하며 막연하게 생각했던 ‘안전한 공간’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았다. “그 그늘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게, 책이 아니었다면 가능했을까요?”

은지님 자신도 내향적인 사람이고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 중에도 내향적인 사람이 많다. 그러니 스테디슬로우북스에서 일어나는 일을 조금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내향인들의 연결’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그 연결은 은지님이 모든 것을 기획해서 만들어낸 것도 아니다. 지금 활발히 운영되는 ‘일본 문학 독서 클럽’의 진행자는 우연히 서점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이었다. 어느 날 서점에 놓인 일본소설 한 권을 보더니 물었다. “이 책을 왜 여기에 두셨어요?” 그는 그 책의 번역자였다. 그 인연으로 둘은 가까워졌고 그림책으로 일본어를 배우는 작은 모임을 시작했다. 독립서점에서 모임을 열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사람을 모으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다. 한두 명이 신청하는 날도 있다. 그래도 모임은 계속 열렸다. 물론 지금도 열린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서점에서 ‘손님’이라는 말이 얼마나 임시적인 이름인가 생각한다. 오늘 처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손님이지만, 다음 달에는 독서모임에 앉아 있을 수 있고, 몇 달 뒤에는 모임을 진행할 수도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함께 송년회를 보내는 친구가 된다. 스테디슬로우북스의 손님들 역시 대부분 그렇게 만들어졌다. 책을 사러 왔다가 모임에 참여하고, 모임에 참여했다가 서점을 좋아하게 되고, 서점이 좋아져 다시 책을 사러 온다.

스테디슬로우북스의 서가.

은지님에게 가장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이 언제였느냐고 물었다. “없었어요.” 물론 힘든 순간은 있었다. 첫해 겨울은 정말 사람이 없었다. 춥고 손님도 없어서 절망적이었다. 그런데 다음 겨울이 왔을 때는 이상하게 편안해졌다. 모임도 생겼고 사람도 생겼다. 애초에 큰 기대를 품고 시작하지 않았던 것도 도움이 됐다. 먼저 서점을 운영하던 편집자 선배가 현실적인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몇 년 동안 돈을 벌지 않아도 버틸 수 있을 정도로 준비하고 시작하라고 했다. 그래서 경제적인 기대치는 낮았다. 은지님은 최소한 3년은 해보겠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4년까지는 무조건 해볼 생각이다. 그리고 그 뒤에 다시 결정하기로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스테디슬로우북스’라는 이름이 새삼 이 곳과 은지님에게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서점 이름을 고민할 때 자신의 장점을 생각해봤다고 한다. 은지님이 생각한 자신의 장점은 꾸준함이었다. 빨리 가는 것보다는 계속하는 것. Steady, Slow. 꾸준하게, 천천히.

은지님은 일산에 서점을 열기를 잘했다고 말했다. 그 이유를 설명하는 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일산은)야망 없는 사람들의 도시 같아요. 그래서 너무 좋아요.”
서점에서 친해진 사람들에게도 농담처럼 말한다. “야망 없는 사람들끼리 모여요.” 서점에 있는 동네는 저녁 6시가 되면 하나둘 가게가 문을 닫는다. 늦게까지 악착같이 영업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어느 날 손님이 거의 없던 날, 옆 꽃집 사장님이 찾아와 말했다. “오늘은 너무 심심한 날이었어.” 은지님은 그 말에 충격을 받아 일기장에 적어뒀다고 한다.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면 손님이 없는 날을 ‘망한 날’이나 ‘매출이 안 나온 날’이라고 부르기 쉽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것을 그냥 ‘심심한 날’이라고 부른다.

대개 야망이 있는 삶을 좋은 삶이라고 여긴다. 더 많이 팔고, 더 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더 유명해지고, 두 번째 가게를 내고, 결국에는 무엇인가가 되어야 한다. 작은 가게조차 성장하지 않으면 실패한 것처럼 이야기한다. 오늘 몇 권을 팔았는지와 별개로 누군가가 오래 머물다 갔다는 것, 책을 읽지 않던 사람이 용기를 내 북클럽에 들어와 책을 읽기 시작했다는 것, 손님이었던 사람이 모임을 만들고 친구가 되었다는 것. 은지님과 대화를 하며 동질감을 느꼈다. 물론 그는 나와는 많이 다른 상냥한 사람이다.

인터뷰를 마치며 마지막 질문을 했다. 지금의 은지님이 서점을 시작하기 전의 은지님을 만난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지.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생각보다는 괜찮을 거야.” 그리고 조금 덧붙였다. “네가 상상했던 최악보다는 괜찮을 거야.”

어쩌면 사람들이 오래 지키고 싶은 공간은 누군가의 대단한 야망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조금 느리더라도 계속하는 것으로 만들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스테디, 슬로우.

스테디슬로우북스
주소 : 일산동구 정발산동 1338-8 1층
인스타그램 : steadyslow_boo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