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댕을 지우고 까미유 클로델을 만나다

유럽 여행에서 만난 미술 이야기 ① 까미유 클로델의 시간을 걷다

2026-08-22     김상채 호서대학교 아트앤컬처대 학장

[고양신문] 우리는 까미유 클로델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누군가는 그녀를 로댕의 연인으로 기억하고, 누군가는 사랑에 상처받은 비운의 여성 조각가로 기억한다. 그러나 파리 동역에서 기차로 한 시간 남짓, 노장 쉬르 센(Nogent sur Seine)의 까미유 클로델 미술관을 찾아가면 우리가 알던 이야기와는 조금 다른 얼굴의 예술가를 만나게 된다. 

이번 연재는 까미유 클로델 미술관의 전시실을 천천히 걸어보는 여정이다. 그녀의 연대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사쿤탈라'의 청동 버전인 '맡겨짐' , '성숙의 시대', '간청', '왈츠' 등 그녀가 남긴 작품 앞에 하나씩 멈춰 서서 그 안에 담긴 사랑과 기다림, 이별과 고독의 시간을 들여다본다. 그렇게 전시실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로댕의 연인’이라는 익숙한 이름 뒤에 가려져 있던 한 사람의 예술가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네 번의 이야기를 통해 그녀가 남긴 작품을 따라 까미유 클로델의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본다. <필자 주>

파리를 벗어나 노장 쉬르 센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 김상채 학장 제공

첫 번째 이야기: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

파리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속에 하나의 예술 순례길을 품고 있다. 어떤 이는 모네를 만나기 위해 지베르니의 정원을 걷고, 어떤 이는 고흐가 삶의 마지막 계절을 보낸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향한다. 그렇게 저마다의 예술가를 찾아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어느새 파리는 하나의 거대한 미술관이 된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내가 찾아간 곳은 그 익숙한 순례의 지도에서 조금 비켜나 있었다. 바로 까미유 클로델을 만나기 위한 길이었다.
파리에서 동남쪽으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노장 쉬르 센(Nogent-sur-Seine), 유명 관광지를 소개하는 안내서에서 이 작은 도시의 이름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이곳에 까미유 클로델의 이름을 내건 미술관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여행자도 많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오래전부터 이곳에 가보고 싶었다.

독자들은 까미유 클로델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대개는 로댕의 제자이자 연인, 사랑에 상처받은 여인, 오랜 세월 정신병원에서 살다간 비운의 여성 조각가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한 예술가의 생애를 다 설명할 수 있을까. 로댕이라는 거대한 이름을 잠시 걷어내고 나면, 그 뒤에는 어떤 까미유가 남을까. 그 질문을 품고 파리 동역에서 기차에 올랐다.
열차가 출발하자 복잡한 파리의 풍경들이 천천히 밀려났다. 건물은 차츰 낮아지고 시야는 넓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여름빛을 머금은 들판과 작은 마을, 멀리 솟은 성당의 첨탑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도시의 소음이 멀어질수록 시간도 조금씩 느려지는 듯했다.
그 풍경을 바라보다 문득 어린 까미유를 떠올렸다. 아직 로댕을 만나기 전, 사랑과 상처, 세상의 오해가 그녀의 삶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이었다. 흙을 만지며 사람과 동물의 형상을 빚던 소녀에게 세상은 아직 가보지 않은 길로 가득했을 것이다.

우리는 한 사람의 마지막을 알고 나면 자꾸 그 끝에서부터 삶을 거꾸로 읽는다. 까미유의 마지막이 고독했기에 젊은 날의 모든 순간에도 비극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던 시간이 있었다.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 좋았고, 조각가가 되고 싶었으며, 자신의 이름으로 세상에 서고 싶었던 시간이 있었다. 한 시간 남짓 달린 기차가 노장 쉬르 센 역에 닿았다. 역을 나서자 파리와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조용하고 간간이 사람들이 보이는 길을 따라 걸었다. 낮은 집과 작은 상점, 창가의 화분과 오래된 벽이 이어졌다. 한 예술가의 출발점이 되었던 곳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평범하고 고요했다. 오히려 그 담담함이 좋았다. 얼마쯤 걸었을까. 마침내 까미유 클로델 미술관(Musée Camille Claudel)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이름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책과 사진으로 수없이 접했던 이름이 그날은 이상하리만큼 새롭게 다가왔다. 이제야 한 사람의 삶 가까이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까미유 클로델 미술관 전경. 김상채 학장 제공
까미유 클로델 미술관에 전시된 청동조각 '맡겨짐'. 김상채 학장 제공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리고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내맡김(L'Abandon)’ — ‘사쿤탈라(Sakountala)’에서 발전한 청동 작품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순간 걸음이 멈췄다. 두 사람의 몸이 서로를 향해 깊숙이 기울어져 있었다. 무릎을 꿇은 남자는 여인을 끌어안고, 여인은 상체를 숙여 그의 몸 위로 자신을 포개듯 감싼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필요 없어 보였다. 초록빛 녹청이 내려앉은 청동 표면 위로 빛이 조용히 흘렀다. 차가운 금속인데도 금방이라도 두 사람의 체온이 전해질 것만 같았다. 사진으로 수없이 보았던 작품이었다. 그러나 눈앞에서 마주한 ‘내맡김’은 전혀 달랐다. 그리움과 기다림, 오랜 시간을 돌아 다시 만난 순간의 떨림이 두 사람의 몸 사이에 머물러 있었다.
‘내맡김’의 원본인 ‘사쿤탈라’는 인도의 옛 희곡에서 가져온 이야기다. 저주로 사랑하는 이의 기억을 잃었던 왕이, 긴 세월을 돌아 그녀를 다시 알아보는 순간을 까미유는 재회의 감정을 표정보다 서로를 향해 기울어진 몸으로 빚어냈다. 두 사람은 마치 오래전부터 하나의 곡선을 이루기 위해 기다려온 것처럼 보였다. 나는 한동안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까미유 클로델의 '맡겨짐'. 김상채 학장 제공

그 순간에는 로댕도, 훗날 까미유에게 찾아올 비극도,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인간의 마음을 설명이 아닌 몸짓 하나로 이토록 깊게 빚어낼 수 있었던 젊은 예술가의 손을 바라보고 싶었다. 사랑은 어쩌면 말보다 몸이 먼저 기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래 헤어졌던 사람이 돌아왔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하기도 전에 먼저 손을 내밀고 품에 안는 것처럼, 나는 아마 이 순간을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이 스쳤다. 파리에서 한 시간 넘게 기차를 타고, 낯선 작은 도시의 길을 걸어온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나는 이미 다 안다고 믿었던 이름 하나를 다시 만나러 온 것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마음을 이토록 뜨겁게 조각할 줄 알았던 예술가, 까미유 클로델을 만나러 온 것이었다. ‘내맡김’을 뒤로하고 다음 전시실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사랑을 이토록 깊이 빚어낼 줄 알았던 이 손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그 답을 찾아, 이제 로댕을 만나기 전의 까미유에게로 걸어갈 차례였다.